15년만에 달러당 한때 83엔으로 치솟아··· 日 경제 '엎친데 덮친격'
[Focus] 엔高의 경제학··· 美·유럽 더블딥 공포로 엔화 가치 고공행진
지난 25일 일본 도쿄의 총리 관저.간 나오토 총리와 노다 요시히코 재무상,센고쿠 요시토 관방장관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1시간여 동안 진행된 이날 긴급 모임의 안건은 엔고 저지 대책.정부 대변인격인 센고쿠 장관은 회동 직후 "최근 엔화 환율 동향은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났으며 투기세력들도 일부 가담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정부의 시장개입이 이뤄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 엔고,일본 경제에 엎친 데 덮친 격

이처럼 일본 정부가 긴박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엔화 강세가 글로벌 경기 불황의 여파에서 겨우 빠져나오려는 일본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국 통화가치의 강세(환율 하락)는 일본처럼 수출 규모가 큰 나라의 경제엔 치명적이다.

연초 달러당 90엔 안팎에서 오르내리던 엔화 가치는 지난주 한때 달러당 83엔대까지 치솟았다.

1995년 6월 이후 15년 만의 최고치다.

소니 도요타 신일본제철 등 대부분의 일본 기업들은 올해 환율을 달러당 평균 90엔으로 보고 사업 계획을 짰다.

도요타의 경우 엔화 가치가 1엔 오르면(환율이 1엔 떨어지면) 연간 300억엔의 영업이익이 감소한다.

엔화가 달러당 85엔 수준이 계속되면 단순 계산만으로도 1500억엔(약 1조9700억원)의 이익이 줄어들게 된다.

다이와종합연구소에 따르면 엔화 가치가 달러당 10엔 뛰면 주요 기업들의 경상이익이 올해는 10.2%,내년에는 9.6% 각각 감소한다.

주력 기업들의 실적 우려는 주가 하락을 부채질,소비심리를 얼어붙게 하고 있다.

도쿄 증시의 닛케이평균주가는 지난주 9000엔 선 아래로 추락했다.

9000엔 선이 깨지기는 지난해 5월1일 이후 처음이다. 재계단체인 게이단렌의 요네쿠라 히로마사 회장(스미토모화학 회장)은 "엔고가 예상밖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여기다 주가 하락까지 더해져 회복 기조에 있던 일본 경기에 악영향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민간 싱크탱크인 간사이사회경제연구소는 엔 가치가 10엔 상승하면 경제성장률이 올해 0.3%포인트,내년 0.6%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의 성장률은 지난 1분기(1~3월) 4.4%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벗어나는 듯했으나 2분기(4~6월)에는 0.4%로 다시 둔화됐다.

엔고의 영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채산성이 악화되는 기업이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기면서 일본 국내 경제의 공동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렇게 되면 가뜩이나 좋지 않은 일자리 사정을 최악의 상태로 몰고갈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선 정부와 중앙은행이 엔화 강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

하지만 간 나오토 정부는 묘안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다.

엔화 강세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은행이 달러화를 사들이고 엔화를 풀어야 하는데 쉽지 않아서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5년 내 수출을 두 배로 늘려 경제위기를 극복한다는 목표 아래 수출에 유리한 달러 약세(엔화 강세)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도 엔화 약세를 원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은 중국 정부에도 위안화 가치를 올리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환율 전쟁(통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엔고의 원인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통화 가치는 그 나라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튼튼하고 경기 또한 좋을 때 강세를 보인다.

그런데 일본 경제가 그리 좋지 않은데 엔화 가치가 뛰는 이유는 뭘까.

첫째는 엔화가 세계 금융시장에서 안전자산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달러도 못 믿고 유로화도 못 믿으니 믿을건 엔화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 경제는 부동산 경기가 다시 침체 양상을 보이면서 경기가 반짝 상승 후 재차 하강하는 더블딥 우려가 팽배해지고 있다.

유럽은 그리스 스페인 등을 비롯한 재정 적자 문제에 여전히 발목이 잡혀 있다.

이처럼 미국과 유럽 경제가 부진하고 글로벌 자금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엔화 자산으로 몰리면서 엔고 양상을 초래하고 있다.

또 일본의 초저금리 정책으로 인해 해외로 빠져나갔던 엔 자금이 다시 일본 국내로 돌아오고 있는 점도 엔화 가치를 밀어올리는 한 요인이다.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지난 6월 현재 1조97억달러로 세계 2위이고 매년 꾸준히 무역흑자를 내고 있다.

둘째는 2조40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는 중국 정부가 일본의 국채에 투자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투자 대상 다변화 차원에서 한국 정부가 발행한 채권뿐 아니라 엔화 채권도 사는데 이는 엔화에 대한 수요를 늘려 엔화 가치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 한국 경제에도 영향

엔화 강세는 한국 경제에 상반된 영향을 미친다.

먼저 긍정적 측면으론 세계 시장에서 일본 제품과 경합하는 전기 · 전자와 자동차,조선의 가격경쟁력이 올라가 수출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령 100엔의 가치가 우리 돈으로 1300원에서 1400원으로 뛰었다고 하자.

그러면 200만엔 하는 도요타 자동차의 수출가격은 원화로 따지면 2600만원에서 2800만원으로 7.7% 오르게 돼 해외 시장에서 한국산 자동차의 가격경쟁력이 그만큼 강화된다.

반면 부정적 영향도 있다.

첫째는 대일 무역적자의 악화다.

일반적으로 상대국의 통화가치가 오르면 우리나라의 수출이 늘어나고 수입이 줄어들지만 일본의 경우 우리의 수출품에 들어가는 부품 소재 등을 주로 수입해 오기 때문에 엔화가치가 올라가더라도 수입은 줄어들지 않는다.

올 상반기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교역에서 128억달러를 수출하고 309억달러를 수입했다.

이 결과 수출액에서 수입액을 뺀 대일 무역적자는 181억달러로 집계됐다.

이는 반기 기준으로 사상 최대 적자다. 일본산 기계류와 부품 · 소재 수입이 확대된 데다 엔화 강세로 수입 상품의 가격 또한 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을 만드는 핵심 부품 · 소재나 기계류를 일본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또 하나는 엔화 대출 기업의 피해다. 현재 일본의 기준금리는 연 0.1%로 사실상 제로다.

한국에 비해 아주 싸게 돈을 빌릴 수 있다.

이처럼 금리가 낮다 보니 한국 기업 중 적지 않은 기업이 엔화 자금을 빌려 기계류 구입 등에 썼다.

엔고는 엔화 자금을 빌려쓴 기업들에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A기업이 100엔=1100원일 때 일본 금융사에서 100억엔을 대출받았다고 하자.

그런데 엔화 강세로 지금은 100엔이 우리 돈으로 약 1410원이다.

이렇게 되면 이 기업이 갚아야 할 엔화 대출금은 1100억원에서 1410억원으로 무려 310억원을 더 부담해야 한다.

최근 국내 일부 중소기업들은 엔화 대출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상환하기 힘들어지자 은행들과 상환 시기를 연기하는 방안을 놓고 협의하고 있다.

강현철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hc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