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이나 군중심리 대신 개인이 독립적 의사 결정할 수 있어야 합리적 선거 가능

[Focus] 대중은 똑똑하다? 아니, 어리석다?
1968년 5월.

미군 잠수함 스콜피온호가 북대서양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도중에 갑자기 사라졌다.

미 해군은 스콜피온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미 해군은 결국 잠수함이 마지막으로 보고한 위치를 중심으로 20㎢에 달하는 수심 수백m의 깊은 바다를 수색하기로 결정했다.

전략이라고 해봐야 잠수함과 해류 분야 최고 전문가 몇 명에게 스콜피온호가 어디에 있을지를 물어본 게 고작이었다.

이때 해군 장교 존 크레이븐은 다른 방안을 내놓았다.

가능성이 있는 여러 시나리오를 만들고 수학자,잠수함 전문가,인양 전문가 등 다양한 그룹에 가장 그럴싸한 시나리오를 각각 내놓도록 했다.

그는 전문가 그룹에 질문한 후 대답한 수치를 통계적으로 분석하고,또 더 많은 질문을 던진 후 수치를 입력하는 방식으로 최종 수치를 얻어냈다.

크레이븐이 찾아낸 곳은 팀원 개개인의 대답과는 다른 지점으로 팀원 가운데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미 해군 함정은 스콜피온호가 실종된 지 5개월 만에 크레이븐이 지목한 곳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서 잠수함을 찾아냈다.

팀원 개개인은 몰랐던 사실을 전체 집단(대중)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지혜로운 대중

대중 민주주의는 대체로 '무지한 대중'을 전제로 하고 있다.

대중은 전문적 사안에 대해 낮은 지식과 견해를 갖고 있다.

비이성적이며 합리성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대중에 대한 이 같은 시각은 엘리트 권력에 대한 옹호로도 볼 수 있다.

현대의 대중들은 매체의 다양성과 상호성 덕분에 사회적 이슈에 대해 좀 더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으며,스스로 합리성의 결여에 대한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1907년 영국 과학자로 우생학의 창시자인 프랜시스 골튼은 런던을 떠나 서부 플리머스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목적은 가축 시장을 찾아 우수한 유전적 특성을 측정,품종을 개량하려는 것이었다. 골튼은 시장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소의 무게를 알아맞히는 대회를 목격했다. 살찐 소 한마리가 무대 위에 올려져 있고 사람들은 한 장에 6펜스씩 하는 티켓을 사서 소 무게 추정치를 적어냈다.

실제 무게에 가장 근접하게 적어낸 사람이 상금을 타는 게임이었다. 내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800여명이었으며 직업과 지식 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

내기가 끝난 후 그는 진행자에게 티켓을 넘겨받아 통계를 내보았다.

골튼은 참가자들이 써낸 추정치 평균값이 실제 소의 무게와는 다를 것으로 확신했다. 일부 현명한 사람과 보통 사람,우둔한 사람을 섞어놓았으니 그 집단은 반드시 잘못된 답을 낼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빗나간 것은 골튼의 생각이었다.

게임 참가자들의 평균값은 1197파운드로 실제 소 무게(1198파운드)와 거의 똑같았다.

당초 소 무게 맞히기 게임을 통해 평균 유권자들(게임 참가자들)의 무능력함을 증명해보고자 했던 골튼은 "게임 결과를 보면 민주주의의 선거도 생각했던 것보다 신뢰할 만한 구석이 있다"고 말을 바꿔야 했다.

골튼의 경험은 집단은 놀랄 만큼 똑똑하며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는 사실이 담겨있다.

구성원 대부분이 특별히 박식하거나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집단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따라서 특별히 지적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집단을 지배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불완전한 판단을 적절한 방식으로 합치면 집단의 지적능력(collective intelligence)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낼 때가 많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증시에서 형성되는 가격은 거대한 집단인식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뛰어난 경기 선행성을 나타내왔다.

현대 재무이론의 근간이 된 효율적 시장가설은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어떤 전문가도 시장의 판단(집단의 판단)을 앞설 수 없다고 보고 있다.

⊙ 어리석은 대중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찰스 매케이가 1841년에 펴낸 '대중의 미망과 광기'는 대중의 열광과 집단의 어리석음을 논한 재미있는 책이다.

매케이가 보기에 대중은 전혀 지혜롭지 않았으며,합리적이지도 않았다.

집단적 판단은 극단으로 치닫게 돼 있다. 매케이는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생각한다. 군중은 집단적으로 미쳤다가 나중에야 천천히 자각을 찾게 된다"고 주장했다.

철학자 버나드 바루크는 "개인은 누구나 현명하고 합리적이지만 집단의 일원이 되면 바보가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역사학자 로버트 칼라일은 "나는 개인이 모르는 걸 집단이 알 것이라곤 믿지 않는다"고 했으며,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광기 어린 개인은 드물지만 집단에는 항상 그런 분위기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19세기 프랑스 사회학자로 군중심리를 파헤친 구스타브 르봉은 "집단 내에서 쌓여가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이라며 "현명한 배심원 한두 사람이 반대해도 결정을 밀어붙이는 배심원제는 바보들의 모임"이라고 혹평했다.

대중이 집단적으로 그른 결정을 내린 역사적 사례로는 독일의 나치즘,이탈리아의 파시즘이 대표적이다.

1920년대 독일은 민주적인 선거에서 독재자 히틀러를 선택했으며,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국민은 독재자 무솔리니에 열광했다.

대중들은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이후에야 비로서 자신들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집단지성에도 함정이 있다.

인터넷 등을 악용한 '소수의 폭력'에 대중들이 쉽게 휘둘릴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해 한 고등학생이 장난 삼아 "남한이 곧 북한을 공격,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황당한 글을 메신저로 친구들에게 보냈다.

이 글은 인터넷과 트위터,휴대폰 메시지를 타고 30분 만에 전국으로 퍼져 최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인터넷은 또 개인이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저하시키고 '정크(쓰레기) 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전문가들은 논쟁에 참여하길 꺼리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부작용도 야기한다.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KAIST 겸임교수)은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을 근거가 없다고 거부하는 부인주의(denialism)자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종교적 신념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 때문에 과학적 진실을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부인주의 연구 권위자인 영국의 마틴 매키에 따르면 부인주의자들은 음모론을 동원하고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이비 전문가를 끌어들이며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증거가 아니면 깡그리 쓰레기 취급을 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또 상대방이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의 증거를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 집단지성이 발휘되려면…

현명하면서도 동시에 어리석은 측면을 가진 대중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그건 바로 개인이 독립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은 광장이나 군중심리에 영향을 받아선 안된다.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 저널 등의 유명 칼럼리스트인 제임스 서로워키는 대중의 현명한 판단엔 4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의견의 다양성이다.

설령 왜곡된 해석일지라도 사람들이 자기만 아는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한다.

둘째는 독립성으로 구성원들이 다른 사람 의견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분산화 또는 분권화도 필요하다.

사람들이 전문화되고 개인의 개별적 지식에 의존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론 개인의 판단을 집단적 결정으로 전환시키는 메커니즘,다시 말해 종합 · 통합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4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그 집단이 내린 결정은 옳을 가능성이 크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미시간대에서 명예법학박사를 받으면서 "민주주의엔 (지혜로운 대중의) 건전한 시민의식과 참여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권자들의 높은 지적 · 도덕적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도 공짜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들이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강현철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hc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