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무엇일까
※ 다음의 제시문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제시문>
가 모든 예술,모든 철학은 성장하거나 하강하는 치유 수단이나 보조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들은 언제나 고통과 고통받는 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고통받는 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삶의 충일(充溢)에서 고통받는 자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원하고,삶에 대한 비극적 통찰과 비극적 개관 역시 원한다.
그는 삶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삶의 빈곤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다.
그는 안식과 고요,잔잔한 바다 또는 도취와 경련과 마비를 예술과 철학에 요구한다.
삶 자체에 대한 보복,이것이 그런 빈곤한 자에게는 가장 자극적인 도취인 것이다.
후자의 이중적 요구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 걸맞은 것이다.
이들은 삶을 부정하고,삶을 비방하며,그러기에 이들은 내 대척자들이다.
삶의 충일한 더할 수 없이 풍요로운 자,디오니소스적 신과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공포스럽고도 의문스러운 것에 대한 삶의 응시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끔찍한 행위와 파괴와 해체와 부정의 모든 가치를 허용한다.
그에게는 모든 사막을 풍요로운 과일 재배자로 만들 수 있는 넘쳐흐르는 생산력과 재건력의 결과로서 악과 무의미와 추함이 허락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에서 허락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반대로 그지없이 고통받는 자,삶이 가장 빈곤한 자는 사유와 행동에서 온화와 평화와 선의를 가장 필요로 한다
-오늘날 휴머니티라고 부르는 것을-.
경우에 따라서는 원래 병자들의 신인 구세주라는 신을 필요로 하고,또 백치들을 위한 삶의 개념적 이해 방식인 논리도 필요로 한다.
모든 종류의 예술가에 대해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은 핵심과 같은 구별을 한다.
거기서 삶에 대한 증오가 창조적이 되었는가? 아니면 삶의 충일이 창조적이 되었는가?
아니면 삶의 충일에 얼마나 관여하는가?
예를 들어 괴테에게서는 충일이 창조적이 되었고,플로베르에게서는 증오가 창조적이 되었다.
나 특기할 것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박물관 또는 미술관들이 대대적으로 건립된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대영박물관,프랑스의 루브르 미술관,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아카데미아가 차례차례 건립된다.
이미 신전에서 탈출한 예술은 신전 바깥에서 신전의 성물들을 지나간 예술품으로 만들어 신전 바깥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신앙을 미로 바꾸고,교회를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키고,교회 헌금 대신에 예술 작업의 기부금이 사회적으로 더 명망 있는 일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서 중요한 점은 예술품들이 여러 대중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고,더 많은 대중들이 선호하는 작품일수록 뛰어난 가치를 지닌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술관을 통해 대대적으로 공개 전시되고 대중들이 몰려오는 것 자체로 작품의 가치가 매겨지고,그만큼 비싼 값으로 팔려 나가는 것이 작품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미술관이 위대한 작가를 만든다는 공식이 성립하게 된다.
예술 외적인 환경이 예술 작업을 규정하는 관행이 강화되면서 산업과 예술의 결합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그에 따라 미술교육이 강조되었다.
특히 1851년 런던의 제1회 만국 박람회 이후 수출 및 산업 진흥의 목적에 따라 구미 제국의 산업계는 '예술' 진흥 정책을 강화해 '공예 박물관'의 설립 등과 함께 '공예'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교육의 열성적인 추진자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일찍이 1760년에 매뉴팩처의 진흥을 위한 장인 미술 교육 기관이 에든버러에 설립되었고,19세기에 들어서는 머서셋 하우스의 디자인 사범 학교에 이 학교의 교원을 양성하기 위한 과정이 영국 무역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밖에도 맨체스터를 선두로 전국 각지에 산업계의 요구에 따른 디자인 학교가 세워졌다.
1870년 이후에는 초등 교육법이 제정돼 산업계의 미술 교육에 대한 요청은 초등 교육에서부터 미술관을 이용한 일반 교육에까지 미쳤다.
이런 영국의 예는 다른 구미 국가에서도 기본적으로 거의 동일하며,특히 제1회 만국 박람회 이후 미술 교육 진흥책에 박차를 가해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산업적 요청에 따른 미술 정책이 서구 제국 전체에 확립된다.
그러면서 예술 작품 자체는 사고 파는 시장 논리의 관행에 완전히 포섭되었다. 그런 결과,화랑과 미술관은 시장 논리에 입각해 운영되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이 화랑이나 미술관을 통해 팔리지 않는 작가는 실망하기 일쑤였고,잘 팔리는 작가는 명성과 부를 한 손에 쥐게 된다.
예술은 산업사회의 상품에 불과하다?
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것들 뿐이다.
유용한 것들은 모두 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필요의 표현이기 때문이며, 게다가 인간의 필요라는 것은 그 가련한 본능과 마찬가지로 역겹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한 채의 집 안에서 가장 유용한 장소는 화장실이 아닌가.
공리주의자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나는 무용한 것을 필요로 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일상에서 도움이 되는 그릇보다도 용이나 원앙새가 그려진,나에게 전혀 쓸모 없는 중국 도자기를 더 좋아하고,나의 재능 중에서도 수수께끼같이 모호한 말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는 것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
아름다움이란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일한 것이며,그것을 애당초 지니고 있지 않은 자에게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 것이지.
그것은 씨를 뿌리지 않은 채로 싹트는 덧없이 약한 꽃이며,순수하게 하늘이 주신 선물이 아닌가!
아,아름다움이여!
우연히 이마에 얹을 수 있는 가장 빛나는 왕관이여.
그대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모든 것,예컨대 푸른 하늘,금빛의 별,고결한 백합의 향기처럼 고상하고 소중하다!
누가 그대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라 19세기부터 강화된 산업화 정책에 따른 대중의 미술교육 성과가 20세기 들면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고,점점 속도를 높이는 자본주의의 경제 성장과 특히 첨단 매체 기술에 의한 대중 매체의 발전은 일반 대중들에게 미적인 또는 예술적인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쉽게 만들었다.
그 결과 대중들의 미적인 기준을 만족시키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등장한 것이 1956년 영국의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에서 시작되어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앤디 워홀(Andy Warhol)과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팝아트다.
해밀턴은 "예술의 바람직한 특징들이란 일시적이고 대중적이며 싸구려이고 대량 생산된 것,젊고 재치있고 섹시하며 교묘하고 매력적인 것,동시에 대기업적인 것"이라라고 했고,워홀은 "가장 상업적인 것은 가장 예술적이고,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상업적"이라고 하는 등 팝 아티스트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대중 즉 구매자들의 기호를 예술의 기준으로 삼았고,그동안 암암리에 인정할 뿐이었던 예술의 산업적 성격을 예술 작업의 구호로 삼았다.
'예술의 죽음'은 예술이 그 어떤 다른 영역의 수단이 되어서도 안되고,특히 시장에 예속돼 경제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럴 수밖에 없고 또 그렇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팝 아트의 노골적이고 산업적인 예술의 선전 이후 현재까지 특히 대중 매체를 바탕으로 한 대중에 의한 인기가 없는 예술 작품은 예술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술의 죽음'은 현실성 없는 예술의 자율성을 떠받치는 고도의 정신성과 상상력의 영역을 전제로 한 것인가?
예술이란 처음부터 그런 전제를 가진 것이 아니고 가지려 해서도 안되는 것이며,따라서 '예술의 죽음'이란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는 것인가?
마 사람들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상이라는 테두리에서 이해되지 않는 새로운 환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여행이나 축제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비일상(非日常)이기도 하며,해리 포터 시리즈와 같은 신화적 환상,판타지일 수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으나,우리의 환상 속에서 일어나며 영화나 소설,음악과 같은 예술 속에서 대리 경험을 통해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허구의 간접 경험을 충분히 활용해,분출되지 못한 자신의 욕구를 해소시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중들의 수요와 이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공급이 만나게 되고,새로운 예술 시장이 성립된다. 이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군의 합의는 더욱 더 자극적이며,가볍기만한 오락문화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준다.
최소한 휴식 시간만큼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는 목적 속에 피차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가시간에는 한 치의 진지함 없이 삶의 피로를 풀어야 한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순간부터 모든 문화 소비 행위가 '욕구의 배설'로 연결되는 것이다. (중략)
이제 음악은 단순히 '(듣는) 음악'이라고 불리기 민망할 정도로 '보여주는' 행위가 되었다.
단순히 들려주어서는 지루함을 견디기 싫어하는 현대인들의 지갑을 열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음악의 위대함은 얼마나 팔렸는가,얼마나 인기있는가,얼마나 대중적인가로 판가름 난다.
이제 새로 등장하는 음악이란 기존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자극을 들고 나타나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들려주는 자극보다 보여주는 자극의 힘이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은 기업가들은 오로지 더욱 많이 팔리는 '마네킹-신체들'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대중들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착각할 것이다. 어차피 한 치의 진지함도 없었기 때문에,이 모든 선택이 한 달 안에 잊혀지더라도 굳이 상관하지 않는다.
기분 좋게,적은 금액으로 괜찮은 상품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삶의 고통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잠시 휴식을 취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예술은 사라지고,상품이 남게 된 이 시대의 내역서(內譯書)이다.
<문제>
① 제시문 (가),(나),(다)는 예술의 의미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그 차이점을 분석하시오.(500자)
② 제시문 (라)의 팝아트의 관점이 (가),(나),(다)의 입장에서 각각 어떻게 평가받을 수 있을지를 설명하시오.(500자)
③ 주어진 제시문들을 활용하여,제시문 (마)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상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800자)
예술은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녔다?
⊙ 문제의식 및 제시문 소개
예술이 대중문화가 되어버린 이후의 시대에서 예술은 그 고고한 가치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과연 예술이란 것이 정말 고고한 가치란 것을 가져나 봤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의 수도 그 반대편의 사람들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예술이 과연 무엇인지,그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의 압박 속에서,과연 이 세상에서 굶어죽지 않고 잘 버텨나갈지 고민하는 것이 더 큰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 옛날 가난한 예술가 정신을 불태우던 이들은 점점 줄어들었고,적당히 재밌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몇몇 상품들만 남아 '문화'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물론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홀로 남아 '나는 예술이다'라고 외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어차피 현대 사회의 모든 예술 작품은 시장원리 속에서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니,대중들과 괴리된 채 예술의 도도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게 현실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정말 예술이냐고 되물을 용기 정도는 남겨둬야 한다.
예술은 상품과 구분되어야 한다고,예술이 과연 그런 용도로만 취급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단호한 의심 또한 한켠에 남겨두어야 한다.
이렇듯,예술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모여야,인간만이 느낄 수 있다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다시금 따져보는 행위라도 시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아름다움이 그저 상품 속에서만 발견되는 환금의 가치라면,인간은 도대체 무엇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제시문에는 예술에 대한 다양한 인식이 담겨져 있다. 삶의 가치를 드높이려는 니체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제시문 (가)의 <니체 대 바그너>라든지,문화 산업의 상품으로서 예술을 다루는 제시문 (나),현실과 무관하게 절대적인 예술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제시문 (다)까지 각 제시문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들을 담고 있다.
⊙ 1번 문제 풀이
논술 제시문 속의 니체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니체는 광범위한 저작 속에서 일관되는 그의 철학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고등학생들이 그의 사상을 제대로 접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예술관과 같은 경우 윤리 교과목에서도 큰 비중을 두고 다루지 않으므로,아마 생소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제시문 (가)의 니체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우리는 이 제시문을 읽기 위해서는 다른 제시문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겨우 '말할꺼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제시문 (가)는 대비되는 개념들을 이항 대립시킴으로써 예술의 궁극적 가치를 '찾아내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예술의 의미란 무엇이라고 바로 지적해주면 좋으련만,빙빙 돌려서 '이건 아니고,저건 나쁘고'하는 식으로 마지막에 자연스레 답을 도출해내도록 하는 방식이다.
글의 초반부,니체에 의해 대립지어진 <디오니소스적 예술,삶의 충일,삶에 대한 정직한 응시>와 <삶의 빈곤,도취와 마비,삶에 대한 부정과 비방>이라는 개념쌍을 곰곰이 들여다보면,그가 후자를 대척자 즉 자신이 부정하는 예술의 개념을 대표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고자,혹은 고통 자체를 마비시키고자'하는 예술을 인간의 삶을 부정하는 종류의 것으로 치부한다.
이는 일상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 텔레비전에 몰입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상기시켜준다.
이와 반대로 그가 옹호하는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지닌 예술이란 삶의 고통 자체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그토록 추하고 악한 일조차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로서 예술이란 삶이 가진 고통을 더욱 창조적으로 만드는 일,혹은 삶의 충일을 위해 매진되는 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우리 삶이 가질 수밖에 없는 고통의 문제를 고통으로서 보여주는,그 고통을 여실히 간직한 채 삶의 의지를 불태우도록(창조적이 되도록) 돕는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 되는 것이다.
비교적 독해가 용이한 제시문 (나)는 예술이 문화산업 안으로 편입되면서 자연스레 대중성이 작품성을 가늠하게 되는 기준이 되었다고 서술한다.
예술의 외적인 작업,즉 경제적-사회적 원리에 따라 예술이 규정되면서 예술은 산업사회의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제시문 (다)는 예술지상주의,예술순수주의로 이름이 높은 테오필 고티에의 소설 <모팽양>의 서문으로서,말 그대로 무용한 것이야말로 예술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다른 무엇을 위한 용도로서의 예술이란 이미 그 가치를 잃어버린 것으로,예술은 오로지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만 평가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는 예술을 우리 삶의 가치와 결부시켜 한정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의 삶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예술이 삶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예술은 시장논리에 따라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다)는 이 모든 것과 달리 순수하게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는 모든 수단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가)와도 다르다.
추가적으로 말하자면,여기서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을 구별할 수 있는 학생의 경우 (나)나 (다) 모두 당위를 내포한 가치판단이라기보다는 설명이 주가 된 사실판단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는 당위를 강조하는 (가)와 (다)와 크게 다른 점이다.
⊙ 2번 문제 풀이
제시문 (라)에서 앤디 워홀은 "가장 상업적인 것은 가장 예술적이고,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상업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팝아트의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것으로,'예술의 죽음'을 상징하는 직접적인 말이기도 하다.
당연히 팝아트는 문화산업의 논리를 설명하는 제시문 (나)의 원리에 따라 설명될 수 있으며,당연히 그에 따라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다)에 의해서는 그 어떤 평가도 받지 못할 것이다.
대중성이나 상업성과 같은 가치가 예술에 끼어드는 것은 예술을 수단화하는 것이므로,이를 마땅히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보증이 없는 한,아름다움은 별개의 세계를 가진 가치로 남을 것이다.
(라)의 해밀턴이 "예술의 바람직한 특징들이란 일시적이고 대중적이며 싸구려이고 대량 생산된 것,젊고 재치있고 섹시하며 교묘하고 매력적인 것,동시에 대기업적인 것"이라는 발언을 보았을 때,(가)의 니체는 결코 이것이 우리 삶의 고통을 응시하게 하거나,삶을 삶답게 만들어준다고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들은 오히려 니체가 대척점으로 여겼던 고통의 도피를 위한 것들일 테니 말이다.
⊙ 3번 문제 풀이
(마)의 필자가 하는 고민은 이즈음의 많은 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하고 있는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극적이며 오락적인 요소로 넘쳐나는 TV를 보면,이 모든 것이 결국 일상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을 위무(慰撫)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우리들은 그저 넋을 잃은 채 그 상품들의 바다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그것이 과연 나쁜 것인지 뭐라 판단할 수는 없다.
(마)의 마지막에 나오듯 그것이 우리를 일상으로 되돌려 보내주는 힘을 주는 경우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술이 모조리 상품으로 치환되긴 했지만,우리의 삶은 '조금' 위로받은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예술관을 갖고 현실을 대해야 할지를 고민할 수 있다.
가령 (나)나 (라)와 같은 인식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어차피 예술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가)나 (다)와 같은 예술의 독립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이라면 (마)의 문제에 대해 의심을 전개하고 예술에 좀 더 바람직한 방향을 부여하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마)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어떤 답이든 가능하겠지만,최소한 이 상황이 보여주고 있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직시하고,현대인의 일상과 예술의 거래관계에 대해 꼼꼼하게 내역서를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일방적 장점이나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균형있는 시각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 될 것이다.
이용준 S · 논술 선임연구원 sgsgnote@gmail.com
※ 다음의 제시문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제시문>
가 모든 예술,모든 철학은 성장하거나 하강하는 치유 수단이나 보조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들은 언제나 고통과 고통받는 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고통받는 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삶의 충일(充溢)에서 고통받는 자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원하고,삶에 대한 비극적 통찰과 비극적 개관 역시 원한다.
그는 삶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삶의 빈곤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다.
그는 안식과 고요,잔잔한 바다 또는 도취와 경련과 마비를 예술과 철학에 요구한다.
삶 자체에 대한 보복,이것이 그런 빈곤한 자에게는 가장 자극적인 도취인 것이다.
후자의 이중적 요구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 걸맞은 것이다.
이들은 삶을 부정하고,삶을 비방하며,그러기에 이들은 내 대척자들이다.
삶의 충일한 더할 수 없이 풍요로운 자,디오니소스적 신과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공포스럽고도 의문스러운 것에 대한 삶의 응시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끔찍한 행위와 파괴와 해체와 부정의 모든 가치를 허용한다.
그에게는 모든 사막을 풍요로운 과일 재배자로 만들 수 있는 넘쳐흐르는 생산력과 재건력의 결과로서 악과 무의미와 추함이 허락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에서 허락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반대로 그지없이 고통받는 자,삶이 가장 빈곤한 자는 사유와 행동에서 온화와 평화와 선의를 가장 필요로 한다
-오늘날 휴머니티라고 부르는 것을-.
경우에 따라서는 원래 병자들의 신인 구세주라는 신을 필요로 하고,또 백치들을 위한 삶의 개념적 이해 방식인 논리도 필요로 한다.
모든 종류의 예술가에 대해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은 핵심과 같은 구별을 한다.
거기서 삶에 대한 증오가 창조적이 되었는가? 아니면 삶의 충일이 창조적이 되었는가?
아니면 삶의 충일에 얼마나 관여하는가?
예를 들어 괴테에게서는 충일이 창조적이 되었고,플로베르에게서는 증오가 창조적이 되었다.
나 특기할 것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박물관 또는 미술관들이 대대적으로 건립된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대영박물관,프랑스의 루브르 미술관,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아카데미아가 차례차례 건립된다.
이미 신전에서 탈출한 예술은 신전 바깥에서 신전의 성물들을 지나간 예술품으로 만들어 신전 바깥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신앙을 미로 바꾸고,교회를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키고,교회 헌금 대신에 예술 작업의 기부금이 사회적으로 더 명망 있는 일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서 중요한 점은 예술품들이 여러 대중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고,더 많은 대중들이 선호하는 작품일수록 뛰어난 가치를 지닌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술관을 통해 대대적으로 공개 전시되고 대중들이 몰려오는 것 자체로 작품의 가치가 매겨지고,그만큼 비싼 값으로 팔려 나가는 것이 작품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미술관이 위대한 작가를 만든다는 공식이 성립하게 된다.
예술 외적인 환경이 예술 작업을 규정하는 관행이 강화되면서 산업과 예술의 결합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그에 따라 미술교육이 강조되었다.
특히 1851년 런던의 제1회 만국 박람회 이후 수출 및 산업 진흥의 목적에 따라 구미 제국의 산업계는 '예술' 진흥 정책을 강화해 '공예 박물관'의 설립 등과 함께 '공예'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교육의 열성적인 추진자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일찍이 1760년에 매뉴팩처의 진흥을 위한 장인 미술 교육 기관이 에든버러에 설립되었고,19세기에 들어서는 머서셋 하우스의 디자인 사범 학교에 이 학교의 교원을 양성하기 위한 과정이 영국 무역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밖에도 맨체스터를 선두로 전국 각지에 산업계의 요구에 따른 디자인 학교가 세워졌다.
1870년 이후에는 초등 교육법이 제정돼 산업계의 미술 교육에 대한 요청은 초등 교육에서부터 미술관을 이용한 일반 교육에까지 미쳤다.
이런 영국의 예는 다른 구미 국가에서도 기본적으로 거의 동일하며,특히 제1회 만국 박람회 이후 미술 교육 진흥책에 박차를 가해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산업적 요청에 따른 미술 정책이 서구 제국 전체에 확립된다.
그러면서 예술 작품 자체는 사고 파는 시장 논리의 관행에 완전히 포섭되었다. 그런 결과,화랑과 미술관은 시장 논리에 입각해 운영되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이 화랑이나 미술관을 통해 팔리지 않는 작가는 실망하기 일쑤였고,잘 팔리는 작가는 명성과 부를 한 손에 쥐게 된다.
예술은 산업사회의 상품에 불과하다?
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것들 뿐이다.
유용한 것들은 모두 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필요의 표현이기 때문이며, 게다가 인간의 필요라는 것은 그 가련한 본능과 마찬가지로 역겹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한 채의 집 안에서 가장 유용한 장소는 화장실이 아닌가.
공리주의자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나는 무용한 것을 필요로 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일상에서 도움이 되는 그릇보다도 용이나 원앙새가 그려진,나에게 전혀 쓸모 없는 중국 도자기를 더 좋아하고,나의 재능 중에서도 수수께끼같이 모호한 말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는 것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
아름다움이란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일한 것이며,그것을 애당초 지니고 있지 않은 자에게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 것이지.
그것은 씨를 뿌리지 않은 채로 싹트는 덧없이 약한 꽃이며,순수하게 하늘이 주신 선물이 아닌가!
아,아름다움이여!
우연히 이마에 얹을 수 있는 가장 빛나는 왕관이여.
그대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모든 것,예컨대 푸른 하늘,금빛의 별,고결한 백합의 향기처럼 고상하고 소중하다!
누가 그대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라 19세기부터 강화된 산업화 정책에 따른 대중의 미술교육 성과가 20세기 들면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고,점점 속도를 높이는 자본주의의 경제 성장과 특히 첨단 매체 기술에 의한 대중 매체의 발전은 일반 대중들에게 미적인 또는 예술적인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쉽게 만들었다.
그 결과 대중들의 미적인 기준을 만족시키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등장한 것이 1956년 영국의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에서 시작되어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앤디 워홀(Andy Warhol)과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팝아트다.
해밀턴은 "예술의 바람직한 특징들이란 일시적이고 대중적이며 싸구려이고 대량 생산된 것,젊고 재치있고 섹시하며 교묘하고 매력적인 것,동시에 대기업적인 것"이라라고 했고,워홀은 "가장 상업적인 것은 가장 예술적이고,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상업적"이라고 하는 등 팝 아티스트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대중 즉 구매자들의 기호를 예술의 기준으로 삼았고,그동안 암암리에 인정할 뿐이었던 예술의 산업적 성격을 예술 작업의 구호로 삼았다.
'예술의 죽음'은 예술이 그 어떤 다른 영역의 수단이 되어서도 안되고,특히 시장에 예속돼 경제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럴 수밖에 없고 또 그렇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팝 아트의 노골적이고 산업적인 예술의 선전 이후 현재까지 특히 대중 매체를 바탕으로 한 대중에 의한 인기가 없는 예술 작품은 예술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술의 죽음'은 현실성 없는 예술의 자율성을 떠받치는 고도의 정신성과 상상력의 영역을 전제로 한 것인가?
예술이란 처음부터 그런 전제를 가진 것이 아니고 가지려 해서도 안되는 것이며,따라서 '예술의 죽음'이란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는 것인가?
마 사람들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상이라는 테두리에서 이해되지 않는 새로운 환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여행이나 축제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비일상(非日常)이기도 하며,해리 포터 시리즈와 같은 신화적 환상,판타지일 수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으나,우리의 환상 속에서 일어나며 영화나 소설,음악과 같은 예술 속에서 대리 경험을 통해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허구의 간접 경험을 충분히 활용해,분출되지 못한 자신의 욕구를 해소시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중들의 수요와 이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공급이 만나게 되고,새로운 예술 시장이 성립된다. 이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군의 합의는 더욱 더 자극적이며,가볍기만한 오락문화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준다.
최소한 휴식 시간만큼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는 목적 속에 피차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가시간에는 한 치의 진지함 없이 삶의 피로를 풀어야 한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순간부터 모든 문화 소비 행위가 '욕구의 배설'로 연결되는 것이다. (중략)
이제 음악은 단순히 '(듣는) 음악'이라고 불리기 민망할 정도로 '보여주는' 행위가 되었다.
단순히 들려주어서는 지루함을 견디기 싫어하는 현대인들의 지갑을 열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음악의 위대함은 얼마나 팔렸는가,얼마나 인기있는가,얼마나 대중적인가로 판가름 난다.
이제 새로 등장하는 음악이란 기존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자극을 들고 나타나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들려주는 자극보다 보여주는 자극의 힘이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은 기업가들은 오로지 더욱 많이 팔리는 '마네킹-신체들'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대중들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착각할 것이다. 어차피 한 치의 진지함도 없었기 때문에,이 모든 선택이 한 달 안에 잊혀지더라도 굳이 상관하지 않는다.
기분 좋게,적은 금액으로 괜찮은 상품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삶의 고통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잠시 휴식을 취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예술은 사라지고,상품이 남게 된 이 시대의 내역서(內譯書)이다.
<문제>
① 제시문 (가),(나),(다)는 예술의 의미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그 차이점을 분석하시오.(500자)
② 제시문 (라)의 팝아트의 관점이 (가),(나),(다)의 입장에서 각각 어떻게 평가받을 수 있을지를 설명하시오.(500자)
③ 주어진 제시문들을 활용하여,제시문 (마)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상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800자)
예술은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녔다?
⊙ 문제의식 및 제시문 소개
예술이 대중문화가 되어버린 이후의 시대에서 예술은 그 고고한 가치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과연 예술이란 것이 정말 고고한 가치란 것을 가져나 봤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의 수도 그 반대편의 사람들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예술이 과연 무엇인지,그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의 압박 속에서,과연 이 세상에서 굶어죽지 않고 잘 버텨나갈지 고민하는 것이 더 큰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 옛날 가난한 예술가 정신을 불태우던 이들은 점점 줄어들었고,적당히 재밌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몇몇 상품들만 남아 '문화'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물론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홀로 남아 '나는 예술이다'라고 외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어차피 현대 사회의 모든 예술 작품은 시장원리 속에서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니,대중들과 괴리된 채 예술의 도도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게 현실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정말 예술이냐고 되물을 용기 정도는 남겨둬야 한다.
예술은 상품과 구분되어야 한다고,예술이 과연 그런 용도로만 취급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단호한 의심 또한 한켠에 남겨두어야 한다.
이렇듯,예술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모여야,인간만이 느낄 수 있다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다시금 따져보는 행위라도 시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아름다움이 그저 상품 속에서만 발견되는 환금의 가치라면,인간은 도대체 무엇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제시문에는 예술에 대한 다양한 인식이 담겨져 있다. 삶의 가치를 드높이려는 니체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제시문 (가)의 <니체 대 바그너>라든지,문화 산업의 상품으로서 예술을 다루는 제시문 (나),현실과 무관하게 절대적인 예술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제시문 (다)까지 각 제시문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들을 담고 있다.
⊙ 1번 문제 풀이
논술 제시문 속의 니체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니체는 광범위한 저작 속에서 일관되는 그의 철학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고등학생들이 그의 사상을 제대로 접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예술관과 같은 경우 윤리 교과목에서도 큰 비중을 두고 다루지 않으므로,아마 생소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제시문 (가)의 니체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우리는 이 제시문을 읽기 위해서는 다른 제시문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겨우 '말할꺼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제시문 (가)는 대비되는 개념들을 이항 대립시킴으로써 예술의 궁극적 가치를 '찾아내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예술의 의미란 무엇이라고 바로 지적해주면 좋으련만,빙빙 돌려서 '이건 아니고,저건 나쁘고'하는 식으로 마지막에 자연스레 답을 도출해내도록 하는 방식이다.
글의 초반부,니체에 의해 대립지어진 <디오니소스적 예술,삶의 충일,삶에 대한 정직한 응시>와 <삶의 빈곤,도취와 마비,삶에 대한 부정과 비방>이라는 개념쌍을 곰곰이 들여다보면,그가 후자를 대척자 즉 자신이 부정하는 예술의 개념을 대표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고자,혹은 고통 자체를 마비시키고자'하는 예술을 인간의 삶을 부정하는 종류의 것으로 치부한다.
이는 일상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 텔레비전에 몰입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상기시켜준다.
이와 반대로 그가 옹호하는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지닌 예술이란 삶의 고통 자체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그토록 추하고 악한 일조차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로서 예술이란 삶이 가진 고통을 더욱 창조적으로 만드는 일,혹은 삶의 충일을 위해 매진되는 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우리 삶이 가질 수밖에 없는 고통의 문제를 고통으로서 보여주는,그 고통을 여실히 간직한 채 삶의 의지를 불태우도록(창조적이 되도록) 돕는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 되는 것이다.
비교적 독해가 용이한 제시문 (나)는 예술이 문화산업 안으로 편입되면서 자연스레 대중성이 작품성을 가늠하게 되는 기준이 되었다고 서술한다.
예술의 외적인 작업,즉 경제적-사회적 원리에 따라 예술이 규정되면서 예술은 산업사회의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제시문 (다)는 예술지상주의,예술순수주의로 이름이 높은 테오필 고티에의 소설 <모팽양>의 서문으로서,말 그대로 무용한 것이야말로 예술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다른 무엇을 위한 용도로서의 예술이란 이미 그 가치를 잃어버린 것으로,예술은 오로지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만 평가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는 예술을 우리 삶의 가치와 결부시켜 한정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의 삶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예술이 삶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예술은 시장논리에 따라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다)는 이 모든 것과 달리 순수하게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는 모든 수단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가)와도 다르다.
추가적으로 말하자면,여기서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을 구별할 수 있는 학생의 경우 (나)나 (다) 모두 당위를 내포한 가치판단이라기보다는 설명이 주가 된 사실판단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는 당위를 강조하는 (가)와 (다)와 크게 다른 점이다.
⊙ 2번 문제 풀이
제시문 (라)에서 앤디 워홀은 "가장 상업적인 것은 가장 예술적이고,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상업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팝아트의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것으로,'예술의 죽음'을 상징하는 직접적인 말이기도 하다.
당연히 팝아트는 문화산업의 논리를 설명하는 제시문 (나)의 원리에 따라 설명될 수 있으며,당연히 그에 따라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다)에 의해서는 그 어떤 평가도 받지 못할 것이다.
대중성이나 상업성과 같은 가치가 예술에 끼어드는 것은 예술을 수단화하는 것이므로,이를 마땅히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보증이 없는 한,아름다움은 별개의 세계를 가진 가치로 남을 것이다.
(라)의 해밀턴이 "예술의 바람직한 특징들이란 일시적이고 대중적이며 싸구려이고 대량 생산된 것,젊고 재치있고 섹시하며 교묘하고 매력적인 것,동시에 대기업적인 것"이라는 발언을 보았을 때,(가)의 니체는 결코 이것이 우리 삶의 고통을 응시하게 하거나,삶을 삶답게 만들어준다고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들은 오히려 니체가 대척점으로 여겼던 고통의 도피를 위한 것들일 테니 말이다.
⊙ 3번 문제 풀이
(마)의 필자가 하는 고민은 이즈음의 많은 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하고 있는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극적이며 오락적인 요소로 넘쳐나는 TV를 보면,이 모든 것이 결국 일상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을 위무(慰撫)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우리들은 그저 넋을 잃은 채 그 상품들의 바다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그것이 과연 나쁜 것인지 뭐라 판단할 수는 없다.
(마)의 마지막에 나오듯 그것이 우리를 일상으로 되돌려 보내주는 힘을 주는 경우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술이 모조리 상품으로 치환되긴 했지만,우리의 삶은 '조금' 위로받은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예술관을 갖고 현실을 대해야 할지를 고민할 수 있다.
가령 (나)나 (라)와 같은 인식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어차피 예술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가)나 (다)와 같은 예술의 독립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이라면 (마)의 문제에 대해 의심을 전개하고 예술에 좀 더 바람직한 방향을 부여하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마)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어떤 답이든 가능하겠지만,최소한 이 상황이 보여주고 있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직시하고,현대인의 일상과 예술의 거래관계에 대해 꼼꼼하게 내역서를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일방적 장점이나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균형있는 시각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 될 것이다.
이용준 S · 논술 선임연구원 sgsgnot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