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대통령 부인에 대해 '영부인'이라는 용어 대신 '김윤옥 여사'로 호칭하기로 했다. "
2008년 3월 갓 출범한 이명박 정부의 박재완 정무수석은 그동안 써오던 '영부인'이란 호칭 대신 '여사'를 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과거 '영부인' 호칭은 의미를 떠나 너무 권위의 냄새가 묻어났던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영부인'이란 말을 버림으로써 권위주의를 탈피하고,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정부의 노력은 예전에도 있었다.
10여 년 전인 1987년 12월 사상 최초로 직선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노태우 전 대통령.
'대통령 상전 영부인 열전'을 쓴 김순희 자유기고가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 역시 자신이 영부인이 아닌 '대통령의 부인'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에 따라 청와대의 공식문서와 서신에는 '대통령 부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언론도 '대통령 부인'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 '대통령 부인 ○○○ 여사' 식의 표현이 언론에 오르내린 지도 벌써 20여년이 흐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부인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인식되기를 여전히 권위적이고 시대에 동떨어진 어감을 갖는 게 사실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오랜 군사정부 시절을 거쳐 오면서 형성된, 정치권과 언론에서 인위적으로 왜곡해 만들어 써온 의미 허상이 아직 짙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부인(令夫人)'이란 말은 원래 권위주의와 상관없는 말이다.
이 말의 본래 뜻은 '남의 부인에 대한 높임말'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영(令)'이 남을 높여 이르는 말로,영부인이라 함은 '귀부인(貴夫人)'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굳이 대통령의 부인을 가리킬 때뿐만 아니라 아무나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를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가령 친구의 아내를 가리켜 "자네 영부인께선 안녕하신가?"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남의 아들을 높여 이를 때는 '영식(令息)'을,딸에게는 '영애(令愛)'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 이래로 대통령을 '각하'로,그 부인을 '영부인'으로 부르기 시작해 서슬 퍼렇던 박정희 정부 들어선 영부인,영애,영식이 대통령 가족을 지칭하는 말로 완전히 굳어졌다.
여기에는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줄곧 그렇게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써오던 관행도 한몫 단단히 했음은 물론이다.
이로 인해 '영부인=대통령 부인'이란 그릇된 등식이 우리 말글 역사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한자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영부인'이 단순히 대통령(大統領)의 '영(領)'자와 결합해 만들어진 말(領夫人)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물론 그런 '영부인'은 있지도 않은 말이다.
우리 말글의 수난사인 셈이다.
다행히 요즘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많이 이뤄진 데다,말글에 대한 인식도 높아져 굳이 '영부인'이라 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통령 부인' 또는 '○○○ 여사'라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수십년간 거쳐온 왜곡의 흔적은 깊게 남아 여전히 영부인을 특정한 호칭으로 쓰는 사람들도 있다.
1997년 있었던 이른바 '영부인 사건'은 그런 사례 중 하나이다.
"이회창 후보와 영부인,아니 이 후보의 부인을 청와대로 보내기 위해 노력합시다.
" 그해 7월21일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은 연말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 후보로 이회창씨를 선출한 뒤 자축연을 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회창 후보의 경선대책위원장이었던 황낙주 전 국회의장이 흥분한 나머지 마치 이 후보의 대선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라는 듯 '영부인' 운운한 것이다.
언론들은 이를 두고 "후보의 부인을 미리 앞질러 '영부인'이라고 불렀다"라며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황낙주씨가 서둘러 자신의 말을 고쳐 말한 것이나,언론에서 이를 비난한 것이나 모두 그 근거는 '영부인=대통령 부인'이란 오도된 관념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영부인이 '남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란 점에서,사실은 상대가 대통령 부인이든 그렇지 않든 얼마든지 '영부인'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이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당시만 해도 그 말이 우리 말에서 이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경우였기 때문이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
2008년 3월 갓 출범한 이명박 정부의 박재완 정무수석은 그동안 써오던 '영부인'이란 호칭 대신 '여사'를 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과거 '영부인' 호칭은 의미를 떠나 너무 권위의 냄새가 묻어났던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영부인'이란 말을 버림으로써 권위주의를 탈피하고,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정부의 노력은 예전에도 있었다.
10여 년 전인 1987년 12월 사상 최초로 직선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노태우 전 대통령.
'대통령 상전 영부인 열전'을 쓴 김순희 자유기고가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 역시 자신이 영부인이 아닌 '대통령의 부인'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에 따라 청와대의 공식문서와 서신에는 '대통령 부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언론도 '대통령 부인'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 '대통령 부인 ○○○ 여사' 식의 표현이 언론에 오르내린 지도 벌써 20여년이 흐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부인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인식되기를 여전히 권위적이고 시대에 동떨어진 어감을 갖는 게 사실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오랜 군사정부 시절을 거쳐 오면서 형성된, 정치권과 언론에서 인위적으로 왜곡해 만들어 써온 의미 허상이 아직 짙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부인(令夫人)'이란 말은 원래 권위주의와 상관없는 말이다.
이 말의 본래 뜻은 '남의 부인에 대한 높임말'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영(令)'이 남을 높여 이르는 말로,영부인이라 함은 '귀부인(貴夫人)'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굳이 대통령의 부인을 가리킬 때뿐만 아니라 아무나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를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가령 친구의 아내를 가리켜 "자네 영부인께선 안녕하신가?"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남의 아들을 높여 이를 때는 '영식(令息)'을,딸에게는 '영애(令愛)'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 이래로 대통령을 '각하'로,그 부인을 '영부인'으로 부르기 시작해 서슬 퍼렇던 박정희 정부 들어선 영부인,영애,영식이 대통령 가족을 지칭하는 말로 완전히 굳어졌다.
여기에는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줄곧 그렇게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써오던 관행도 한몫 단단히 했음은 물론이다.
이로 인해 '영부인=대통령 부인'이란 그릇된 등식이 우리 말글 역사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한자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영부인'이 단순히 대통령(大統領)의 '영(領)'자와 결합해 만들어진 말(領夫人)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물론 그런 '영부인'은 있지도 않은 말이다.
우리 말글의 수난사인 셈이다.
다행히 요즘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많이 이뤄진 데다,말글에 대한 인식도 높아져 굳이 '영부인'이라 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통령 부인' 또는 '○○○ 여사'라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수십년간 거쳐온 왜곡의 흔적은 깊게 남아 여전히 영부인을 특정한 호칭으로 쓰는 사람들도 있다.
1997년 있었던 이른바 '영부인 사건'은 그런 사례 중 하나이다.
"이회창 후보와 영부인,아니 이 후보의 부인을 청와대로 보내기 위해 노력합시다.
" 그해 7월21일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은 연말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 후보로 이회창씨를 선출한 뒤 자축연을 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회창 후보의 경선대책위원장이었던 황낙주 전 국회의장이 흥분한 나머지 마치 이 후보의 대선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라는 듯 '영부인' 운운한 것이다.
언론들은 이를 두고 "후보의 부인을 미리 앞질러 '영부인'이라고 불렀다"라며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황낙주씨가 서둘러 자신의 말을 고쳐 말한 것이나,언론에서 이를 비난한 것이나 모두 그 근거는 '영부인=대통령 부인'이란 오도된 관념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영부인이 '남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란 점에서,사실은 상대가 대통령 부인이든 그렇지 않든 얼마든지 '영부인'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이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당시만 해도 그 말이 우리 말에서 이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경우였기 때문이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