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식 가던 폴란드 대통령 및 지도층, 비행기 추락 전원 사망
[Global Issue] 또다른 비극 부른 ‘카틴 숲 학살’… 폴란드와 러시아의 1000년 악연
#1.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4월 어느 날. 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마을의 숲에서 수천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숨진 사람들은 인근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폴란드인들이었고, 이들에게 총구를 겨눈 건 구(舊) 소련 군인들이었다.

죽은 이들 대부분은 폴란드의 명망 있는 지식인과 정치인, 군인과 성직자들이었다.

학살의 참혹한 현장은 독일군이 1943년 4월 카틴 숲에서 머리 뒤쪽에 총살 흔적이 보이는 시신 4200여구를 발굴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독일은 "이것은 소련군의 잔인한 소행"이라며 카틴 숲 학살사건을 나치 정권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

소련 측은 곧바로 "공사장에서 일하던 폴란드 포로들이 나치에게 붙잡혀 살해당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카틴 숲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건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이 "카틴 숲 학살에 소련군이 개입됐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이후 공개된 문서에 담겨진 내막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1940년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폴란드가 다시는 독립하지 못하도록 폴란드 엘리트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며 비밀경찰에게 폴란드 주요 인사들을 비밀리에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총 2만2000여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카틴 숲과 그 인근지역에서 아무도 모르게 피살됐다.

#2. 카틴 숲 사건이 벌어진 지 70년이 흐른 지난 4월10일.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부부를 태우고 바르샤바를 출발한 러시아제 Tu-154 여객기가 스몰렌스크에 추락해 탑승자 96명 전원이 숨졌다.

사망자 중엔 카친스키 대통령 내외를 비롯해 폴란드 중앙은행 총재와 폴란드군 참모총장,육 · 해 · 공군사령관, 외무차관,야당 대표 등 폴란드 지도층 인사 수십명이 포함돼 있었다.

폴란드 국제관계연구소 슬라오미르 데브스키는 사건 소식이 전해진 직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카틴의 흙은 정녕 폴란드인의 피를 원하는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향년 61세로 사망한 카친스키 대통령은 카틴 숲 학살사건 추모 행사에 참석하러 가던 길이었다.

반(反) 러시아 성향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초대를 받지 못한 카친스키 대통령은 스스로 추모식 행사 참석을 강행하다 비운의 죽음을 맞았다.

2005년 대통령에 당선된 카친스키는 친(親) 서방 계열의 중도우파 정치인이다.

법학교수 출신인 그는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과 함께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면서 정계에 입문했으며, 쌍둥이 형인 야로슬라브 카친스키 전 총리와 함께 '쌍둥이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카친스키 대통령은 폴란드 내 대표적인 지한파로도 유명했다.

한 · 폴란드 수교 20주년을 맞아 2008년 12월 한국을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지난해 7월에는 이 대통령이 폴란드를 방문했다.

이처럼 70년의 간격을 두고도 너무나 닮은 꼴로 일어난 '카틴 숲의 비극' 뒤엔 1000년 가까이 이어진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의 지독하고 질긴 악연이 숨어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두 나라는 같은 슬라브족 계통이지만 종교와 문화적 차이가 매우 컸다.

폴란드의 경우 국민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데 반해,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18세기 말부터 1918년까지 120여년간 폴란드가 러시아로부터 강압적인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갈등의 골은 메울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깊어졌다.

물론 폴란드의 위세가 동유럽에서 반짝 강했던 시기도 있었다. 15~16세기 리투아니아와 손잡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제국을 세웠을 때였다.

17세기 초 혼란에 빠진 러시아를 침략해 모스크바를 직접 통치하기도 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제국은 17세기 중반부터 급격히 쇠퇴하면서 결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프로이센에 의해 세 차례나 영토가 찢겨진 끝에 1795년 유럽 지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부터 123년 동안 폴란드 영토의 상당 부분은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807년에는 나폴레옹의 후견 아래 프로이센이 차지한 폴란드의 영토에 바르샤바 공국이 세워졌지만 나폴레옹 몰락 후 빈 회의 결정에 따라 러시아 차르(황제)의 통치를 받게 됐다.

러시아의 폴란드 식민지배는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을 연상케 할 만큼 억압적이었다.

러시아는 폴란드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학교에서 폴란드어 교육을 전면 금지했다.

또 폴란드인들의 이름도 모두 러시아식으로 바꾸게 했다.

폴란드 출신의 저명 과학자 마리 퀴리의 어린 시절 일화는 당시 폴란드인들이 겪었던 고통을 잘 나타낸다.

퀴리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선 학생들에게 몰래 폴란드어를 가르쳤었다.

하지만 어느 날 러시아인 장학관이 교실에 들이닥쳐 퀴리에게 "너희의 군주는 누구냐?"라고 묻자, 그녀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러시아어로 "우리의 군주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라고 답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독립 투쟁을 계속했다.

1830년 11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혁명에 자극받은 군인들과 대학생,지식인이 중심이 돼 무장봉기를 일으켜 차르가 임명한 총독을 몰아내고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혁명세력은 이듬해 10월까지 무장투쟁을 계속했으나 결국 유혈 진압됐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폴란드는 가까스로 독립국 지위를 되찾았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39년 2차대전 발발과 함께, 당시 서로 불가침 밀약을 맺었던 나치 독일과 소련으로부터 또다시 국토를 유린당한 것이다.

또 폴란드 영토에 세워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유대인 대량학살로 악명을 떨치며 전쟁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소련은 폴란드에 친소련 공산정권을 수립해 사실상의 지배를 이어갔다.

해방을 향한 폴란드의 꿈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에야 현실이 됐다.

카친스키 대통령의 서거로 폴란드와 러시아는 뿌리깊은 악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고 원인도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못했다. 일각에선 추락 사고가 폴란드인 조종사와 러시아인 관제사의 의사소통 문제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번 사건이 두 나라의 길고 긴 악연을 끊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란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사고 발생 직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를 사고 조사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철저한 사고 원인조사를 약속했다.

푸틴 총리도 10일 사고 현장에 달려와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와 포옹하며 위로 메시지를 전달했고, 살아있었던 당시 자신과 날카롭게 대립했던 카친스키 대통령의 관 앞에 머리를 숙였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12일 러시아 정부의 신속한 대응과 러시아가 보여준 위로로 인해 "양국관계가 예상치 못한 화해 분위기에 접어들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아담 로트펠트 전 폴란드 외무장관은 "러시아의 애도 물결은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는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