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윤리적인 삶을 살수 없다?
가 분석치료가 '그림자'를 의식화하는 한,일종의 분열과 대극긴장을 조성하게 된다.
긴장을 느끼는 쪽에서 통합을 통하여 타협을 꾀한다. 이 타협의 중개는 상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대극 사이의 대립은 사람들이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거나 그것을 인해 심각한 사람으로 여겨질 때 참을 수 없는 한계에 이르게 된다.
논리학의 '배중원리'*가 입증되며,사람들은 아무런 해답도 알지 못한다. …중략…
과학적 인식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그럼으로써 과학은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과학은 정신의 실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만 정신을 수단으로 사용해야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나,데몬,또는 신이라는 명칭의 타당성을 반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체험과 결부된 생소함이 분명히 느껴진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미지의 것,생소한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안다.
꿈이나 어떤 착상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지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들을 마나,데몬,신,또는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작용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카를 융,「기억 꿈 사상」
* 배중원리: 형식논리학에서 두 개의 모순된 개념 사이에는 제3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원리
나 루소는 그의 교육소설 「에밀」의 첫 페이지에서 자연은 인간을 착하게 창조하였지만,인간은 인간의 손에 의해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기술하였다.
이런 생각을 한 루소는 또한 인간 교육을 인간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는 역설을 스스로 보았다.
인간의 손에 인간을 맡겨야 하는 그 필연성은 동시에 인간의 손에 인간이 타락하는 그 순간과 일치한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교육은 자연에 의한 인간 교육의 대리이기도 하다.
자연은 선이고 인간은 악이지만,선한 자연에 의한 교육은 악한 인간에 의한 교육에 의하여 보충되지 않을 수 없고,따라서 교육은 자연의 보충이자 대리적 기능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에 의한 교육을 통하여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이 지고의 선이라 하더라도 자연 상태로 인간을 방임하면,인간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
- 김형효,「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다 악이 없다면 선은 어떻게 될까?
악이 나타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선하려고 애쓸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선을 향한 인간의 의지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건 끊임없이 악에 대항하도록 인간에게 부담을 지운다.
뿐만 아니라 이 대항이 허깨비놀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악을 키우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악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며,악은 인간에게 도덕체계와 법체계를 갖출 동기를 부여한다.
만약 악이 그토록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그리고 모든 인간이 항상 다른 사람을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다면,어쩌면 존재하는 모든 직업들이 필요없어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번쯤 해야 할 것이다.
- 프란츠 부케티츠,「왜 우리는 악이 끌리는가」
라 이 세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밖에서조차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이름 붙일 수 있는 지성,재치,판단력,그리고 그밖의 모든 마음의 재능,혹은 용기,결심,목적한 것에 대한 끈기와 같은 우리 성향의 성질들은 여러 면에서 의심할 바 없이 선하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의 선물들을 사용해야 하는,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 특성에 '성격'이라는 용어를 붙이게 하는,그 의지가 선하지 않을 때,그런 재능들과 성질들은 악하고 해로울 수 있다. …중략…
앞에서 말한 몇 가지 성질들은 이 선한 의지 자체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선한 의지가 하는 일을 아주 수월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성질들이 무조건적인 내적 가치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니며,항상 선한 의지를 전제한다.
이 선한 의지는,그런 성질들이 정당하게 갖는 존경마저도 제한하며,그런 성질들을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여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 칸트,「도덕형이상학의 기초」
마 안회가 인(仁:'이상적 덕')을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자기의 사욕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에 인(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단 하루만이라도 자기를 억제해 인(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서 인(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안연이 물었다. "(인(仁)으로 갈 수 있게 하는) 그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예(禮)에 어긋나는 것은 보지도 말고,예(禮)에 어긋나는 것은 듣지도 말고,예(禮)에 어긋나는 것은 말하지도 말며,예(禮)에 어긋나는 것은 행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 공자 「논어」
바 현대인은 길고도 끊임없는 진화적 투쟁의 결과물이다.
이 투쟁에서 일부는 식량을 구하는 데 성공하고 번식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생존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한다. 반면 생존하지 못한 사람들의 유전자는 집단에서 소멸된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위하는 이기주의자는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극대화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생존하도록 돕는 이타주의자들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많다.
이기주의와 같은 특성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이기주의자들의 수는 늘어날 것이며 이타주의자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사실 진화는 이미 대단히 긴 시간을 지나왔으니,진정한 의미에서의 이타주의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 피터 싱어,「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서강대 2010 수시2(인문/사회과학계/커뮤니케이션 학부) 논술 시험은 문제 1,2번과 3번으로 나누어져서 나왔다.
이번 회에는 1,2번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도록 하자.
우선 1,2번 문제의 중심 주제는 윤리적 행위이다.
인간이 윤리적 행위를 하는 근원은 어디에 있는지 1번에서 묻고 있으며 2번에서는 1에서 파악한 근원을 통해서 (라),(마),(바)를 비판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일단 문제는 1과 2로 나누어져 있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파악할 수 있으며 만약 1번을 잘못 쓴다면 2번을 결코 잘 쓸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문제1>
(1) 제시문 [가],[나],[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하고,이에 근거하여 (2) '인간의 윤리적 삶'에 대해 논술하라.
<해제>
논제의 요구사항은 크게 두 가지다. (1) (가)~(다)에서 도출할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할 것,(2) 인간의 윤리적 삶에 대해 논술하라가 그것이다.
정확히 답하기 위해서는 논제가 무엇을 요구하는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필수다.
우선 시각을 제시하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각이라는 말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쓰는지 생각해본다면 논제의 의도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당신의 시각은 어떠한가? 혹은 두발자유화에 대한 당신에 시각은 어떠한가? 라는 질문을 떠올려보면 시각이라는 말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관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다)에서 특정한 대상에 대한 관점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요구사항 (2)에서 인간의 윤리적 삶에 대해 묻고 있으므로 (가)~(다)의 윤리에 대한 관점임을 알 수 있다.
즉 논제는 윤리에 대한 관점을 (가)~(다)에서 찾고 이러한 관점에 근거해서 인간의 윤리적 삶에 대해서 논술하라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여전히 이것이 무엇을 묻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윤리적 관점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윤리는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따져보는 것이 윤리다.
따라서 (가)~(라)를 독해할 때 옳고 그름과 관련하여 독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올바른 행위가 무엇인지와 관련하여 독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제시문은 상당히 난도가 높다. 특히 (가) 제시문은 '그림자'와 같은 융의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아무런 설명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학생들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독해하려면 제시문을 정말 꼼꼼하게 읽지 않고서는 안 된다.
또한 (가)를 정확히 독해했다고 하더라도 (나),(다)가 (가)와는 어떠한 논리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면 (가)~(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시각을 정확히 찾아낼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 (가)는 (나),(다)와 전혀 다른 주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를 윤리와 어떻게 연관을 맺느냐가 독해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가)에서는 그림자를 의식화하는 한,일종의 분열과 대극긴장을 조성하게 된다고 했으므로 그림자와 의식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의식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그림자와 무의식은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나,데몬,신 또한 무의식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가)는 무의식과 의식은 서로 대립되고 있으며 타협은 상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이 상징은 저절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이 글은 인간의 창조성은 무의식적 발현으로 의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윤리와 관련지어 생각해본다면 인간의 행위는 무의식적 행위로 선한 의지가 별현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찾아낼 수 있다.
(나)에서 루소는 자연과 인간,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언급한다.
자연은 인간을 선하게 창조했지만 인간은 인간의 손에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에 의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악으로부터 빠져나올 가능성은 없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윤리적일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에서 선을 향한 의지가 인간을 악에 대항하도록 하며 이러한 대항이 오히려 악을 부추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악을 간절히 필요로 하며 악은 인간에게 도덕체계와 법체계를 갖출 동기를 부여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악은 항상 선과 함께 공존하며 순수한 선의 세계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가)~(다)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순수한 윤리적,도덕적 행위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무의식적 행위의 결과이거나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악은 필수적이라는 시각임을 알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인간의 윤리적 삶'에 대해 논술하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윤리적 삶이란 앞에서 언급했듯이 올바른 삶이란 뜻이다.
(가)~(다)에서는 윤리의 근원이 찾을 수 없거나 있다고 해도 악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각하고 노력하는 일은 어떤 사회에서건 필요한 일이다.
즉 윤리적 행위와 윤리적 삶의 근원과 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거나 인식하는 문제와 구체적 현실을 속에서 살아가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따라서 윤리적 삶의 근원을 (가)~(나)에서처럼 불분명하게 보거나 있더라도 악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인간이 사회 속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윤리적 삶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2>
(1) <문제 1>의 답변에 입각해서, (2) 제시문 [라],[마],[바]를 비판하라.
<해제>
<문제1>의 답변에 입각해서라는 것은 비판의 기준을 윤리적 삶에 대한 학생의 기준에서 (라)~(바)를 비판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학생이 1번 문제를 어떻게 서술했는지가 2번 문제를 서술하는 것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1번에서 (가)~(다)를 근거로 윤리적 삶은 근거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이 윤리적 삶을 살기 어렵다고 서술하든 그럼에도 윤리적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서술하든 (라)~(마)에서 언급된 윤리적 실천의 한계를 적절히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비판하라는 뜻은 무조건 문제점만 지적하라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나누어보고 따져보라는 뜻이기 때문에 학생은 (라)~(마)가 가진 윤리에 대한 입장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앞의 제시문과 마찬가지로 (라)~(마)의 제시문도 만만치 않다.
우선 (라)제시문은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라고 한다.
또한 지성,재치,판단력,마음의 재능,용기,결심 등의 성질들은 선한 의지 아래에서만 선한 것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한계를 찾을 수 있다.
선한 의지가 항상 선한 결과로 귀결되지 않으며 또한 악한 의지가 항상 악한 결과를 가져오지도 않는다.
따라서 윤리적 행위의 동기와 그 결과의 관점에서 (라)를 비판할 수 있다.
제시문 (마)에서 안회가 공자에게 인을 묻자 공자는 예에 따르는 것이 인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대답한다.
인이 구체적 내용이라면 예라는 것은 일종의 형식이다. 형식을 따를 때 그 내용이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형식만 따르는 형식적 예법에 얽매여 실질적으로 올바른 행위에 대한 개인의 주체적 결정이 등한시될 수 있다.
따라서 예를 따르는 행위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윤리적 실천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비판할 수 있다.
(바)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위하는 이기주의자가 다른 사람들이 생존하도록 돕는 이타주의자들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고 이러한 성향은 부분적으로는 유전자에 결정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을 본성으로 바라보는 이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지만 인간의 이타적 행위를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이타적 행위 또한 자신의 이기적 욕심이나 심리적 만족이라는 이기적 욕구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양한 상황이나 조건에서 이타적 행위가 관찰되며 심지어는 사회적 구조나 시스템에 따라서 인간의 이기적 행위와 이타적 행위가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인간이 사회와 관련없이 본성 자체가 이기적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적 조건 등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때 오히려 인간의 윤리적 실천의 원인을 좁게 보는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서강대 1,2번 문제를 풀 때는 윤리란 무엇이고 우리가 윤리적 행위를 하는 동기는 무엇인지 스스로 정리를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김법성 S · 논술 선임 연구원 greennamou@hanmail.net
가 분석치료가 '그림자'를 의식화하는 한,일종의 분열과 대극긴장을 조성하게 된다.
긴장을 느끼는 쪽에서 통합을 통하여 타협을 꾀한다. 이 타협의 중개는 상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대극 사이의 대립은 사람들이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거나 그것을 인해 심각한 사람으로 여겨질 때 참을 수 없는 한계에 이르게 된다.
논리학의 '배중원리'*가 입증되며,사람들은 아무런 해답도 알지 못한다. …중략…
과학적 인식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그럼으로써 과학은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과학은 정신의 실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만 정신을 수단으로 사용해야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나,데몬,또는 신이라는 명칭의 타당성을 반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체험과 결부된 생소함이 분명히 느껴진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미지의 것,생소한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안다.
꿈이나 어떤 착상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지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들을 마나,데몬,신,또는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작용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카를 융,「기억 꿈 사상」
* 배중원리: 형식논리학에서 두 개의 모순된 개념 사이에는 제3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원리
나 루소는 그의 교육소설 「에밀」의 첫 페이지에서 자연은 인간을 착하게 창조하였지만,인간은 인간의 손에 의해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기술하였다.
이런 생각을 한 루소는 또한 인간 교육을 인간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는 역설을 스스로 보았다.
인간의 손에 인간을 맡겨야 하는 그 필연성은 동시에 인간의 손에 인간이 타락하는 그 순간과 일치한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교육은 자연에 의한 인간 교육의 대리이기도 하다.
자연은 선이고 인간은 악이지만,선한 자연에 의한 교육은 악한 인간에 의한 교육에 의하여 보충되지 않을 수 없고,따라서 교육은 자연의 보충이자 대리적 기능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에 의한 교육을 통하여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이 지고의 선이라 하더라도 자연 상태로 인간을 방임하면,인간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
- 김형효,「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다 악이 없다면 선은 어떻게 될까?
악이 나타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선하려고 애쓸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선을 향한 인간의 의지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건 끊임없이 악에 대항하도록 인간에게 부담을 지운다.
뿐만 아니라 이 대항이 허깨비놀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악을 키우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악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며,악은 인간에게 도덕체계와 법체계를 갖출 동기를 부여한다.
만약 악이 그토록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그리고 모든 인간이 항상 다른 사람을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다면,어쩌면 존재하는 모든 직업들이 필요없어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번쯤 해야 할 것이다.
- 프란츠 부케티츠,「왜 우리는 악이 끌리는가」
라 이 세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밖에서조차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이름 붙일 수 있는 지성,재치,판단력,그리고 그밖의 모든 마음의 재능,혹은 용기,결심,목적한 것에 대한 끈기와 같은 우리 성향의 성질들은 여러 면에서 의심할 바 없이 선하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의 선물들을 사용해야 하는,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 특성에 '성격'이라는 용어를 붙이게 하는,그 의지가 선하지 않을 때,그런 재능들과 성질들은 악하고 해로울 수 있다. …중략…
앞에서 말한 몇 가지 성질들은 이 선한 의지 자체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선한 의지가 하는 일을 아주 수월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성질들이 무조건적인 내적 가치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니며,항상 선한 의지를 전제한다.
이 선한 의지는,그런 성질들이 정당하게 갖는 존경마저도 제한하며,그런 성질들을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여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 칸트,「도덕형이상학의 기초」
마 안회가 인(仁:'이상적 덕')을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자기의 사욕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에 인(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단 하루만이라도 자기를 억제해 인(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서 인(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안연이 물었다. "(인(仁)으로 갈 수 있게 하는) 그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예(禮)에 어긋나는 것은 보지도 말고,예(禮)에 어긋나는 것은 듣지도 말고,예(禮)에 어긋나는 것은 말하지도 말며,예(禮)에 어긋나는 것은 행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 공자 「논어」
바 현대인은 길고도 끊임없는 진화적 투쟁의 결과물이다.
이 투쟁에서 일부는 식량을 구하는 데 성공하고 번식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생존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한다. 반면 생존하지 못한 사람들의 유전자는 집단에서 소멸된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위하는 이기주의자는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극대화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생존하도록 돕는 이타주의자들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많다.
이기주의와 같은 특성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이기주의자들의 수는 늘어날 것이며 이타주의자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사실 진화는 이미 대단히 긴 시간을 지나왔으니,진정한 의미에서의 이타주의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 피터 싱어,「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서강대 2010 수시2(인문/사회과학계/커뮤니케이션 학부) 논술 시험은 문제 1,2번과 3번으로 나누어져서 나왔다.
이번 회에는 1,2번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도록 하자.
우선 1,2번 문제의 중심 주제는 윤리적 행위이다.
인간이 윤리적 행위를 하는 근원은 어디에 있는지 1번에서 묻고 있으며 2번에서는 1에서 파악한 근원을 통해서 (라),(마),(바)를 비판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일단 문제는 1과 2로 나누어져 있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파악할 수 있으며 만약 1번을 잘못 쓴다면 2번을 결코 잘 쓸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문제1>
(1) 제시문 [가],[나],[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하고,이에 근거하여 (2) '인간의 윤리적 삶'에 대해 논술하라.
<해제>
논제의 요구사항은 크게 두 가지다. (1) (가)~(다)에서 도출할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할 것,(2) 인간의 윤리적 삶에 대해 논술하라가 그것이다.
정확히 답하기 위해서는 논제가 무엇을 요구하는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필수다.
우선 시각을 제시하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각이라는 말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쓰는지 생각해본다면 논제의 의도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당신의 시각은 어떠한가? 혹은 두발자유화에 대한 당신에 시각은 어떠한가? 라는 질문을 떠올려보면 시각이라는 말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관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다)에서 특정한 대상에 대한 관점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요구사항 (2)에서 인간의 윤리적 삶에 대해 묻고 있으므로 (가)~(다)의 윤리에 대한 관점임을 알 수 있다.
즉 논제는 윤리에 대한 관점을 (가)~(다)에서 찾고 이러한 관점에 근거해서 인간의 윤리적 삶에 대해서 논술하라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여전히 이것이 무엇을 묻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윤리적 관점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윤리는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따져보는 것이 윤리다.
따라서 (가)~(라)를 독해할 때 옳고 그름과 관련하여 독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올바른 행위가 무엇인지와 관련하여 독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제시문은 상당히 난도가 높다. 특히 (가) 제시문은 '그림자'와 같은 융의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아무런 설명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학생들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독해하려면 제시문을 정말 꼼꼼하게 읽지 않고서는 안 된다.
또한 (가)를 정확히 독해했다고 하더라도 (나),(다)가 (가)와는 어떠한 논리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면 (가)~(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시각을 정확히 찾아낼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 (가)는 (나),(다)와 전혀 다른 주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를 윤리와 어떻게 연관을 맺느냐가 독해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가)에서는 그림자를 의식화하는 한,일종의 분열과 대극긴장을 조성하게 된다고 했으므로 그림자와 의식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의식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그림자와 무의식은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나,데몬,신 또한 무의식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가)는 무의식과 의식은 서로 대립되고 있으며 타협은 상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이 상징은 저절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이 글은 인간의 창조성은 무의식적 발현으로 의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윤리와 관련지어 생각해본다면 인간의 행위는 무의식적 행위로 선한 의지가 별현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찾아낼 수 있다.
(나)에서 루소는 자연과 인간,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언급한다.
자연은 인간을 선하게 창조했지만 인간은 인간의 손에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에 의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악으로부터 빠져나올 가능성은 없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윤리적일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에서 선을 향한 의지가 인간을 악에 대항하도록 하며 이러한 대항이 오히려 악을 부추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악을 간절히 필요로 하며 악은 인간에게 도덕체계와 법체계를 갖출 동기를 부여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악은 항상 선과 함께 공존하며 순수한 선의 세계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가)~(다)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순수한 윤리적,도덕적 행위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무의식적 행위의 결과이거나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악은 필수적이라는 시각임을 알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인간의 윤리적 삶'에 대해 논술하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윤리적 삶이란 앞에서 언급했듯이 올바른 삶이란 뜻이다.
(가)~(다)에서는 윤리의 근원이 찾을 수 없거나 있다고 해도 악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각하고 노력하는 일은 어떤 사회에서건 필요한 일이다.
즉 윤리적 행위와 윤리적 삶의 근원과 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거나 인식하는 문제와 구체적 현실을 속에서 살아가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따라서 윤리적 삶의 근원을 (가)~(나)에서처럼 불분명하게 보거나 있더라도 악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인간이 사회 속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윤리적 삶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2>
(1) <문제 1>의 답변에 입각해서, (2) 제시문 [라],[마],[바]를 비판하라.
<해제>
<문제1>의 답변에 입각해서라는 것은 비판의 기준을 윤리적 삶에 대한 학생의 기준에서 (라)~(바)를 비판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학생이 1번 문제를 어떻게 서술했는지가 2번 문제를 서술하는 것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1번에서 (가)~(다)를 근거로 윤리적 삶은 근거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이 윤리적 삶을 살기 어렵다고 서술하든 그럼에도 윤리적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서술하든 (라)~(마)에서 언급된 윤리적 실천의 한계를 적절히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비판하라는 뜻은 무조건 문제점만 지적하라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나누어보고 따져보라는 뜻이기 때문에 학생은 (라)~(마)가 가진 윤리에 대한 입장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앞의 제시문과 마찬가지로 (라)~(마)의 제시문도 만만치 않다.
우선 (라)제시문은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라고 한다.
또한 지성,재치,판단력,마음의 재능,용기,결심 등의 성질들은 선한 의지 아래에서만 선한 것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한계를 찾을 수 있다.
선한 의지가 항상 선한 결과로 귀결되지 않으며 또한 악한 의지가 항상 악한 결과를 가져오지도 않는다.
따라서 윤리적 행위의 동기와 그 결과의 관점에서 (라)를 비판할 수 있다.
제시문 (마)에서 안회가 공자에게 인을 묻자 공자는 예에 따르는 것이 인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대답한다.
인이 구체적 내용이라면 예라는 것은 일종의 형식이다. 형식을 따를 때 그 내용이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형식만 따르는 형식적 예법에 얽매여 실질적으로 올바른 행위에 대한 개인의 주체적 결정이 등한시될 수 있다.
따라서 예를 따르는 행위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윤리적 실천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비판할 수 있다.
(바)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위하는 이기주의자가 다른 사람들이 생존하도록 돕는 이타주의자들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고 이러한 성향은 부분적으로는 유전자에 결정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을 본성으로 바라보는 이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지만 인간의 이타적 행위를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이타적 행위 또한 자신의 이기적 욕심이나 심리적 만족이라는 이기적 욕구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양한 상황이나 조건에서 이타적 행위가 관찰되며 심지어는 사회적 구조나 시스템에 따라서 인간의 이기적 행위와 이타적 행위가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인간이 사회와 관련없이 본성 자체가 이기적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적 조건 등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때 오히려 인간의 윤리적 실천의 원인을 좁게 보는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서강대 1,2번 문제를 풀 때는 윤리란 무엇이고 우리가 윤리적 행위를 하는 동기는 무엇인지 스스로 정리를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김법성 S · 논술 선임 연구원 greennam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