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바로잡아야 세상의 혼란을 잠재울수 있다

⊙ 여전한 공자의 시대
[실전 고전읽기] 62. 공자「논어」
고등학교 도덕이나 윤리교과서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윤리를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들이 분명 많지 않을 것이다.

교과서를 단지 시험범위가 들어 있는 종이책이라고 생각했다면,이런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그 사실을 알았다면,이제 그런 시도를 비판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집단행동'이나 '집단생활'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요즘 세대들에게,혹은 각 개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방향 없이 제각기 각을 세우고 있는 시대에,'공동체의 회복으로 이 시대의 혼란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비판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모두가 똑같은 발언권을 지니고 자신의 가치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세상에서 그 개인의 가치들을 하나의 공동체에 묶어두려는 시도가 과연 가능하냐는 질문은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혼란을 그저 놔두자는 대답은 아무도 할 수 없다.

시대적 흐름이 그러하다고,'공동체의 사상들'이 마냥 버려진 자식처럼 우리의 시야를 떠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 이야기할 공자의 사상을 포함해 2000년이 넘는 시간의 간격을 뚫고 살아남은 그것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빛나는 깨우침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그 옛날과 지금의 차이란 고작 혼란의 수가 늘어난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 질서회복,공자의 시대적 사명

공자(BC 552~479)가 살던 시기는 주(周 · BC 1046~771)의 봉건제도가 무너져 내리고 혼란이 극에 달해 있던 춘추전국시대였다.

혈연관계로 굳게 맺어져 있던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혈연성이 흐려지고 상하관계나 위계질서에 대한 개념이 사라지게 되고,훗날엔 그저 힘이 강한 사람이 더 많은 땅을 차지하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돌변하게 된다.

공자가 보기엔 이 모든 상황이 혼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평생에 걸쳐 이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것이다. (공자의 정식 직업은 지금식으로 말하면 '공무원 양성 학원 경영' 정도 된다.)

공자가 이 혼란을 극복할 수 있다고,혹은 극복하기 위해 내세운 것은 '정명'(正名)이었다.

즉 '이름을 바로잡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일이 이뤄지지 않고,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제도가 일어나지 못하고,예악제도가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알맞지 않고,형벌이 알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 (『論語』「子路」3)

공자의 사고의 큰 틀은 정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보기에 세상의 혼란은 사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이름에 맞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동체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임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욕심에 따라 행동하고 그 질서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세상의 혼란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이러한 혼란을 '이름을 바로잡음'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정명이란 무엇인가?

공자의 정명이란 쉽게 이야기해서 '~다움'을 지키는 것이다.

학생이면 학생답게,신하면 신하답게,왕이면 왕답게,남편이면 남편답게,여자면 여자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주어진 질서 안에서 혼란없이 사회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의 많은 이에게 이것은 매우 비합리적이며,가부장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겠지만,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해보았을 때 자리를 잃어버린 개체들의 본질을 되찾아주는 핵심적인 작업이었을 것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며,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아비는 아비다워야 하며,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君君,臣臣,父父,子子." (『論語』「顔淵」11)

이 문장은 공자의 생각을 아주 간결하게 드러내준다.

임금이란 다만 임금의 이름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그 이름에 맞는 행동과 책임을 다할 때 임금이다.

개개인들이 이러한 틀을 깨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혼란이기에 공자는 이러한 틀을 다시 만들어 놓는 것이다.

나아가 공자는 정명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내세우는데,그것이 바로 친친(親親)과 존존(尊尊)이다.

흐트러진 질서관계를 되찾는 두 가지 방법,그 중 친친이란 '마땅히 친해야 할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란 뜻이며,존존이란 '마땅히 존중해야 할 사람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즉 친친이란 모든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 친함과 친하지 않음을 정확히 구별해 '우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며,존존이란 상하관계에 있어 그 질서를 규율함으로써 위아래가 바뀌는 폐단을 막고자 한 것이다.

어찌보면 친친이란 유교적 온정주의의 바탕이 되는 것이며,한편으론 온갖 비리의 근원이 되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인간의 극히 자연스러운 본성'을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존존은 '어른 공경'의 직접적인 근거도 되지만 반대로 권위주의적인 질서체계를 잉태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 영원히 이 질서 그대로,인(仁)과 덕(德)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잡았으니,이제 잘 형성된 질서는 다시 어찌 유지할 것인가도 문제가 된다.

물론 '다움의 철학'을 공고히 하여 위아래가 바뀌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지만,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방적인 상명하복의 시스템이 결코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은 21세기의 우리나 그때 그 시절의 공자나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방식으로의 인(仁 · 어짊,너그러움)이며,덕(德 · 훌륭함의 지향가치)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제자들의 질문에 등장하는 그것들의 이미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리사욕을 극복하여 예의 규칙으로 돌아가는 것(극기복례)이 인이다. 하루만이라도 극기복례한다면 천하가 인으로 귀의할 것이다.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論語』「顔淵」1)

"정치는 덕이라고 말한다. 이는 비유컨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뭇 별들이 그것을 향하는 것과 같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而衆星共之." (『論語』「爲政」1)

☞ 2009년 인하대 수시기출문제 중에서

공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루어 다른 이를 대하는 원리에 기초한 인의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엄격한 법치는 백성들 사이에 정해진 죄만 짓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조장할 뿐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못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회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주는 오직 덕으로써 백성을 너그럽게 대해야 본래의 착한 본성을 일깨우고 조화로운 인간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맹자에 의해 계승,발전된 이러한 공자의 이념은 과거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웃의 선의에 대한 믿음에 토대를 둔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협업에 기초한 벼농사 중심의 농경생활 양식과 결합함으로써 상부상조와 협동 단결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전통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레,품앗이,계,향약 등이 그 구체적인 예가 되는데,이러한 것들은 인과 예를 근간으로 하는 덕치가 단순한 사회질서 유지 차원을 넘어 한층 더 아름다운,'인간적인' 인간관계를 가능케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2009년 숭실대 수시 기출문제 중에서

공자가 말하였습니다. "법률이나 명령 같은 것으로 백성들을 제재하고,그래도 잘 안 되어 형벌로써 백성들을 억눌러 무자비하게 다스리면,백성들은 형벌만을 모면하려고 겉으로만 추종한다. 당장에는 법령에 걸리지 않고 형벌을 모면하겠지만,실상에 있어서 백성들은 가슴 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는 양심적인 수치심은 느끼지 않게 된다. 이러한 표면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이 아니라 덕으로써 백성들을 평등하게 다스리면 저마다 마음속으로부터 참 인간으로서 양심적인 수치심을 느끼고 올바르게 행동하여 끝내는 선에 이르게 될 것이다."

행정명령으로 백성을 이끌어가려고 하거나 형벌로써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한다면 백성들은 그러한 규제를 간섭과 외압으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처벌받지 않으려고 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부정을 저지르거나 처벌을 받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용준 S · 논술 선임연구원 sgsgnot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