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육체로부터 분리해 낼수 있을까
가 "여기 컵과 물이 있어. 육체가 컵이라면 정신은 물이야. 컵이 없으면 물이 계속 흐르듯이,육체가 없으면 정신은 자유로워져." …(중략)…
"그렇다고 해서 육체를 없애 버릴 수는 없어. 그건 죽음이야."
"꼭 그렇지는 않아. 우리는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육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 뇌를 따로 떼어내어 영양액 속에 보존하면 되는 거야." …(중략)…
귀스타브는 아내와 두 자녀와 비밀리에 초청된 몇몇 과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기 자신 속으로 은둔하기 위한 수술을 받았다.
완전한 은둔자가 되기 위해,외과에서 시술할 수 있는 모든 절제 수술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전신 절제를 선택했던 것이다. …(중략)…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자 부속물들은 말끔히 제거되고 진짜 뇌라고 할 만한 것만 남았다.
끄트머리만 남은 경동맥을 통해 영양액 속의 당분과 산소를 직접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중략)…
"아빠는 돌아가신 거야?" …(중략)…
"아냐. 아빠는 여전히 살아 계셔. 단지 모습이 달라졌을 뿐이야." …(중략)…
"저 뇌가 보이지? 저기 표본병 속에 들어 있는 것 말이다. 저것은 80년 전부터 명상을 계속하고 있는 네 할아버지의 뇌다. 네가 책임지고 저것을 보살피거라.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때때로 영양액을 갈아주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귀스타브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수십 년의 시간을 유익하게 활용해 인간의 사고와 관련된 많은 비밀을 알아냈다.
그는 뇌로만 남음으로써 완전한 묵상에 들어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명을 연장하기까지 했다. …(중략)…
쓰레기통에 뇌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턱이 없는 빌리 아버지는 그것을 가지고 내려가 집 앞에 놓인 쓰레기 수거함에 비워 버렸다.
영양액을 잃은 귀스타브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었다.
거리를 떠돌던 개 한 마리가 냄새를 맡고 와서 그를 쓰레기 수거함에서 끌어냈다.
세상의 모든 은둔 수행자들 가운데 가장 완전하고 가장 연륜이 깊은 귀스타브 루블레를 궁지에서 건져낸 것이다.
하지만 개에게는 그 뇌가 한낱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귀스타브는 허망하게 개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으로 떠났던 한 남자의 깊디깊은 사유는 그렇게 끝이 났다. …(중략)…
개는 식사를 끝내고 가볍게 트림을 하였다.
그리하여 귀스타브 루블레의 사유 중에서 아직 남아 있던 것들이 모두 저녁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완전한 은둔자」
나 소크라테스; 그렇지만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되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중략)…
갖바치가 굽은 칼과 곧은 칼 및 다른 도구들로 자르듯이 말일세. …(중략)…
그러니 사용하고 자르는 사람 다르고,자를 때 사용되는 것 다르지? …(중략)…
그러면 우리는 갖바치에 대해서 뭐라 말하지?
도구만 사용해서 자른다고 말하나,아니면 손도 사용해서 자른다고 말하나?
알키비아데스; 손도죠.
소크라테스; 그러니 그는 손도 사용하는 것인가? …(중략)… 눈도 사용해서 신발을 만드는가? …(중략)… 그런데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되는 것들이 다르다는 데 우리는 동의하는 것이지? …(중략)… 그러니 갖바치와 키타라 연주자는,그들이 작업할 때 사용하는 손과 눈하고는 다르지? …(중략)… 신체 전부도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지? …(중략)… 그러니 사람은 자신의 신체와 다르지? …(중략)… 그러면 도대체 사람은 무엇인가? …(중략)… 그래도 신체를 사용하는 쪽이라는 점만큼은 자네가 말할 수 있네. …(중략)… 그러니까 혼 말고 다른 무엇이 그것을 사용하겠나?
알키비아데스; 다른 것이 아니라 혼이 사용하죠.
소크라테스; 혼이 다스리면서겠지? …(중략)… 사람은 적어도 셋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지. …(중략)… 혼,신체 그리고 이 둘이 합쳐진 전제 말일세. …(중략)… 하지만 신체를 다스리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데는 우리가 동의했었지? …(중략)… 그러면 신체가 바로 스스로를 다스리는가?
알키비아데스; 전혀요.
소크라테스; 그것은 다스려진다고 우리가 말하기 때문일세. …(중략)… 그러니 이것만큼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아니군. …(중략)… 그렇기 때문에 둘이 합쳐진 것이 신체를 지배하며,이것이 사람인 것인가?
알키비아데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만.
소크라테스; 무엇보다도 그것은 아닐 걸세. 어느 한쪽이 다스림에 참여하지 않는다면,둘이 합쳐진 것이 다스릴 방도는 전혀 없을 테니까. …(중략)… 사람은 신체도,둘이 합쳐진 것도 아니니,내 생각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거나,그것이 무엇이기는 하다면 혼 말고 다른 게 결코 아니라는 결론이 남는군.
알키비아데스; 바로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니 아직까지도 혼이 사람이라는 것에 관해 이 이상 분명하게 자네에게 논증할 필요가 있겠는가? …(중략)… 그러니 자신을 알라고 명하는 자는 우리에게 혼을 알라고 시키는 걸세. …(중략)… 그러니 신체에 속하는 것들 중에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은 자신에 속하는 것들을 아는 사람이지,자신을 아는 사람은 아닐세.
-플라톤,「알키비아데스 Ⅰ」
다 팔꿈치에 난 찰상으로 인해서 따가운 통증을 느끼게 되고,식중독에 걸리면 복통과 메스꺼움이 뒤따른다.
당신의 망막에 빛이 투사되면 시각 경험을 가지게 되고,주위의 사물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감각 표피가 자극을 받으면 여러 가지의 심적 사건들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멀리 있는 원인들이고,심적 사건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두뇌 상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마취가 작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감각 기관의 말초 신경으로부터 오는 신경 신호가 차단되거나,두뇌의 정상적인 기능이 방해를 받아서 중추 신경이 마비가 되면,어떠한 고통도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정신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것의 가장 근접한 물리적인 기반으로서 두뇌 상태(또는 중추 신경계)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심성의 존재가 적절한 신경 구조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지지해 주는 증거가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두뇌를 이루는 분자를 모두 제거해 버리면,그의 정신생활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그 사람의 신체를 이루는 모든 분자를 제거해 버리면,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적어도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권,「심리철학」
⊙ 갇힌 논제,권투의 링,축구의 규칙
현행 대입 논술고사의 경우,제시문과 논제가 제시된다. 답안 서술 분량은 짧게는 300자,길어야 1,200자 안팎이다.
제시문은 대개 2개 이상이고(여러 표,그래프,사진 등이 포함되기도 하며),논제는 순차적으로 제시된다.
설명 · 요약하라로 시작해 제시문들을 비교하라든가 [가]의 관점을 가지고 [나]의 글을 보라든가 하여 전개된다.
그러니 논술평가의 주안점은 제시문 이해도를 측정하고,원리나 이론을 파악하여 이를 구체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에 맞추어진다.
물론 논술문제이니 만큼 '논하라''서술하라' 혹은 '타당성을 살펴라' 등으로 논제는 최종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 지시가 "자신의 견해를 가미해 대상을 자유롭게 판단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곧 낭패를 만나게 된다.
"[가]에서의 제안을 실현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시오"라는 논제에는 "[다] [라] [마] [바]의 핵심내용을 기초로"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가 쓰는 논술은 '닫힌 논제'라고 해야 할 것인데 이를 족쇄나 쇠우리처럼 생각할 일은 아니다.
권투에서의 링,축구에서의 규칙이라 받아들이자.
서강대 수시논술에 임하는 전략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문제 3>
제시문 [나]와 [다]를 비교한 후,이를 바탕으로 제시문 [가]의 귀스타브가 처한 모순적 상황에 대해 논하라. (40%,1,000~1,200자)
⊙ 논제의 분석을 통한 글의 뼈대 잡기
논술은 사고의 논리적 과정,자체이다.
다루는 내용의 조건과 상황을 전제로 어떠한 근거를 뒷받침하고,어떤 가치를 향해 나의 판단이 진행되어 왔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론이 위에서 언급한 대학의 논술조건에서 적용되어야 한다.
어떤 전략을 써야 할까?
제시문은 세심하게 분석,판단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다루는 내용의 범주가 정해지고,전제와 조건 혹은 근거로 사용될 자료들이 마련되며,어떤 과제를 해결할 것인지도 알게된다.
이때 이런 글감들의 배치,즉 구성을 결정짓는 것은 문제를 풀어가는 방향을 일러주는 '논제(문제)'이다.
우선 논제 분석으로 전체 흐름을 짜보자.
(1) 제시문 [나]와 [다]를 비교한 후,이를 바탕으로:
'비교(比較)'란 견주어보는 것이다. 둘 이상을 번갈아 보게 되면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알게 된다.
차이를 드러내야 비로소 둘이 달리 존재하는 것(種)의 의미를 명징하게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공통점을 검토해야 둘이 속한 곳(類)을 알 수 있다.
달걀은 '오리가 아닌 '닭'이 낳은 것이며,새에서 태어나 배꼽을 찾아볼 수 없는 생명체'로 정의할 수 있는데,이처럼 종차(種差)와 동류(同類)를 통해 대상은 정의(定意,difine)된다. (비교에서 두 가닥,글이 엮여 나온다).
'바탕'이란 '직물이나 물체의 바닥 또는 빛깔',혹은 '삶의 타고난 성질이나 재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바탕하여 보라'는 것은 관점을 가지고,달리 말하면 원리(原理)로 작용시켜 보라는 것이다.
마치 규칙을 안에 담고 있는 상자(함수 · 函數)처럼 [가]를 [나]와 [다]의 원리를 통해 보면,예측 가능하게 해석된다는 의미다.
그러니 [나]와 [다]는 단순 요약이 아니라 그 원리를 개념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귀스타브가 처한 상황이 장악된다.
(2) 제시문 [가]의 귀스타브가 처한 모순적 상황에 대해서;
'모순'이란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할 수는 없는 상태,즉 제시된 명제들이 상호 일치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때 모순적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귀스타브'임을 분명히 하자. (따라서 모순된 상태를 밝혀주는 것이 다시 한 가닥)
(3) 논하라;
논(論)은 논술(論述)이거나,평론(評論)이거나,혹은 둘 다이다. ('평하라'고 하는 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론은 사물의 질이나 '가치'에 대하여 비평하는 것이고,논술은 현실경험과의 합치성 혹은 이론적 정합성(합리성) 등을 검토하면서 나아가는 사고 과정이다. (그러니 논하라는 말은 최소 두 가닥의 글갈래가 있음을 말한다.)
분량을 보자. 1,000자를 쓴다면 답안은 200자씩 다섯 문단,1,200자를 쓴다면 240자씩 다섯 문단이다.
문단 수의 차이가 있고,각 문단의 길이 역시 여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그 안에는 위와 같은 내용을 오롯하게 채워야 한다.
"쓸 내용이 없어요,써도써도 망망한 바다 같아요!"하는 호소를 원고지를 앞에 둔 학생들은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이 구조를 만들어놓고 보면,말할 것에 비해 공간은 너무나, 오히려,작다.
⊙ 뼈대를 채우는 답안의 내용들
제시문을 독해할 때 주의할 것이 있다.
글이 최종적으로 주장하는 바를 알아내는 데 목적을 두지 말고,그 주장이 나오는 과정 전체를 따라가야 한다는 점이다.
즉 그의 근거와 전제를 바로 살펴야 주장의 타당성을 살필 여지가 생긴다.
이런 점에 주의하며,[나]와 [다]를 읽자.
[나]는 혼이 주체가 되어 신체를 지배하고,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라 본다.
굽은 칼이 스스로를 움직이지 못하는데,이는 쓰는 이와 쓰임을 당하는 것이 달라 그런 것이며,신체 역시 스스로를 직접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므로 혼의 부림을 받는 쪽이라는 것이다.
[다]는 피부며 망막 같은 곳의 자극을 통해서만 느낌과 경험,즉 정신활동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두뇌라는 분자 구조물을 없애면 즉시 정신활동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데,이로써 '심성'이 육체의 일부(두뇌)에 의존한다는 점이 증명된다고 언급한다.
그러니 [다]에 의해 즉각적으로 귀스타브의 상황은 정리된다.
귀스타브는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육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하고 말한다.
하지만 당장 두뇌가 개에게 먹혀버리자 그의 사유는 끝장난다.
"육체가 없으면 자유로워져."하고 선언했지만 자유는커녕 제 한 몸을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급락한다.
[나]에 의해서도 귀스타브는 터무니없는 존재다.
소크라테스는 신체와 도구의 지배자로서 혼을 명명하지만 귀스타브의 '정신'은 온도와 영양액에 불안정하게 의존하는 존재이다.
'가장 완전하고 가장 연륜 깊은 수행자'는 심지어 아들에게조차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겨우 개의 배만을 채웠던 것이다. 그것도 그가 '고기덩이'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귀스타브의 '모순된 상황'이다.
물론,인간이 가진 놀라운 '정신 영역'을 육체(물질)와 구별하고자 하는 욕구는 당연하고,또 타당한 면이 있다.
측은지심을 느끼고,아름다움을 창조하며,원과 지름의 비율을 소수점 507자리까지 (순전히 머리로) 계산해 낼 수 있는 지적 능력을,인간의 본질로 보자는 데서 '진실'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물질적인 것으로 결코 증명된 적이 없었던 신(神)의 존재,그것을 믿는 신념의 세계,그것은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 곁에 '실재'하는가.
그래서 귀스타프는 더 나아가,이 자유로운 물(정신)을 위해 컵(몸)을 깨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는 마치 로빈슨 크루소처럼 "아무것도 없이 무인도에서 살 수 있어!"하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오류이다. 로빈슨은 문명화된 인간이었기 때문에 이를 도구로 삼아,그 이성의 도구를 사용해 물건을 사용해서만,무인도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쉽게 육체와 분리해 낼 수 없음은 자명하다.
춤과 춤추는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우리는 머리에서 쉽게 원(cirle)을 그리고,이를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로 명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 원을 그리지 않을 때 '한 점과 그로부터 같은 거리의 점들의 집합'은 무수한 다른 점들과 구별되지 아니한 채로 섞여있기도 한 것이다.
나아가면,"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쉽게 폭력적인 명제로 변질된다.
정신의 존귀함을 홀로 강조할 때 차별과 배제는 잉태된다.
'이성'을 갖지 못하는 동물들,나무들 같은 자연이 조금만 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못 배운 이들,지적 장애를 가진 인간들조차 물건과 같은 차원에 놓인다.
아름답고 거대한 바미안의 부처를 로켓포로 부숴버린 것은 이슬람 원리주의 탈레반이었다.
그들은 '우상을 두지 말라'는 '말씀'을 '돌부처' 파괴의 이유로 삼았다.
인간들이 어떤 행위에 갖다붙이는 거대담론인 '계급해방' '민족통일',혹은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이름을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그건 작은 우리들 '머리' 속에 있다. 뜨거운 피와 똑같이 쿵쾅거리는 심장이,우리의 '몸' 안에 있는 것에 반해서….
'머리'를 위해 쉽게 '몸'을 버릴 수 있다는 귀스타브의 그 이야기는,그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이미 오랜 역사를 통하여 알 듯이 시시때때로 '인종청소'나 '대량학살'의 비극으로 번지기도 했던 것이다.
원동업 S · 논술 선임연구원 iskarma@hanmail.net
가 "여기 컵과 물이 있어. 육체가 컵이라면 정신은 물이야. 컵이 없으면 물이 계속 흐르듯이,육체가 없으면 정신은 자유로워져." …(중략)…
"그렇다고 해서 육체를 없애 버릴 수는 없어. 그건 죽음이야."
"꼭 그렇지는 않아. 우리는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육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 뇌를 따로 떼어내어 영양액 속에 보존하면 되는 거야." …(중략)…
귀스타브는 아내와 두 자녀와 비밀리에 초청된 몇몇 과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기 자신 속으로 은둔하기 위한 수술을 받았다.
완전한 은둔자가 되기 위해,외과에서 시술할 수 있는 모든 절제 수술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전신 절제를 선택했던 것이다. …(중략)…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자 부속물들은 말끔히 제거되고 진짜 뇌라고 할 만한 것만 남았다.
끄트머리만 남은 경동맥을 통해 영양액 속의 당분과 산소를 직접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중략)…
"아빠는 돌아가신 거야?" …(중략)…
"아냐. 아빠는 여전히 살아 계셔. 단지 모습이 달라졌을 뿐이야." …(중략)…
"저 뇌가 보이지? 저기 표본병 속에 들어 있는 것 말이다. 저것은 80년 전부터 명상을 계속하고 있는 네 할아버지의 뇌다. 네가 책임지고 저것을 보살피거라.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때때로 영양액을 갈아주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귀스타브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수십 년의 시간을 유익하게 활용해 인간의 사고와 관련된 많은 비밀을 알아냈다.
그는 뇌로만 남음으로써 완전한 묵상에 들어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명을 연장하기까지 했다. …(중략)…
쓰레기통에 뇌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턱이 없는 빌리 아버지는 그것을 가지고 내려가 집 앞에 놓인 쓰레기 수거함에 비워 버렸다.
영양액을 잃은 귀스타브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었다.
거리를 떠돌던 개 한 마리가 냄새를 맡고 와서 그를 쓰레기 수거함에서 끌어냈다.
세상의 모든 은둔 수행자들 가운데 가장 완전하고 가장 연륜이 깊은 귀스타브 루블레를 궁지에서 건져낸 것이다.
하지만 개에게는 그 뇌가 한낱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귀스타브는 허망하게 개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으로 떠났던 한 남자의 깊디깊은 사유는 그렇게 끝이 났다. …(중략)…
개는 식사를 끝내고 가볍게 트림을 하였다.
그리하여 귀스타브 루블레의 사유 중에서 아직 남아 있던 것들이 모두 저녁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완전한 은둔자」
나 소크라테스; 그렇지만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되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중략)…
갖바치가 굽은 칼과 곧은 칼 및 다른 도구들로 자르듯이 말일세. …(중략)…
그러니 사용하고 자르는 사람 다르고,자를 때 사용되는 것 다르지? …(중략)…
그러면 우리는 갖바치에 대해서 뭐라 말하지?
도구만 사용해서 자른다고 말하나,아니면 손도 사용해서 자른다고 말하나?
알키비아데스; 손도죠.
소크라테스; 그러니 그는 손도 사용하는 것인가? …(중략)… 눈도 사용해서 신발을 만드는가? …(중략)… 그런데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되는 것들이 다르다는 데 우리는 동의하는 것이지? …(중략)… 그러니 갖바치와 키타라 연주자는,그들이 작업할 때 사용하는 손과 눈하고는 다르지? …(중략)… 신체 전부도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지? …(중략)… 그러니 사람은 자신의 신체와 다르지? …(중략)… 그러면 도대체 사람은 무엇인가? …(중략)… 그래도 신체를 사용하는 쪽이라는 점만큼은 자네가 말할 수 있네. …(중략)… 그러니까 혼 말고 다른 무엇이 그것을 사용하겠나?
알키비아데스; 다른 것이 아니라 혼이 사용하죠.
소크라테스; 혼이 다스리면서겠지? …(중략)… 사람은 적어도 셋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지. …(중략)… 혼,신체 그리고 이 둘이 합쳐진 전제 말일세. …(중략)… 하지만 신체를 다스리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데는 우리가 동의했었지? …(중략)… 그러면 신체가 바로 스스로를 다스리는가?
알키비아데스; 전혀요.
소크라테스; 그것은 다스려진다고 우리가 말하기 때문일세. …(중략)… 그러니 이것만큼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아니군. …(중략)… 그렇기 때문에 둘이 합쳐진 것이 신체를 지배하며,이것이 사람인 것인가?
알키비아데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만.
소크라테스; 무엇보다도 그것은 아닐 걸세. 어느 한쪽이 다스림에 참여하지 않는다면,둘이 합쳐진 것이 다스릴 방도는 전혀 없을 테니까. …(중략)… 사람은 신체도,둘이 합쳐진 것도 아니니,내 생각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거나,그것이 무엇이기는 하다면 혼 말고 다른 게 결코 아니라는 결론이 남는군.
알키비아데스; 바로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니 아직까지도 혼이 사람이라는 것에 관해 이 이상 분명하게 자네에게 논증할 필요가 있겠는가? …(중략)… 그러니 자신을 알라고 명하는 자는 우리에게 혼을 알라고 시키는 걸세. …(중략)… 그러니 신체에 속하는 것들 중에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은 자신에 속하는 것들을 아는 사람이지,자신을 아는 사람은 아닐세.
-플라톤,「알키비아데스 Ⅰ」
다 팔꿈치에 난 찰상으로 인해서 따가운 통증을 느끼게 되고,식중독에 걸리면 복통과 메스꺼움이 뒤따른다.
당신의 망막에 빛이 투사되면 시각 경험을 가지게 되고,주위의 사물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감각 표피가 자극을 받으면 여러 가지의 심적 사건들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멀리 있는 원인들이고,심적 사건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두뇌 상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마취가 작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감각 기관의 말초 신경으로부터 오는 신경 신호가 차단되거나,두뇌의 정상적인 기능이 방해를 받아서 중추 신경이 마비가 되면,어떠한 고통도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정신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것의 가장 근접한 물리적인 기반으로서 두뇌 상태(또는 중추 신경계)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심성의 존재가 적절한 신경 구조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지지해 주는 증거가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두뇌를 이루는 분자를 모두 제거해 버리면,그의 정신생활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그 사람의 신체를 이루는 모든 분자를 제거해 버리면,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적어도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권,「심리철학」
⊙ 갇힌 논제,권투의 링,축구의 규칙
현행 대입 논술고사의 경우,제시문과 논제가 제시된다. 답안 서술 분량은 짧게는 300자,길어야 1,200자 안팎이다.
제시문은 대개 2개 이상이고(여러 표,그래프,사진 등이 포함되기도 하며),논제는 순차적으로 제시된다.
설명 · 요약하라로 시작해 제시문들을 비교하라든가 [가]의 관점을 가지고 [나]의 글을 보라든가 하여 전개된다.
그러니 논술평가의 주안점은 제시문 이해도를 측정하고,원리나 이론을 파악하여 이를 구체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에 맞추어진다.
물론 논술문제이니 만큼 '논하라''서술하라' 혹은 '타당성을 살펴라' 등으로 논제는 최종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 지시가 "자신의 견해를 가미해 대상을 자유롭게 판단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곧 낭패를 만나게 된다.
"[가]에서의 제안을 실현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시오"라는 논제에는 "[다] [라] [마] [바]의 핵심내용을 기초로"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가 쓰는 논술은 '닫힌 논제'라고 해야 할 것인데 이를 족쇄나 쇠우리처럼 생각할 일은 아니다.
권투에서의 링,축구에서의 규칙이라 받아들이자.
서강대 수시논술에 임하는 전략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문제 3>
제시문 [나]와 [다]를 비교한 후,이를 바탕으로 제시문 [가]의 귀스타브가 처한 모순적 상황에 대해 논하라. (40%,1,000~1,200자)
⊙ 논제의 분석을 통한 글의 뼈대 잡기
논술은 사고의 논리적 과정,자체이다.
다루는 내용의 조건과 상황을 전제로 어떠한 근거를 뒷받침하고,어떤 가치를 향해 나의 판단이 진행되어 왔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론이 위에서 언급한 대학의 논술조건에서 적용되어야 한다.
어떤 전략을 써야 할까?
제시문은 세심하게 분석,판단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다루는 내용의 범주가 정해지고,전제와 조건 혹은 근거로 사용될 자료들이 마련되며,어떤 과제를 해결할 것인지도 알게된다.
이때 이런 글감들의 배치,즉 구성을 결정짓는 것은 문제를 풀어가는 방향을 일러주는 '논제(문제)'이다.
우선 논제 분석으로 전체 흐름을 짜보자.
(1) 제시문 [나]와 [다]를 비교한 후,이를 바탕으로:
'비교(比較)'란 견주어보는 것이다. 둘 이상을 번갈아 보게 되면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알게 된다.
차이를 드러내야 비로소 둘이 달리 존재하는 것(種)의 의미를 명징하게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공통점을 검토해야 둘이 속한 곳(類)을 알 수 있다.
달걀은 '오리가 아닌 '닭'이 낳은 것이며,새에서 태어나 배꼽을 찾아볼 수 없는 생명체'로 정의할 수 있는데,이처럼 종차(種差)와 동류(同類)를 통해 대상은 정의(定意,difine)된다. (비교에서 두 가닥,글이 엮여 나온다).
'바탕'이란 '직물이나 물체의 바닥 또는 빛깔',혹은 '삶의 타고난 성질이나 재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바탕하여 보라'는 것은 관점을 가지고,달리 말하면 원리(原理)로 작용시켜 보라는 것이다.
마치 규칙을 안에 담고 있는 상자(함수 · 函數)처럼 [가]를 [나]와 [다]의 원리를 통해 보면,예측 가능하게 해석된다는 의미다.
그러니 [나]와 [다]는 단순 요약이 아니라 그 원리를 개념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귀스타브가 처한 상황이 장악된다.
(2) 제시문 [가]의 귀스타브가 처한 모순적 상황에 대해서;
'모순'이란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할 수는 없는 상태,즉 제시된 명제들이 상호 일치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때 모순적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귀스타브'임을 분명히 하자. (따라서 모순된 상태를 밝혀주는 것이 다시 한 가닥)
(3) 논하라;
논(論)은 논술(論述)이거나,평론(評論)이거나,혹은 둘 다이다. ('평하라'고 하는 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론은 사물의 질이나 '가치'에 대하여 비평하는 것이고,논술은 현실경험과의 합치성 혹은 이론적 정합성(합리성) 등을 검토하면서 나아가는 사고 과정이다. (그러니 논하라는 말은 최소 두 가닥의 글갈래가 있음을 말한다.)
분량을 보자. 1,000자를 쓴다면 답안은 200자씩 다섯 문단,1,200자를 쓴다면 240자씩 다섯 문단이다.
문단 수의 차이가 있고,각 문단의 길이 역시 여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그 안에는 위와 같은 내용을 오롯하게 채워야 한다.
"쓸 내용이 없어요,써도써도 망망한 바다 같아요!"하는 호소를 원고지를 앞에 둔 학생들은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이 구조를 만들어놓고 보면,말할 것에 비해 공간은 너무나, 오히려,작다.
⊙ 뼈대를 채우는 답안의 내용들
제시문을 독해할 때 주의할 것이 있다.
글이 최종적으로 주장하는 바를 알아내는 데 목적을 두지 말고,그 주장이 나오는 과정 전체를 따라가야 한다는 점이다.
즉 그의 근거와 전제를 바로 살펴야 주장의 타당성을 살필 여지가 생긴다.
이런 점에 주의하며,[나]와 [다]를 읽자.
[나]는 혼이 주체가 되어 신체를 지배하고,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라 본다.
굽은 칼이 스스로를 움직이지 못하는데,이는 쓰는 이와 쓰임을 당하는 것이 달라 그런 것이며,신체 역시 스스로를 직접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므로 혼의 부림을 받는 쪽이라는 것이다.
[다]는 피부며 망막 같은 곳의 자극을 통해서만 느낌과 경험,즉 정신활동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두뇌라는 분자 구조물을 없애면 즉시 정신활동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데,이로써 '심성'이 육체의 일부(두뇌)에 의존한다는 점이 증명된다고 언급한다.
그러니 [다]에 의해 즉각적으로 귀스타브의 상황은 정리된다.
귀스타브는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육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하고 말한다.
하지만 당장 두뇌가 개에게 먹혀버리자 그의 사유는 끝장난다.
"육체가 없으면 자유로워져."하고 선언했지만 자유는커녕 제 한 몸을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급락한다.
[나]에 의해서도 귀스타브는 터무니없는 존재다.
소크라테스는 신체와 도구의 지배자로서 혼을 명명하지만 귀스타브의 '정신'은 온도와 영양액에 불안정하게 의존하는 존재이다.
'가장 완전하고 가장 연륜 깊은 수행자'는 심지어 아들에게조차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겨우 개의 배만을 채웠던 것이다. 그것도 그가 '고기덩이'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귀스타브의 '모순된 상황'이다.
물론,인간이 가진 놀라운 '정신 영역'을 육체(물질)와 구별하고자 하는 욕구는 당연하고,또 타당한 면이 있다.
측은지심을 느끼고,아름다움을 창조하며,원과 지름의 비율을 소수점 507자리까지 (순전히 머리로) 계산해 낼 수 있는 지적 능력을,인간의 본질로 보자는 데서 '진실'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물질적인 것으로 결코 증명된 적이 없었던 신(神)의 존재,그것을 믿는 신념의 세계,그것은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 곁에 '실재'하는가.
그래서 귀스타프는 더 나아가,이 자유로운 물(정신)을 위해 컵(몸)을 깨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는 마치 로빈슨 크루소처럼 "아무것도 없이 무인도에서 살 수 있어!"하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오류이다. 로빈슨은 문명화된 인간이었기 때문에 이를 도구로 삼아,그 이성의 도구를 사용해 물건을 사용해서만,무인도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쉽게 육체와 분리해 낼 수 없음은 자명하다.
춤과 춤추는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우리는 머리에서 쉽게 원(cirle)을 그리고,이를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로 명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 원을 그리지 않을 때 '한 점과 그로부터 같은 거리의 점들의 집합'은 무수한 다른 점들과 구별되지 아니한 채로 섞여있기도 한 것이다.
나아가면,"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쉽게 폭력적인 명제로 변질된다.
정신의 존귀함을 홀로 강조할 때 차별과 배제는 잉태된다.
'이성'을 갖지 못하는 동물들,나무들 같은 자연이 조금만 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못 배운 이들,지적 장애를 가진 인간들조차 물건과 같은 차원에 놓인다.
아름답고 거대한 바미안의 부처를 로켓포로 부숴버린 것은 이슬람 원리주의 탈레반이었다.
그들은 '우상을 두지 말라'는 '말씀'을 '돌부처' 파괴의 이유로 삼았다.
인간들이 어떤 행위에 갖다붙이는 거대담론인 '계급해방' '민족통일',혹은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이름을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그건 작은 우리들 '머리' 속에 있다. 뜨거운 피와 똑같이 쿵쾅거리는 심장이,우리의 '몸' 안에 있는 것에 반해서….
'머리'를 위해 쉽게 '몸'을 버릴 수 있다는 귀스타브의 그 이야기는,그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이미 오랜 역사를 통하여 알 듯이 시시때때로 '인종청소'나 '대량학살'의 비극으로 번지기도 했던 것이다.
원동업 S · 논술 선임연구원 iskarm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