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역사공동연구委 합의… 근·현대사 문제 등 이견은 여전
일본이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任那)일본부' 학설이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만든 한 · 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위원장 조광)는 최근 "일본의 야마토 정권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 있지만 임나일본부라는 공식 본부를 설치해 지배활동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이 위원회는 또 일본서기 기록 중에 왜(倭)가 가야 7국을 평정했다는 내용은 사실로 볼 수 없으며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데 입장을 같이 했다.
⊙ 임나일본부 지배는 없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식민사관의 대표적 이론으로 꼽힌다.
이 학설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日鮮)동조론'과 함께 일제 36년간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된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보수 우익세력을 비롯한 일본 역사학계의 주류세력들은 여전히 이 이론을 내세워 한국을 공격하곤 했다.
임나일본부의 근간은 일본의 고대왕조인 야마토 왜(倭)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를 지배하면서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세웠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통치자였던 신공황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됐으며 이 일본부가 나중에 신라를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론들이 줄기차게 제기됐다.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가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임나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이들은 더욱이 한국의 역사는 태생적으로 외세의 간섭을 받으면서 발전했다는 이른바 타율성 이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런 학설을 등에 업고 후소샤 등이 만드는 일본의 일부 역사 교과서는 마치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존재했던 것처럼 버젓이 역사 교과서에 기록하기도 했다.
이 학설의 허구성을 입증하기 위한 한국 역사학계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 한 · 일역사공동위원회의 연구 합의에서 일본의 야마토 정권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도 있지만 임나일본부라는 공식 본부를 설치해 지배활동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 임나일본부는 완전히 사라졌다?
임나일본부는 적어도 용어 자체에 문제가 적지 않다는 점을 역사 연구자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관련 기록을 받아들이면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4~6세기 무렵에 지금의 한반도 남부 가야 지방에 설치한 식민지 경영 기관이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된 것은 8세기 후반이므로 임나일본부는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이번 한 · 일공동연구위의 성과에 대해 관련 학계 다수가 "새삼스런 내용도 아닌데 웬 성과냐"는 식으로 반응한 것은 이 용어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히 퇴출될 것으로 보는 역사연구자는 드물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습을 바꾼 다른 '임나일본부'가 엄존하기 때문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활동한 왜국을 백제의 용병으로 보는 백제군 사령부설이 존재했다.
국내에서 김현구 고려대 교수 같은 이는 백제를 지원한 왜계 관료 집단으로 보며,김태식 홍익대 교수는 그것을 운영한 주체를 가야,그 중 안라(安羅)로 바꿔 해석한다.
반면 이희진 서강대 강사는 임나 주재 왜의 대표부와 같은 성격을 지닌 기관으로 본다.
일본에서는 왜의 대(對)한반도 교역 기관설이라는 주장이 많은 편이며,이 외에도 왜인들의 자치기관 설(이노우에 히데오),왜의 사신으로 보는 설(우케다 마사유키) 등이 있다. 요컨대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기는 해도,그것을 이처럼 다양하게 해석한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당분간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 현대사 문제 등 미해결 과제 많아
한편 양국 학자들은 이번 합의에서 조선을 침략했던 왜구에 조선인이 포함됐다는 일본 측 교과서의 기술내용이 사실이 아니며 왜구는 대마도와 일본 본토 해안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었다는 데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한 · 일 학자들은 일본의 벼농사와 금속문화가 한반도에서 전래했다는 사실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하지만 을사늑약의 성격이나 일제 강점기 노동자 강제동원 등 쟁점이 됐던 근 · 현대사 부분에서는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일본 학자들은 이번에도 한 · 일 강제병합조약이 국제법적으로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 측은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주장한 반면 한국 측은 '기록은 없으나 분명히 증언이 있다. 이것도 역사 자료로 사료화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한 · 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이 같은 내용의 최종 연구결과를 23일 양국 정부에 제출했다.
보고서는 고대,중세,근대에 걸쳐 48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모두 4000쪽에 달한다.
한 · 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01년 10월 양국 정상의 합의로 발족했다.
2005년 5월 3년간의 1기 활동을 마치고 2007년 6월 제2기 활동을 시작했다.
조광 공동연구위 한국 측 위원장은 일단 서로 다른 점을 확인한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제 출발점에 서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한 · 일간의 역사는 그만큼 해결할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ohchoon@hankyung.com
일본이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任那)일본부' 학설이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만든 한 · 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위원장 조광)는 최근 "일본의 야마토 정권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 있지만 임나일본부라는 공식 본부를 설치해 지배활동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이 위원회는 또 일본서기 기록 중에 왜(倭)가 가야 7국을 평정했다는 내용은 사실로 볼 수 없으며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데 입장을 같이 했다.
⊙ 임나일본부 지배는 없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식민사관의 대표적 이론으로 꼽힌다.
이 학설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日鮮)동조론'과 함께 일제 36년간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된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보수 우익세력을 비롯한 일본 역사학계의 주류세력들은 여전히 이 이론을 내세워 한국을 공격하곤 했다.
임나일본부의 근간은 일본의 고대왕조인 야마토 왜(倭)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를 지배하면서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세웠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통치자였던 신공황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됐으며 이 일본부가 나중에 신라를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론들이 줄기차게 제기됐다.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가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임나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이들은 더욱이 한국의 역사는 태생적으로 외세의 간섭을 받으면서 발전했다는 이른바 타율성 이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런 학설을 등에 업고 후소샤 등이 만드는 일본의 일부 역사 교과서는 마치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존재했던 것처럼 버젓이 역사 교과서에 기록하기도 했다.
이 학설의 허구성을 입증하기 위한 한국 역사학계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 한 · 일역사공동위원회의 연구 합의에서 일본의 야마토 정권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도 있지만 임나일본부라는 공식 본부를 설치해 지배활동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 임나일본부는 완전히 사라졌다?
임나일본부는 적어도 용어 자체에 문제가 적지 않다는 점을 역사 연구자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관련 기록을 받아들이면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4~6세기 무렵에 지금의 한반도 남부 가야 지방에 설치한 식민지 경영 기관이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된 것은 8세기 후반이므로 임나일본부는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이번 한 · 일공동연구위의 성과에 대해 관련 학계 다수가 "새삼스런 내용도 아닌데 웬 성과냐"는 식으로 반응한 것은 이 용어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히 퇴출될 것으로 보는 역사연구자는 드물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습을 바꾼 다른 '임나일본부'가 엄존하기 때문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활동한 왜국을 백제의 용병으로 보는 백제군 사령부설이 존재했다.
국내에서 김현구 고려대 교수 같은 이는 백제를 지원한 왜계 관료 집단으로 보며,김태식 홍익대 교수는 그것을 운영한 주체를 가야,그 중 안라(安羅)로 바꿔 해석한다.
반면 이희진 서강대 강사는 임나 주재 왜의 대표부와 같은 성격을 지닌 기관으로 본다.
일본에서는 왜의 대(對)한반도 교역 기관설이라는 주장이 많은 편이며,이 외에도 왜인들의 자치기관 설(이노우에 히데오),왜의 사신으로 보는 설(우케다 마사유키) 등이 있다. 요컨대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기는 해도,그것을 이처럼 다양하게 해석한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당분간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 현대사 문제 등 미해결 과제 많아
한편 양국 학자들은 이번 합의에서 조선을 침략했던 왜구에 조선인이 포함됐다는 일본 측 교과서의 기술내용이 사실이 아니며 왜구는 대마도와 일본 본토 해안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었다는 데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한 · 일 학자들은 일본의 벼농사와 금속문화가 한반도에서 전래했다는 사실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하지만 을사늑약의 성격이나 일제 강점기 노동자 강제동원 등 쟁점이 됐던 근 · 현대사 부분에서는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일본 학자들은 이번에도 한 · 일 강제병합조약이 국제법적으로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 측은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주장한 반면 한국 측은 '기록은 없으나 분명히 증언이 있다. 이것도 역사 자료로 사료화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한 · 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이 같은 내용의 최종 연구결과를 23일 양국 정부에 제출했다.
보고서는 고대,중세,근대에 걸쳐 48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모두 4000쪽에 달한다.
한 · 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01년 10월 양국 정상의 합의로 발족했다.
2005년 5월 3년간의 1기 활동을 마치고 2007년 6월 제2기 활동을 시작했다.
조광 공동연구위 한국 측 위원장은 일단 서로 다른 점을 확인한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제 출발점에 서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한 · 일간의 역사는 그만큼 해결할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