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고 축내는 공무원… 세금 안내는 국민들… 그리스 국가부도 위기설
[Focus] 경기 살리려 나라 빚 마구 늘리더니… 남유럽發 재정대란 오나
세계경제가 경기부양의 ‘덫’에 걸렸다.

각국 정부가 막대한 돈을 풀어 부양책을 쓴 덕분에 세계경제는 예상보다 빨리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경기부양을 위해 마구 늘린 나라빚이 ‘재정적자’ 위기라는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재정적자 대란의 첫 진원지로는 이른바 ‘PIIGS(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로 대표되는 남부유럽 국가들이 꼽히고 있다.

이들 국가가 유럽발 경제위기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이유는 지난해 경기부양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푼 탓에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었으나 경제기반이 탄탄하지 못해 국가신용등급이 잇따라 낮아지고 국가부도 위기까지 거론되는 악순환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12.7%(2009년 기준)에 달하고 있으며 스페인(11.4%)과 포르투갈(7%)도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이 요구하는 재정적자 상한선(3%)을 훌쩍 뛰어넘은 상태다.

특히 이 가운데 국가부도 위기설까지 나올 정도로 나라 곳간 위기가 가장 심각한 그리스의 경우 남부유럽 국가들이 어떤 과정으로 재정적자의 덫에 빠졌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그리스에선 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진 비효율과 공무원들의 부정부패, 국민들의 납세의무 인식 부족 등이 적자 탈출을 추진하는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오는 2013년까지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을 3% 이하로 낮추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그리스 안팎에선 예상하고 있다.

미국 경제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그리스의 부정부패가 어떻게 재정적자 악화의 원인이 됐는지 소개했다.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한 카페 주인은 한달전 새 식당 개점에 필요한 각종 관청의 허가를 받기 위해 뇌물로 1만유로(약 1500만원)를 공무원에게 건넸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주인은 의자와 테이블 설치 허가를 받지 못해 개점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공직자들은 대부분 오후 2시면 퇴근하고,대다수는 퇴근 이후 부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들은 부업으로 번 돈을 관행적으로 신고하지 않고 있어 국고가 채워지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교육과 의료 현장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 학생들은 부실한 공교육의 보충을 위해 학교 교사에게 별도로 돈을 내고 과외 수업을 받고 있다.

일선 교사들은 노골적으로 학생들에게 방과후 돈을 내고 과외를 받도록 권장하고 있고,교사는 그 수입에 대한 세금 신고를 하지 않고 자기 주머니로 넣는다.

또 공공 의료기관에서도 소비자들은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별도의 돈봉투를 의사에게 건네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리스 정치계도 뿌리깊은 정쟁과 무조건적인 포퓰리즘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 정계는 카라만키스와 파판드레우 등 두 가문이 꽉 잡고 있다.

양가는 2차대전 이후 대통령과 총리 등 요직들을 독차지하며 대립을 이어오고 있다.

선진형 정치 시스템이 거의 전무한 가운데 그리스 정부는 금융위기 이후 ‘없는 살림’에 경기부양책에만 매달리며 미봉책만을 거듭했다.

결국 정부가 막대한 재정적자에 두 손을 들며 갑작스럽게 재정적자 축소책을 발표하자 그리스 공공노조 소속 공무원 60만명은 지난 10일 24시간동안 총파업을 벌였다.

하지만 그리스 국민들은 정부와 공공노조 모두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고 그리스 언론들은 전했다.

그리스를 비롯한 남부유럽의 재정적자 위기에 유럽연합(EU)은 매우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다.

개별 국가로만 볼 때 EU 역내 총 GDP에서 이들 지역의 비중은 기껏해야 3~5% 수준에 머문다.

하지만 이 나라들이 유로존으로 묶여 있다.

16개 나라가 동시에 같은 통화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했다간 재정위기의 충격이 유로존 및 EU 전체, 나아가 세계 시장에까지 악영향을 줄 우려가 커진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로화를 국가통화로 쓰고 있는 유로존 나라들이 숙명적으로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PIIGS 국가들의 재정위기를 조기에 수습하지 못하면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안은 금융위기 충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는 실물경제로 번질 우려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EU는 가능한 한 미국 등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력으로 이번 남부유럽 재정위기 문제를 처리하려 시도 중이다.

지난 5일 캐나다에서 열렸던 G7(선진 7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참가국들은 그리스의 재정악화 문제에 대해 유럽 내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티모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은 회의가 끝난 후 “유럽 국가들이 그리스 문제를 ‘주의 깊게’ 다루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프랑스 재무장관도 “G7 회원 유럽 국가들(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은 (그리스의 재정적자 문제가) 통제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밝혀 유럽연합(EU)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내비쳤다.

이와 관련,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아이슬란드의 금융위기와 1990년대 아시아위기 땐 IMF가 재건에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그리스 문제는 EU 역내에서 처리하려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오는 11일 열리는 EU 특별정상회의는 그리스발 재정위기의 확산 여부를 가늠하는 분수령이 될 것으 보인다.

이번 회의는 지난해 12월 유럽 미니 헌법인 리스본조약 발효와 함께 EU 정상회의 상임의장(대통령)에 취임한 헤르만 판 롬파위가 소집한 것으로, 그리스의 재정적자 감축안에 대한 전체 회원국들의 승인 여부가 결정된다.

전문가들은 실제로 국가부도 위험은 없는지,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회원국이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등 금융시장의 불안감을 해소할 보다 구체적 방안이 논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리스와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의 위기는 단순한 재정적자 위기가 아니라 정치적 위기로서 EU의 대처능력을 시험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EU 27개 회원국들은 일단 그리스 지원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9일 로이터통신은 보도했다.

독일 정부의 한 관계자는 “유로존 내부에서 그리스를 지원키로 결정했다”며 “구체적인 지원 방법은 최종 결정되지 않았지만 현재로선 유로존 회원국끼리 개별적으로 그리스와 협약을 맺는 쌍무적 지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당초 EU는 그리스의 재정위기는 개별국가의 문제라며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지만 그리스발 위기가 유로화 가치와 증시를 폭락시키고 대규모 자금 유출을 초래하는 등 유로권 전체로 번질 조짐을 보이면서 태도를 바꿨다.

EU가 그리스 지원에 나설 경우 1999년 유로 단일 통화권 출범 이후 11년 만에 첫 번째로 지원하는 사례가 된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