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이나 부동산을 화폐라고 말할수 없는 이유는?

[경제교과서 친구만들기] (45) 금융 이야기 - ② 화폐의 개념과 기능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yevsky)는 평생 돈 문제에 시달렸다고 한다.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낭비벽이 심해 부모의 유산을 일찌감치 탕진하였으며 형이 죽자 형의 빚까지 떠안게 되었다.

도박중독으로 인해 빚은 갈수록 늘어났고,도스토예프스키는 원고료를 받기 위해서라도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다.

궁핍한 생활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유난히 돈에 대한 언급이 많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은 빈민가에서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죄와 벌」에서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 제1동기는 바로 돈이다.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핵심소재인 3000루블에 대한 언급이 소설 전체를 통틀어 191번이나 나오며,그 외에 돈의 액수가 언급된 것은 300번 정도라고 한다.

시베리아에서의 옥중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은 주조된 자유"라고 말했다.

이는 돈이 육체적 · 심리적 자유를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의 속박에서 일생을 보냈던 그에게 돈은 자유를 상징하는 단어였을 것이다.

돈,즉 화폐(money)란 무엇일까?

간단한 질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화폐이론의 세계적 석학들조차도 아직까지 '화폐는 이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화폐의 정의에 관해 각기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하나인 힉스(John R.Hicks)는 "화폐는 화폐가 하는 일 그 자체이다(Money is what money does)"라는 말로 화폐를 정의하는 것의 어려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화폐의 정의에 대한 통일된 정설은 없지만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용되는 돈이란 용어와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개념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사람들이 "빌 게이츠(Bill Gates)는 돈이 많다"라고 할 때 돈이 많다는 것은 그가 현금뿐 아니라 주식,채권,부동산,자동차 등 여러 가지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과 동의어로 쓰인다.

여기서의 돈은 재산(wealth)을 가리키며 화폐의 정의로서는 너무 광범위하다.

그리고 "변호사와 의사는 돈을 많이 번다"와 같은 문장에서 돈은 소득(income)을 가리킨다.

소득은 일정 기간 동안 벌어들인 수입을 의미하는 유량(flow) 개념이지만 경제학에서의 화폐는 어떤 특정시점에서 측정되는 저량(stock) 개념이다.

경제학에서의 화폐는 재산,소득과는 구별이 되는 용어다.

경제학자들은 보통 화폐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본다.

첫째,화폐는 교환의 매개수단(medium of exchange)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화폐가 없던 원시사회에서 교환은 상품과 상품을 맞바꾸는 물물교환(barter) 형태로 이뤄졌을 것이다.

물물교환이 지닌 문제점은 영국의 경제학자 제본스(William S.Jevons)가 말한 '욕망의 이중적 일치(double coincidence of wants)'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물고기를 팔아 쌀을 사고자 하는 사람은 쌀을 팔아 물고기를 사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야만 한다.

이렇게 서로 원하는 것들을 가진 사람끼리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고기를 팔아 쌀을 사고자 하는 '갑'이란 사람이 팔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쌀을 팔고자 하는 '을'을 찾아냈으나 불행히도 '을'이 원하는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옷이었다고 해보자.

이 경우에 '갑'은 옷을 팔고자 하는 누군가를 또 찾아야만 할 것이다.

'갑'이 옷을 팔고자 하는 '병'을 찾아냈지만 '병'이 원하는 것은 장신구였다면 '갑'은 다시 장신구를 파는 '정'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정'이 장신구를 팔아 물고기를 사고자 한다면 '갑'은 '정'에게 물고기를 팔아 장신구를 구입한 후 장신구를 '병'에게 팔고 그로부터 옷을 사서 마침내 '을'로부터 원하는 쌀을 구입할 수 있다.

욕망의 이중적 일치를 이루기 위한 이런 일련의 거래에서 막대한 거래비용이 소요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물교환의 불편은 화폐라는 교환의 매개수단을 이용함으로써 쉽게 해소된다.

화폐가 존재할 경우 '갑'은 물고기를 원하는 '정'에게 물고기를 팔고 화폐를 받은 다음 이 화폐를 주고 '을'로부터 원하는 쌀을 구입할 수 있다.

'을'도 '갑'으로부터 받은 화폐를 가지고 '병'으로부터 옷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화폐라는 매개수단을 사용하면 거래 쌍방의 욕구가 동시에 일치하지 않아도 교환이 쉽게 성사된다.

둘째,화폐는 회계의 단위(unit of account) 혹은 가치 척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화폐경제 아래에서는 모든 상품의 가치가 '원''달러''유로' 등과 같은 화폐단위(money unit)로 표시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를 쉽게 비교할 수 있다.

즉 화폐가 길이를 재는 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상품의 가격이 5000원이고 B라는 상품의 가격이 1만원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B가 A보다 두 배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셋째,화폐는 가치의 저장수단(store of value)으로서 기능을 수행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얻게 되는 순간 소비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품에 대한 소비욕구가 생길 때까지 돈을 가지고 있는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물건을 사는 데 이용할 수 있으므로 화폐는 가치의 저장수단이 된다.

바꿔 말하면 화폐는 현재의 구매력을 미래로 이전하는 데 사용되는 수단인 것이다.

교환의 매개수단과 회계 단위로서의 기능은 대체로 화폐만이 수행하지만 가치의 저장 수단으로서의 기능은 주식,채권,부동산 등과 같은 자산들도 수행을 한다.

주식,채권,부동산 같은 자산들은 보유하고 있으면 이자를 안겨주거나 가격이 상승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가치의 저장수단으로 화폐보다 유리하다.

그러나 화폐는 여러 가지 자산들 중에서 가장 유동성(liquidity)이 높기 때문에 가치의 저장수단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기능 가운데 교환의 매개수단과 회계 단위로서의 기능이 화폐의 본원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기능을 갖추지 못했다면 화폐라 할 수 없다.

주식이나 부동산을 화폐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은 이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폐의 본원적 기능을 중시해 화폐를 정의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화폐란 상품을 매매하고 채권 · 채무관계를 청산하는 일상거래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지불수단(generally acceptable means of payments)이다."

이는 화폐를 기능적인 측면에서 정의한 것으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정확한 정의는 아니다.

어쨌든 기능적 측면에서 바라본 정의에 의하면 화폐란 특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 일반적인 지불수단으로 통용되기만 하면 화폐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크로네시아(Micronesia)에 위치한 얩(Yap)섬에서는 과거에 직경이 몇 m에 이르는 페이(fei)라는 커다란 돌바퀴가 화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포로수용소에서는 담배가 화폐로 통용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형태가 어떻든 다른 이에게 지불했을 때 원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는 사회구성원들 간 합의가 형성된다면 화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화폐는 지금까지 크게 물품화폐→금속화폐→지폐→예금화폐→전자화폐의 형태로 발달해왔다.

1975년 '비즈니스 위크(Business Week)'는 전자 지급수단이 곧 화폐의 정의 자체에 일대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 예측했으나,불과 몇 년 후에 이 예측을 번복한 일이 있다.

현대로 들어오면서 기술의 발달로 전자화폐까지 등장하게 되었지만 익명성 보장 등의 문제로 아직까지는 지폐와 동전으로 구성되는 현금이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통용되는 교환의 매개수단으로서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주조된 자유'인 화폐가 앞으로 어떤 형태로 발달해나갈지 우리 모두 흥미롭게 지켜보도록 하자.

김훈민 KDI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