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최초 독립국됐지만 군사독재로 가난의 굴레 못벗어
[Global Issue] 아! 아이티… 카리브해 연안 흑인 노예 후예들의 서글픈 역사
대지진으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된 아이티는 카리브해에 있는 이스파뇰라섬의 서쪽 3분의 1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스파뇰라섬은 예전부터 황금이 넘치는 풍요의 땅이라고 꿈꿔져 왔지만 실상은 풍요와는 거리가 먼 눈물과 고통,빈곤으로 점철된 역사를 가진 섬이었다.

19세기 영국작가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의 주인공들이 해적이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 카리브해로 떠날 때 탄 배의 이름이 '이스파뇰라'호였고,황금을 찾아 1492년 상륙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대규모 거주지를 건설한 섬도 이스파뇰라였지만 실상 이 섬은 가장 참혹한 식민수탈의 역사가 자행된 곳이었다.

원주민의 씨가 마르고 아프리카에서 대규모 흑인 노예들이 수입돼 극한의 고통 속에 끝없는 눈물을 흘린 곳이 바로 이스파뇰라섬을 비롯한 카리브해 연안이었다.

⊙ 흑인 노예의 눈물로 시작된 끝없는 비극

아이티 대지진 참사 직후 아프리카 압둘라예 웨이드 세네갈 대통령은 "아이티 이재민에게 무상으로 땅을 주겠다"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오겠다면 제한없이 환영한다"고 밝혔다.

아이티 이재민들의 조상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스파뇰라섬으로 끌려갔던 만큼 조상들의 땅으로 귀국하겠다는 권리도 인정하겠다는 게 세네갈 정부의 설명이었다.

이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연원은 유럽의 식민지배와 노예제 플랜테이션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이스파뇰라 섬에 왔을 당시에는 '타이노'족이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 식민지배자들의 가혹한 노동을 견뎌내지 못하고 원주민이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

당시 스페인 식민지배의 잔혹상을 전한 라스카사스 신부의 증언을 보면 "스페인인들은 원주민을 어린이,임산부 가릴 것 없이 도살장에서 양을 잡는 것처럼 갈가리 찢거나 산채로 태워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이어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로 수입됐고 이들은 오늘날 카리브해 도서에 널리 퍼진 뮬라토(흑인과 백인 간 혼혈)의 선조가 됐다.

특히 16세기 유럽에서 설탕수요가 늘면서 설탕공급을 늘리기 위한 노예제 플랜테이션이 브라질을 시작으로 카리브해 곳곳으로 퍼져갔다.

당시 폭염 속에서 사탕수수를 꺾어 으깬 뒤 즙을 오랜시간 끓여야 하는 설탕제조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을 뿐 아니라 즙을 끓이기 위해 수많은 나무를 벌목해야 했던 만큼 노예제 노동을 통해서만 유지되던 상황이었다.

주로 콩고 · 기니 · 세네갈 등 아프리카 서부에서 노예들이 공급됐다.

카리브해의 지정학적 요충지 아이티는 자연스레 해상무역 중심지로 부각됐고 1697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아이티가 위치한 이스파뇰라 섬을 프랑스령 서부(현 아이티)와 스페인령 동부(현 도미니카 공화국)로 분할했다.

한때 캐나다로 이주한 프랑스인의 50% 수준에 이를 정도로 많은 프랑스인들이 아이티로 몰렸고,그들 역시 노예노동을 바탕으로 담배 · 커피 · 설탕 · 인디고 생산과 판매에 주력,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8세기 말 대서양 연안에서 거래된 흑인 노예의 3분의 1(매년 최대 4만명)이 아이티로 보내졌고 아이티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의 수가 80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 중남미 최초의 독립국,가난의 굴레는 못벗어나다

이처럼 노예 노동의 폭정 속에 고통받던 아이티는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독립국가라는 '훈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또 흑인 노예의 혁명으로 건국된 지구상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아이티는 1804년 흑인 노예들이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치는 대혁명을 통해 중남미 최초로 독립국가가 됐다.

이후 아이티는 베네수엘라 · 콜롬비아 · 에콰도르 · 파나마 · 페루 등이 독립할 수 있도록 병력과 무기,자금을 지원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처럼 이웃 도미니카와는 오랜기간 매끄럽지 못했다.

도미니카 지역이 아이티보다 기후가 좋은 데다 인종분포도 흑인 비율이 크게 적었던 점도 두 나라 간 차이를 가져왔다.

결국 19세기 중반 도미니카공화국은 한때 아이티의 통치를 받기도 했고,도미니카공화국의 독립 과정에서 다수의 아이티인이 학살되기도 했다.

독립 이후 아이티 역사도 순탄치 못해,아이티는 프랑스와 스페인 · 영국 등 열강의 침탈과 32차례의 내부 쿠데타에 시달렸다.

1910년까지 18명의 대통령 중 13명이 쿠데타로 쫓겨났고 미국은 흑인 노예들이 건국한 아이티를 50년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915년부터 1934년까지 미군의 점령 아래 들어가는 등 프랑스와 미국 등 외세의 개입이 계속됐다.

20세기 후반기엔 프랑수아 뒤발리에 장기 군사독재(1957~1986)로 수만명이 정치 탄압으로 숨지고 국가전체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 민선 대통령으로 집권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 역시 부패와 무능의 업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1991년 군부 쿠데타로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첫 번째 망명길에 오르는 사태가 발생하고 수많은 보트피플이 양산됐다.

쿠데타 세력이 수천명의 주민들을 살해하자 1994년까지 국제사회의 대대적인 징벌적 엠바고가 발동됐고,이로 인해 허약했던 아이티 경제는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았다.

아리스티드는 1994년 미국의 개입으로 정권을 되찾았지만 부정 선거와 해외 원조금 횡령 등 독재정권보다 더한 부패를 일삼다 2004년 반정부 봉기로 축출됐다.

정정불안으로 아이티는 전체 인구 900만명의 70%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서반구 최빈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2004년부터 유엔지원군이 파견돼 최소한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에는 대규모 자연재해가 빈발하며 아이티인들의 고통을 더했다.

2004년 홍수로 3000명이 사망했고,4개의 허리케인이 휩쓴 2008년엔 1000여명 사망에 8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때의 충격에서 채 회복되기도 전에 200년 만의 대지진까지 닥치면서 아이티인들은 눈물을 흘릴 사치마저 빼앗긴 참혹한 고난사를 덧붙이게 됐다.

조귀동 한국경제신문 기자 claymo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