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때 과학의 혁명이 일어난다
조선후기 문장가 유한준이 '석농화원(石農畵苑)' 발문에 쓴 글은 무척 유명해서 이곳저곳에서 자주 인용되곤 한다.
'안목(眼目)'이란 제목을 단 발문의 마지막 부분을 대략 옮기자면,'아는 만큼 사랑하게 되고,사랑하는 만큼 볼 수 있으니,그러한 사람은 남과 다르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이다.
유한준의 글이 대중적 유명세를 얻게 된 데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한몫했다.
답사기의 저자는 유한준의 원문을 변용하여,'아는 만큼 보이고,보이는 만큼 사랑한다'는 말을 통해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한준의 글이 유명해진 진정한 이유는 단순히 예술에 관한 안목으로 그 뜻이 한정되지 않고,어느 일에나 두루 적용해도 심금을 울리는 옳은 소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이가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아는 만큼 사랑하고,사랑하는 만큼 보인다'는 유한준의 문장을 인용한다.
그렇다면 이 글을 과학에 인용할 때 가장 반길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토마스 쿤(Thomas Kuhn · 1922~1996)일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원문을 약간 개작해서,'아는 만큼 믿고,믿는 만큼 보인다'로 고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과학사에는 여러 번의 분기점이 있었다.
갈릴레오,뉴턴,하이젠베르크 등 명석한 과학자들은 과학의 새로운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이들이 이뤄낸 '진리의 발견'만큼이나 놀라운 '인식 그 자체의 발견'을 한 사람은 토마스 쿤이다.
그는 1962년 발간된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目)'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렸다.
과학사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과학혁명의 구조'는 시카고대 출판부가 발간한 학술서 중 가장 널리 읽힌 책으로 이미 100만 부 이상 팔렸다.
토마스 쿤은 이 유명한 책에서 객관적 실체 진실의 발견이라는 과학의 오래된 믿음을 반박하며,패러다임의 우선성을 주장했다.
덕분에 그의 이름과 항시 짝지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패러다임(paradigm)'이다.
패러다임은 정식 규정된 번역용어는 없으나 세계관,세상을 바라보는 창,얼개,틀 정도로 이해하면 편리하다.
토마스 쿤이 주장한 '패러다임(paradigm)'의 의미와 유한준이 지은 '안목(眼目)'이라는 발문은 교묘히 잘 어울린다.
보는 '눈'이 다르니 같은 것을 관찰해도 달리 보고,(그 대상이 예술품이든 과학지식이든) 축적을 해도 달리 축적한다는 말은 패러다임의 뜻과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이해를 돕기 위해 거친 비유를 하자면,서로 다른 렌즈를 통해 사물을 관찰하기 때문에 오목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느냐,볼록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각각의 주체가 인식하는 대상의 모습은 천양지차다.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을 과학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 또는 가치 등의 전체적 집합체라고 정의하고,상이한 패러다임은 과학자로 하여금 서로 다른 세계에 살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과학혁명의 구조'가 발간되기 이전의 사람들은 실증주의 과학철학을 믿었다.
실증주의(實證主義: positivism)는 과학활동이 인간의 인식 · 가치 · 마음 등과 분리되어 자연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직접적 경험을 통해 관찰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즉,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객관적 진실 발견이 곧 과학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의 발전은 객관적 과학활동의 결과가 누적되어서 이뤄지는 점진적 과정이라고 이해되었다.
하지만 쿤은 홀로 명징하게 빛나는 객관적 진리라는 관념을 배척하였다.
그는 실증주의를 반박하면서 '구조주의'를 제시하였고,관찰과 과학 이론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하였다.
쉽게 말해,과학자가 어떠한 패러다임을 믿느냐에 따라 동일한 현상을 관찰하더라도 전혀 다른 것들을 발견하는 결과가 빚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같은 현상을 보고도 상이한 결론을 내린다.
실증주의자들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주장하였기에 이 세상의 누구와도 어렵지 않게 소통을 할 수 있다고 여긴 반면,쿤에게 있어서 패러다임이 서로 다른 사람들은 교차되지 않은 평행선을 달리는 형국이다.
쿤은 이질적 패러다임으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을 '공약 불가능성'이라고 명명하였는데,근대물리학을 배운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체운동 개념이나 천동설이 '한심할 만큼'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패러다임 간의 공약 불가능성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다르기 때문에 저 사람이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애초에 토마스 쿤이 과학 발전의 '구조'와 '패러다임'이라는 착상을 한 것도 스스로 체험한 공약 불가능성 때문이었다.
대학원 과정에서 그 원문을 접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독해하면서,쿤은 현인(賢人)이라는 중평을 듣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그렇게나 황당한 물리학 이론을 전개하였는지 좀처럼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토마스 쿤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틀(패러다임)이 근대물리학자들과는 확연히 달랐으며,쿤 스스로가 근대물리학이 마련한 패러다임을 버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녔던 패러다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일응 합리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불현듯 찾아온 이 깨달음은 쿤이 '패러다임'에 초점을 둬서 과학사를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계기가 된다.
쿤에게 과학은 더 이상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사회가 공통적으로 수용한 거대한 패러다임의 지배였다.
그리고 이러한 까닭에,과학의 발전은 누적적이거나 기존의 오류를 교정해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혁명적 · 비연속적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이 쿤의 생각이었다.
쿤은 과학의 발전을 '정상과학→위기→혁명→새로운 정상과학'의 흐름으로 이해하였다.
4단계로 이뤄지는 과학혁명의 구조는 (1)과학자 사회가 공통의 패러다임(paradigm)을 받아들여 그에 기초해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정상과학의 확립 단계 (2)정상과학의 패러다임 내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쿤이 정리한 언어에 따르자면 이상변칙:anomaly)로 인해서 기존 패러다임이 도전받는 위기(crisis)단계,(3)이러한 위기가 상당기간 지속되어 기존의 패러다임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갑자기 등장하고 여러 패러다임이 경쟁하는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단계,(4)새로운 패러다임이 과거의 패러다임을 제치고 사회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새로운 정상과학의 단계로 구성된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때 과학의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과학사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토마스 쿤에게는 지지자도 많고,비판자도 많다.
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쿤이 사용한 '패러다임'의 의미가 정확하지 않으며 '과학혁명의 구조' 저서 안에서조차 다양한 어의로 쓰임을 지적하면서 그의 주장을 여러모로 공격한다.
하지만 쿤의 이론은 과학사를 비롯한 제 학문에 크나 큰 영향을 미쳐,그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쿤의 이름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논술에서도 쿤의 저서가 인용되었는데,서울대 수시 심층면접에서는 인식의 주관성을 전달하는 지문으로 활용되었고,중앙대 2004학년도 자연계 수시에서는 쿤의 글이 직접적으로 인용되지는 않고 오히려 쿤을 비판하는 제시문이 논술 제시문으로 출제되었다.
그럼,'과학혁명의 구조'가 인용된 다음 제시문을 짧게나마 맛보기로 하자.
→기출 제시문 (서울대 2004학년도 수시 심층면접 예시문)
아주 옛적부터 사람들은 끈이나 사슬에 매달린 무거운 돌이 흔들리다가 멈추는 것을 보아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운동을 제약된 낙하(落下)운동으로,즉 무거운 돌이 그 자체의 본성(本性)에 의해 높은 위치(位置)에서 낮은 위치(位置)로 움직여 정지 상태에 이르는 운동으로 보았다.
반면, 갈릴레오는 그것을 동일한 동작이 무한정 되풀이되는 진자(振子)운동으로 보았다.
그러한 시각의 전환(轉換)이 왜 일어났을까?
그것은 갈릴레오가 돌의 움직임을 더욱 정확하게,더욱 객관적(客觀的)으로 관찰(觀察)한 데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각(知覺)도 그만큼 정확했다.
제약된 낙하(落下)운동을 진자(振子)운동으로 보는 변화(變化)는 운동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과학자들은 단지 제약된 낙하(落下)운동이나 진자(振子)운동을 볼 수 있었을 뿐이며 그보다 더 기초적이고 그들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독립된 경험을 할 수는 없었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조선후기 문장가 유한준이 '석농화원(石農畵苑)' 발문에 쓴 글은 무척 유명해서 이곳저곳에서 자주 인용되곤 한다.
'안목(眼目)'이란 제목을 단 발문의 마지막 부분을 대략 옮기자면,'아는 만큼 사랑하게 되고,사랑하는 만큼 볼 수 있으니,그러한 사람은 남과 다르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이다.
유한준의 글이 대중적 유명세를 얻게 된 데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한몫했다.
답사기의 저자는 유한준의 원문을 변용하여,'아는 만큼 보이고,보이는 만큼 사랑한다'는 말을 통해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한준의 글이 유명해진 진정한 이유는 단순히 예술에 관한 안목으로 그 뜻이 한정되지 않고,어느 일에나 두루 적용해도 심금을 울리는 옳은 소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이가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아는 만큼 사랑하고,사랑하는 만큼 보인다'는 유한준의 문장을 인용한다.
그렇다면 이 글을 과학에 인용할 때 가장 반길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토마스 쿤(Thomas Kuhn · 1922~1996)일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원문을 약간 개작해서,'아는 만큼 믿고,믿는 만큼 보인다'로 고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과학사에는 여러 번의 분기점이 있었다.
갈릴레오,뉴턴,하이젠베르크 등 명석한 과학자들은 과학의 새로운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이들이 이뤄낸 '진리의 발견'만큼이나 놀라운 '인식 그 자체의 발견'을 한 사람은 토마스 쿤이다.
그는 1962년 발간된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目)'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렸다.
과학사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과학혁명의 구조'는 시카고대 출판부가 발간한 학술서 중 가장 널리 읽힌 책으로 이미 100만 부 이상 팔렸다.
토마스 쿤은 이 유명한 책에서 객관적 실체 진실의 발견이라는 과학의 오래된 믿음을 반박하며,패러다임의 우선성을 주장했다.
덕분에 그의 이름과 항시 짝지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패러다임(paradigm)'이다.
패러다임은 정식 규정된 번역용어는 없으나 세계관,세상을 바라보는 창,얼개,틀 정도로 이해하면 편리하다.
토마스 쿤이 주장한 '패러다임(paradigm)'의 의미와 유한준이 지은 '안목(眼目)'이라는 발문은 교묘히 잘 어울린다.
보는 '눈'이 다르니 같은 것을 관찰해도 달리 보고,(그 대상이 예술품이든 과학지식이든) 축적을 해도 달리 축적한다는 말은 패러다임의 뜻과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이해를 돕기 위해 거친 비유를 하자면,서로 다른 렌즈를 통해 사물을 관찰하기 때문에 오목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느냐,볼록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각각의 주체가 인식하는 대상의 모습은 천양지차다.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을 과학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 또는 가치 등의 전체적 집합체라고 정의하고,상이한 패러다임은 과학자로 하여금 서로 다른 세계에 살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과학혁명의 구조'가 발간되기 이전의 사람들은 실증주의 과학철학을 믿었다.
실증주의(實證主義: positivism)는 과학활동이 인간의 인식 · 가치 · 마음 등과 분리되어 자연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직접적 경험을 통해 관찰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즉,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객관적 진실 발견이 곧 과학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의 발전은 객관적 과학활동의 결과가 누적되어서 이뤄지는 점진적 과정이라고 이해되었다.
하지만 쿤은 홀로 명징하게 빛나는 객관적 진리라는 관념을 배척하였다.
그는 실증주의를 반박하면서 '구조주의'를 제시하였고,관찰과 과학 이론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하였다.
쉽게 말해,과학자가 어떠한 패러다임을 믿느냐에 따라 동일한 현상을 관찰하더라도 전혀 다른 것들을 발견하는 결과가 빚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같은 현상을 보고도 상이한 결론을 내린다.
실증주의자들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주장하였기에 이 세상의 누구와도 어렵지 않게 소통을 할 수 있다고 여긴 반면,쿤에게 있어서 패러다임이 서로 다른 사람들은 교차되지 않은 평행선을 달리는 형국이다.
쿤은 이질적 패러다임으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을 '공약 불가능성'이라고 명명하였는데,근대물리학을 배운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체운동 개념이나 천동설이 '한심할 만큼'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패러다임 간의 공약 불가능성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다르기 때문에 저 사람이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애초에 토마스 쿤이 과학 발전의 '구조'와 '패러다임'이라는 착상을 한 것도 스스로 체험한 공약 불가능성 때문이었다.
대학원 과정에서 그 원문을 접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독해하면서,쿤은 현인(賢人)이라는 중평을 듣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그렇게나 황당한 물리학 이론을 전개하였는지 좀처럼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토마스 쿤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틀(패러다임)이 근대물리학자들과는 확연히 달랐으며,쿤 스스로가 근대물리학이 마련한 패러다임을 버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녔던 패러다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일응 합리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불현듯 찾아온 이 깨달음은 쿤이 '패러다임'에 초점을 둬서 과학사를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계기가 된다.
쿤에게 과학은 더 이상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사회가 공통적으로 수용한 거대한 패러다임의 지배였다.
그리고 이러한 까닭에,과학의 발전은 누적적이거나 기존의 오류를 교정해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혁명적 · 비연속적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이 쿤의 생각이었다.
쿤은 과학의 발전을 '정상과학→위기→혁명→새로운 정상과학'의 흐름으로 이해하였다.
4단계로 이뤄지는 과학혁명의 구조는 (1)과학자 사회가 공통의 패러다임(paradigm)을 받아들여 그에 기초해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정상과학의 확립 단계 (2)정상과학의 패러다임 내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쿤이 정리한 언어에 따르자면 이상변칙:anomaly)로 인해서 기존 패러다임이 도전받는 위기(crisis)단계,(3)이러한 위기가 상당기간 지속되어 기존의 패러다임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갑자기 등장하고 여러 패러다임이 경쟁하는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단계,(4)새로운 패러다임이 과거의 패러다임을 제치고 사회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새로운 정상과학의 단계로 구성된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때 과학의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과학사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토마스 쿤에게는 지지자도 많고,비판자도 많다.
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쿤이 사용한 '패러다임'의 의미가 정확하지 않으며 '과학혁명의 구조' 저서 안에서조차 다양한 어의로 쓰임을 지적하면서 그의 주장을 여러모로 공격한다.
하지만 쿤의 이론은 과학사를 비롯한 제 학문에 크나 큰 영향을 미쳐,그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쿤의 이름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논술에서도 쿤의 저서가 인용되었는데,서울대 수시 심층면접에서는 인식의 주관성을 전달하는 지문으로 활용되었고,중앙대 2004학년도 자연계 수시에서는 쿤의 글이 직접적으로 인용되지는 않고 오히려 쿤을 비판하는 제시문이 논술 제시문으로 출제되었다.
그럼,'과학혁명의 구조'가 인용된 다음 제시문을 짧게나마 맛보기로 하자.
→기출 제시문 (서울대 2004학년도 수시 심층면접 예시문)
아주 옛적부터 사람들은 끈이나 사슬에 매달린 무거운 돌이 흔들리다가 멈추는 것을 보아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운동을 제약된 낙하(落下)운동으로,즉 무거운 돌이 그 자체의 본성(本性)에 의해 높은 위치(位置)에서 낮은 위치(位置)로 움직여 정지 상태에 이르는 운동으로 보았다.
반면, 갈릴레오는 그것을 동일한 동작이 무한정 되풀이되는 진자(振子)운동으로 보았다.
그러한 시각의 전환(轉換)이 왜 일어났을까?
그것은 갈릴레오가 돌의 움직임을 더욱 정확하게,더욱 객관적(客觀的)으로 관찰(觀察)한 데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각(知覺)도 그만큼 정확했다.
제약된 낙하(落下)운동을 진자(振子)운동으로 보는 변화(變化)는 운동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과학자들은 단지 제약된 낙하(落下)운동이나 진자(振子)운동을 볼 수 있었을 뿐이며 그보다 더 기초적이고 그들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독립된 경험을 할 수는 없었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