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이기적 행위가 공공복지에 기여한다
식당을 포함해 사회 여기저기에서 '원조(元祖)' 자리를 두고 서로가 나입네 하는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경제학만큼은 그러한 쟁탈전과 무관하게 평온하다.
유독 경제학이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 까닭은 경제학의 창시자에 관해서는 도무지 분쟁의 여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 묻는다 하더라도 경제학의 원조는 아담 스미스라는 대답이 곧바로 되돌아온다.
아담 스미스가 10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은 그를 고전경제학의 창시자로 탄탄히 자리매김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은 의문이 하나 생긴다.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원조라고 한다면,아담 스미스의 원래 전공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본인이 경제학을 체계화시킨 원조라는 말인즉슨 본인은 원래 다른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지 않은가.
스코틀랜드 커콜디에서 세관 관리의 유복자로 태어난 아담 스미스는 1737년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고 1740년에서 1746년까지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뒤 1751년에 글래스고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이 때 그가 강의를 담당한 과목은 도덕철학이었다.
그의 '국부론'과 함께 유명한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 · 1759년)'은 바로 이러한 연유로 집필이 된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철학 연구를 통해 높은 명성을 얻었고 이후 글래스고 대학의 총장이 되어서까지 평생 도덕철학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다방면에 걸쳐 있었으며,특히 바클루 공작의 프랑스 여행에 동행하여 그곳의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귀국 이후 집필한 '국부론'은 그에게 불세출의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오늘날의 근대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은 한결같이 스미스의 '국부론'으로부터 출발한다.
경제학을 체계적 학문으로 정립한 '국부론'에서 가장 유명한 표현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다.
스미스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이기적 본능이 인간 행동의 원동력으로서 가장 지속적이고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개인의 이기적 행위가 종국적으로는 공공복지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 스미스 경제학의 근간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를 통해 시장의 자율적 기능이 사적 합리성 추구를 공적 합리성의 증대로 이어준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담 스미스는 18세기 당시 영국이 따르던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철저히 비판하면서 자유방임 경제정책을 주장하였다.
중상주의자들은 국가의 부강이 무역차액에 의해서 형성되는 금은의 축적에 따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무역차액 획득을 국가적 과제로 삼고 강력한 정부통제를 시행하였다.
스미스는 국가가 앞장서 이룩한 독점적 통제경제체제를 파기할 것을 주장하였고,그의 주장은 영향을 미쳐 영국을 비롯한 여러 유럽국가들은 자유통상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국부론'은 워낙 유명한 고전이라 현재까지 논술에 무수히 인용되었는데 그 일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 기출 제시문 (서울대 2008학년도 수시 논술)
분업이 이루어지면 노동의 생산력이 크게 증진된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분업의 결과 기술이 진보하고 생산이 늘어서 최하층 계급에까지 부가 확산될 수 있다.
자신이 노동하여 얻은 생산물만으로는 인간의 수많은 욕망 중 극히 일부를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늘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때 단순히 남의 박애심(博愛心)을 기대하기보다는 상대편의 자애심(自愛心)을 유발시키는 편이 한결 나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거래를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내가 필요로 하는 그것을 준다면,네가 원하는 이것을 주겠다."
인간의 욕망은 대부분 자기의 노동 생산물 가운데 소비하고 남은 잉여 부분을 다른 사람의 잉여 부분과 교환함으로써 충족된다.
☞ 기출 제시문 (성균관대학교 2007학년도 수시 논술)
노동의 생산물은 노동의 대상과 사용된 재료에 노동이 첨가된 것이다.
이 생산물 가치의 대소(大小)에 비례해서 고용주의 이윤이 크거나 작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본을 사용해서 노동을 유지하는 것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다.
따라서 그는 그 생산물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노동,즉 그 생산물이 가장 큰 양의 화폐나 다른 재화와 교환될 수 있게 하는 노동에 자기의 자본을 사용하려고 힘쓸 것이다.
그러나 한 사회의 연간수입은 그 사회의 노동의 연간 총생산물의 교환가치와 정확하게 같다.
또는 오히려 그것의 교환가치와 정확하게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본을 본국 노동의 유지에 사용하고,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다면,각 개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 수입이 가능한 한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다.
사실 그는,일반적으로 말해서,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고,공공의 이익을 그가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외국 노동보다 본국 노동의 유지를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였고,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이 경우 그는,다른 많은 경우처럼,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에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그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증진시킨다.
나는 공공이익을 위해 사업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실 상인들 사이에 이러한 허풍은 일반적인 것도 아니며,상인들은 말 몇 마디만 해도 그런 허풍을 떨지 않는다.
각 개인은 자기의 자본을 국내산업의 어느 분야에 투자하면 좋은지,그리고 어느 산업분야의 생산물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지는지에 대해,자신의 현지 상황에 근거해서 어떠한 정치가나 입법자보다도 훨씬 더 잘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 기출 제시문 (한국외국어대학교 2006학년도 정시 논술)
동물이 인간이나 동물로부터 어떤 물건을 얻으려고 한다면,그 사람 또는 그 동물의 호의를 얻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어떤 설득 방법이 없다.
강아지는 어미에게 꼬리를 치며 아양 떨고,애완용 개는 먹을 것을 원할 때 온갖 아양을 떨어 식사중인 주인의 주의를 끌려고 한다.
사람들도 자기의 동료에게 이와 같은 수법을 때때로 사용한다.
남들로 하여금 자기의 기분에 맞게 행동하도록 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을 때,사람은 남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온갖 아첨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이렇게 할 만큼의 시간 여유를 가지지 않는다.
문명사회에서 그는 항상 무수한 사람들의 협력과 원조를 필요로 하지만 그는 평생에 몇 사람의 친구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거의 모든 다른 동물 류에서 각각의 동물은 성숙하면 완전히 독립하며,자연 상태에서는 다른 동물의 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동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이것을 오직 동료의 자비에만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동료의 이기심을 자극하고 자기의 요망 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낫다.
타인에게 어떤 종류의 거래를 제의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렇게 하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면,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러한 모든 제의가 의미하는 바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호의의 대부분을 상호간에 얻어낸다.
우리가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양조장 주인,빵집 주인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한다.
☞ 기출 제시문 (고려대학교 1998학년도 정시 인문계)
각 개인이 자신의 생산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자본을 투자 · 운영하는 데 최대한 노력하고,그리하여 제품이 최대의 가치를 확보하도록 생산활동을 운용한다면,각 개인은 결국 사회 전체의 연간 소득을 늘리는 데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한 것도 아니고,또한 그가 얼마나 공익의 증대에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남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생산활동에 노력을 기울여 오직 자기 자신의 삶의 안정만을 보장하려 하고,자신의 제품이 최대의 가치를 확보하도록 생산활동을 벌임으로써 오직 자기 자신의 이윤만을 높이려 한다.
그리고 그 경우에도 다른 수많은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공익 증진의 결과를 낳는다.
공익 증진이 그의 생산활동에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전체에 언제나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공익의 증진을 의도적으로 목표로 삼을 때보다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
자신의 자본을 투자할 만한 생산활동이 무엇이며,또 그러한 생산활동이 어떻게 최상의 가치를 가지는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에 관해서는,당사자인 개인이 다른 어느 정치인이나 국회의원보다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자본을 투자하고 운영하는 문제에서 정치인이 시민 개개인을 조정하고 감독하려 한다는 것은,정치인 스스로가 전혀 불필요한 일을 하여 사서 고생하려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어느 개인에게나 어느 국가기구에도 안전하게 맡겨질 수 없는 '권위'를 정치인 자신이 가로채려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한 권위를 행사할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감히 착각할 만큼 우둔하고 자만에 찬 사람의 손에 그 권위를 쥐어주는 것보다 위험스러운 일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자본을 투자하고 운영하는 일에서 국가가 지시하고 감독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에 전혀 쓸모 없거나 오히려 해로운 '규제'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국산품이 외제품만큼 저렴한 값에 공급될 수 있다면,이러한 규제는 불필요하며,그 반대의 경우라면,이러한 규제는 해로운 것이 되고 만다.
생산비용이 구매비용보다 더 높을 때는 스스로 생산하지 말라는 것이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현명한 가장이 받들어야 할 금언이라 하겠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식당을 포함해 사회 여기저기에서 '원조(元祖)' 자리를 두고 서로가 나입네 하는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경제학만큼은 그러한 쟁탈전과 무관하게 평온하다.
유독 경제학이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 까닭은 경제학의 창시자에 관해서는 도무지 분쟁의 여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 묻는다 하더라도 경제학의 원조는 아담 스미스라는 대답이 곧바로 되돌아온다.
아담 스미스가 10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은 그를 고전경제학의 창시자로 탄탄히 자리매김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은 의문이 하나 생긴다.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원조라고 한다면,아담 스미스의 원래 전공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본인이 경제학을 체계화시킨 원조라는 말인즉슨 본인은 원래 다른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지 않은가.
스코틀랜드 커콜디에서 세관 관리의 유복자로 태어난 아담 스미스는 1737년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고 1740년에서 1746년까지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뒤 1751년에 글래스고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이 때 그가 강의를 담당한 과목은 도덕철학이었다.
그의 '국부론'과 함께 유명한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 · 1759년)'은 바로 이러한 연유로 집필이 된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철학 연구를 통해 높은 명성을 얻었고 이후 글래스고 대학의 총장이 되어서까지 평생 도덕철학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다방면에 걸쳐 있었으며,특히 바클루 공작의 프랑스 여행에 동행하여 그곳의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귀국 이후 집필한 '국부론'은 그에게 불세출의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오늘날의 근대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은 한결같이 스미스의 '국부론'으로부터 출발한다.
경제학을 체계적 학문으로 정립한 '국부론'에서 가장 유명한 표현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다.
스미스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이기적 본능이 인간 행동의 원동력으로서 가장 지속적이고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개인의 이기적 행위가 종국적으로는 공공복지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 스미스 경제학의 근간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를 통해 시장의 자율적 기능이 사적 합리성 추구를 공적 합리성의 증대로 이어준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담 스미스는 18세기 당시 영국이 따르던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철저히 비판하면서 자유방임 경제정책을 주장하였다.
중상주의자들은 국가의 부강이 무역차액에 의해서 형성되는 금은의 축적에 따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무역차액 획득을 국가적 과제로 삼고 강력한 정부통제를 시행하였다.
스미스는 국가가 앞장서 이룩한 독점적 통제경제체제를 파기할 것을 주장하였고,그의 주장은 영향을 미쳐 영국을 비롯한 여러 유럽국가들은 자유통상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국부론'은 워낙 유명한 고전이라 현재까지 논술에 무수히 인용되었는데 그 일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 기출 제시문 (서울대 2008학년도 수시 논술)
분업이 이루어지면 노동의 생산력이 크게 증진된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분업의 결과 기술이 진보하고 생산이 늘어서 최하층 계급에까지 부가 확산될 수 있다.
자신이 노동하여 얻은 생산물만으로는 인간의 수많은 욕망 중 극히 일부를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늘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때 단순히 남의 박애심(博愛心)을 기대하기보다는 상대편의 자애심(自愛心)을 유발시키는 편이 한결 나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거래를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내가 필요로 하는 그것을 준다면,네가 원하는 이것을 주겠다."
인간의 욕망은 대부분 자기의 노동 생산물 가운데 소비하고 남은 잉여 부분을 다른 사람의 잉여 부분과 교환함으로써 충족된다.
☞ 기출 제시문 (성균관대학교 2007학년도 수시 논술)
노동의 생산물은 노동의 대상과 사용된 재료에 노동이 첨가된 것이다.
이 생산물 가치의 대소(大小)에 비례해서 고용주의 이윤이 크거나 작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본을 사용해서 노동을 유지하는 것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다.
따라서 그는 그 생산물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노동,즉 그 생산물이 가장 큰 양의 화폐나 다른 재화와 교환될 수 있게 하는 노동에 자기의 자본을 사용하려고 힘쓸 것이다.
그러나 한 사회의 연간수입은 그 사회의 노동의 연간 총생산물의 교환가치와 정확하게 같다.
또는 오히려 그것의 교환가치와 정확하게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본을 본국 노동의 유지에 사용하고,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다면,각 개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 수입이 가능한 한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다.
사실 그는,일반적으로 말해서,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고,공공의 이익을 그가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외국 노동보다 본국 노동의 유지를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였고,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이 경우 그는,다른 많은 경우처럼,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에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그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증진시킨다.
나는 공공이익을 위해 사업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실 상인들 사이에 이러한 허풍은 일반적인 것도 아니며,상인들은 말 몇 마디만 해도 그런 허풍을 떨지 않는다.
각 개인은 자기의 자본을 국내산업의 어느 분야에 투자하면 좋은지,그리고 어느 산업분야의 생산물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지는지에 대해,자신의 현지 상황에 근거해서 어떠한 정치가나 입법자보다도 훨씬 더 잘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 기출 제시문 (한국외국어대학교 2006학년도 정시 논술)
동물이 인간이나 동물로부터 어떤 물건을 얻으려고 한다면,그 사람 또는 그 동물의 호의를 얻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어떤 설득 방법이 없다.
강아지는 어미에게 꼬리를 치며 아양 떨고,애완용 개는 먹을 것을 원할 때 온갖 아양을 떨어 식사중인 주인의 주의를 끌려고 한다.
사람들도 자기의 동료에게 이와 같은 수법을 때때로 사용한다.
남들로 하여금 자기의 기분에 맞게 행동하도록 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을 때,사람은 남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온갖 아첨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이렇게 할 만큼의 시간 여유를 가지지 않는다.
문명사회에서 그는 항상 무수한 사람들의 협력과 원조를 필요로 하지만 그는 평생에 몇 사람의 친구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거의 모든 다른 동물 류에서 각각의 동물은 성숙하면 완전히 독립하며,자연 상태에서는 다른 동물의 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동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이것을 오직 동료의 자비에만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동료의 이기심을 자극하고 자기의 요망 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낫다.
타인에게 어떤 종류의 거래를 제의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렇게 하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면,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러한 모든 제의가 의미하는 바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호의의 대부분을 상호간에 얻어낸다.
우리가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양조장 주인,빵집 주인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한다.
☞ 기출 제시문 (고려대학교 1998학년도 정시 인문계)
각 개인이 자신의 생산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자본을 투자 · 운영하는 데 최대한 노력하고,그리하여 제품이 최대의 가치를 확보하도록 생산활동을 운용한다면,각 개인은 결국 사회 전체의 연간 소득을 늘리는 데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한 것도 아니고,또한 그가 얼마나 공익의 증대에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남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생산활동에 노력을 기울여 오직 자기 자신의 삶의 안정만을 보장하려 하고,자신의 제품이 최대의 가치를 확보하도록 생산활동을 벌임으로써 오직 자기 자신의 이윤만을 높이려 한다.
그리고 그 경우에도 다른 수많은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공익 증진의 결과를 낳는다.
공익 증진이 그의 생산활동에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전체에 언제나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공익의 증진을 의도적으로 목표로 삼을 때보다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
자신의 자본을 투자할 만한 생산활동이 무엇이며,또 그러한 생산활동이 어떻게 최상의 가치를 가지는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에 관해서는,당사자인 개인이 다른 어느 정치인이나 국회의원보다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자본을 투자하고 운영하는 문제에서 정치인이 시민 개개인을 조정하고 감독하려 한다는 것은,정치인 스스로가 전혀 불필요한 일을 하여 사서 고생하려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어느 개인에게나 어느 국가기구에도 안전하게 맡겨질 수 없는 '권위'를 정치인 자신이 가로채려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한 권위를 행사할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감히 착각할 만큼 우둔하고 자만에 찬 사람의 손에 그 권위를 쥐어주는 것보다 위험스러운 일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자본을 투자하고 운영하는 일에서 국가가 지시하고 감독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에 전혀 쓸모 없거나 오히려 해로운 '규제'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국산품이 외제품만큼 저렴한 값에 공급될 수 있다면,이러한 규제는 불필요하며,그 반대의 경우라면,이러한 규제는 해로운 것이 되고 만다.
생산비용이 구매비용보다 더 높을 때는 스스로 생산하지 말라는 것이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현명한 가장이 받들어야 할 금언이라 하겠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