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 고전읽기] 47．토크빌「미국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인류의 거스릴수 없는 숙명”

뭐든지 원론(原論)으로 배우려고 하면 어렵다.

원체 말 많은 민주주의야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추상적 개념들이 수사학의 꽃을 피우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자니 이거는 뭐 이야기가 밑도 끝도 없이 뭉텅뭉텅 쏟아져 나와 도무지 감당이 안 된다.

민주주의 실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적당히 이론적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적당할 정도로 구체적인 학습서가 없을지 고민되는 순간이다.

만약 오랜 시간 고민했는데도 아직 마음에 드는 책을 딱히 찾지 못했다면 고민의 시간을 더 이상 늘리지 말고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뽑아 들기를 추천한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법관이었던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은 당시 신생국가였던 미국을 7개월간 여행하면서 민주주의 정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고 느낀 바를 옮겨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1835년 출간 당시부터 큰 호응을 얻었던 이 책은 앞에서 밝힌 그 ‘적당’하다는 성격 때문에 학술서로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지적을 종종 받기도 하였으나，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면서 다양한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의 풍부함과 관찰의 성실성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우수한 저작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앞에서 말한 대로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과 예증을 함께 살펴보기에는 더할 바 없는 교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토크빌이 유서 있는 집안 자제임은 당연히 눈치챘을 것이다.

이름에서부터 풍기는 것처럼 명실상부한 프랑스 대귀족이었던 토크빌은，할아버지 말레제레브가 루이 16세를 변호하다가 로베스피에르의 칼날 아래 처형되면서 친척들이 줄줄이 피의 숙청을 당한 귀족집안에서 자라났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일가친척들이 워낙 많았던 탓에 상속유산은 많아져 물질적으로는 오히려 풍족하게 컸지만 정치적 격동기에서 조심스럽게 시대를 관찰하던 토크빌은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로 성장하였다.

토크빌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항상 할아버지 말레제레브를 꼽았는데，말레제레브는 루이 16세를 변호하였지만 동시에 민주사상을 일찍이 받아들인 개혁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토크빌은，“말레제레브는 왕 앞에서는 인민을，인민 앞에서는 왕을 옹호했다．그의 위대함은 내가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또 잊을 수도 없는 본보기”라면서 그의 기백을 존경하였다.

그리고 그 역시도 꿋꿋하게 소신을 지키며 어느 한 입장에만 편향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넘나들며 세상을 날카롭게 논평하였다.

토크빌의 당차고도 예리한 시선은 ‘미국의 민주주의’ 곳곳에서 살필 수 있는데，미국 사회의 면면을 고찰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의 조건을 헤아린 대목에서 그의 명민함이 거듭 확인된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7개월 동안 미국을 돌아보고 쓴 제1권(1835년)과 5년 뒤에 출간한 제2권(1840년)으로 책이 나뉘어지는데，첫 번째 책은 미국사회의 구체적인 제도와 습속을 소개하면서 민주주의의 성공적 사례와 조건들을 고찰하였고，그에 반해 두 번째 책은 민주주의에 관해 다소 관념적으로 접근하여 체제를 분석하였다.

그래서 두 책이 동일하게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표제를 달고 있지만 방점은 각기 달리 찍힌다.

제1권은 미국사회의 특성에 관심을 둔 ‘미국의’ 민주주의이며，제2권은 민주주의 제도 그 자체의 특징에 초점을 둔 미국의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토크빌은 “평등은 역사의 섭리”라면서 민주주의로의 변화를 인류의 숙명적 노정으로 생각하였으나，당대의 정치사상가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미래 민주사회의 문제점 역시 치밀하게 파악하였다.

‘미국의 민주주의’ 안에서 미국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민주주의 적대요소로서 노예제도에 대한 남북갈등，인디언과 흑인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심각히 고려한 토크빌은 비단 미국의 사회문제를 떠나，자유의 자발적 포기，평등에 대한 열망，다수의 횡포，로비문화와 정경유착 등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날 일반적 문제점들에 관해서도 우려하였다.

책의 제목은 ‘미국의 민주주의’이지만 토크빌의 집필 목적은 ‘미국’ 그 자체에 대해서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미국이라는 하나의 좋은 예를 통해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 탐구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조건이 무엇이며，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고민된다면 토크빌의 책을 참고로 숙고의 시간을 가져보기 바란다.

☞ 기출 제시문 (한국외국어대학교 2009학년도 수시 논술)

일반적으로 뉴잉글랜드 타운에서의 생활은 행복하다.

그 정부는 주민들에 의해 운영되며，주민들의 취향에 맞는다.

그런 자치생활이 뒤흔들리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주민들의 정치교육은 오래 전부터 완벽하게 실시되어 왔다.

정치교육은 주민들이 처음 아메리카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이미 완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타당할지 모른다.

뉴잉글랜드에 계급차별의 전통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지역 사회의 어느 한편이 나머지 부분을 박해할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또한 고립된 개인들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를 잘못이 있더라도，자신들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만족감 때문에 이런 잘못은 잊히기도 한다.

비록 정부에 잘못이 있어도 사람들은 그런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민들이 실제로 정부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중략…)

뉴잉글랜드의 주민들은 타운이 자주적이고 자유롭기 때문에 타운에 애착을 갖는다.

주민들은 타운의 업무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타운은 주민들에게 복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타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참가한다.

그들은 자기 손이 닿을 수 있는 작은 영역 안에서 정부의 일을 한다.

그들은 바로 그런 형식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만약 그런 형식이 없었다면 혁명을 통해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형식의 정신을 섭취하고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되며 세력 균형 감각을 이해하게 되고 자기 의무의 본질과 자기 권리의 범위에 관해서 분명하고 현실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중략…)

아메리카에서는 국민이 입법부과 행정부의 구성원을 선출하며 법률의 모든 침해를 처벌하는 법관을 임명한다.

제도들은 원칙뿐만 아니라 결과까지도 민주적이다.

그리고 국민은 그들의 대표자들을 직접 그리고 거의 해마다 선출하는데，그것은 대표자들이 국민에 의존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국민이 실질적으로 지배권력이다.

또한 정부 형태가 대의제라고는 해도 국민의 여론，편견，이해관계 및 감정조차도 국정에 항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분명히 없다.

주권재민의 원칙이 지배하는 나라들의 경우처럼 합중국에서는 다수가 국민의 이름으로 다스린다.

그런데 이 다수는 주로 평화를 애호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이들 시민은 그 성향으로 보나 이해관계로 보나 자기 나라의 복리를 진지하게 바란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정당들의 끊임없는 선동에 접하게 되는데，이들 정당들은 시민들의 협력과 지지를 얻으려고 한다． (…중략…)

민주정치의 요체는 다수가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데 있다.

민주국가에서 다수에게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메리카 체제의 대부분은 다수의 당연한 세력을 인위적인 수단으로 강화시키려 해 왔다.

모든 정치제도들 가운데 입법부는 선출된 다수의 의지가 가장 쉽사리 지배할 수 있는 제도이다.

아메리카 인(人)들은 입법부의 구성원들을 국민이 ‘직접’ 그리고 ‘아주 짧은 임기로’ 선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것은 의원들을 선거구민들의 일반적인 신념뿐만 아니라 매일매일의 감정에 따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하 양원의 의원들은 같은 계층으로부터 뽑히고 같은 방식으로 지명된다.

그래서 양원의 의사결정은 단원제의 의사진행이나 마찬가지로 신속하고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이처럼 구성된 입법부는 정부의 거의 모든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토크빌，미국의 민주주의

홍보람 S·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