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소외는 소유 양식에서 기인한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가장 편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대조법'이다.
물론 이분법적 사고의 폐단이 우려되긴 하지만 뚜렷하고 명명백백한 대립 구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전개한 유명한 작품은 많으나 제목에서부터 시작해서 내용 모두 공히 대조법으로 일관한 책을 꼽자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가 가장 먼저 내달려 머릿속 명단의 첫 자리에 턱 앉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 1900~1980)은 이미 친숙할 만큼 친숙해진 이름이어서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등 그가 저술한 유명한 책의 제목 또한 누구에게나 눈에 익을 것이다.
하지만 친숙함과 이해의 감동은 다른 것이고,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간 이 심리학자가 파시즘의 기원 등 다양한 방면에 그의 돋보기를 들이대다 1976년 고희를 넘은 나이에 저술한 '소유냐 존재냐'는 책이 전하는 뜻과 함께 그 문학적 아름다움 역시 놀랍기에 차근차근 책장을 넘기면 새삼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소유냐 존재냐'는 제목에서 바로 짐작되듯이 책 전반에 걸쳐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대비하는 구조로 책이 전개된다.
에리히 프롬의 설명에 따르자면,존재양식은 세계와 하나가 되는 실존양식이고 소유양식은 대상화된 객체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존재양식은 자발적이고 생산적인 반면,소유양식은 수동적이고 불안하다.
존재양식은 체험과 실천을 통해 주체를 성장하게끔 하지만,소유양식은 그 무엇이든 체화(體化)하지 못하고 오로지 소유라는 변방을 떠돌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인간 소외가 바로 소유양식에서 기인한다고 진단하며 주체와 객체를 모두 사물화하는 폐단을 낳는 소유양식을 극복하라고 설파하였다.
소유양식에서는 내가 아니라 나의 소유물이 나의 존재를 정의하는 주체이기에 나의 참 존재를 찾고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존재양식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서,에리히 프롬은 그에게 영향을 준 다양한 인물들을 거론하며 그들이 사상과 인생을 통해 보여준 존재양식을 설명하고,또한 언어 구사와 학습과정 및 사랑 등 다양한 사례에서의 '존재양식'과 '소비양식'의 대조를 뚜렷이 함으로써 그의 메시지를 명확히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대조법의 문제는 이분법적 흑백사고이다.
많은 이들은 에리히 프롬이 소유와 존재를 양자택일의 대립구도로 설정한 것을 두고 그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책의 제목이 '소유냐,존재냐(To Have OR To Be)'가 아니라 '소유와 존재(To Have AND To Be)'가 옳다는 의견도 있다.
확실히 프롬이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기억의 영역과 같은 곳에서조차 대비할 때는 다소 억지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논리의 엄밀성이 떨어져 약간 실망스러운 부분도 분명 발견될지언정 현대인의 삶을 반성적으로 고찰한 책의 가치는 여전하며,소유인가 존재인가의 대립구조는 에리히 프롬이 추구한 '발화'의 노력으로 이해함이 더욱 옳을 것이다.
프롬의 문장을 읽노라면 언어가 가진 에너지가 대조법의 단점을 극복하고 프롬이 건네는 메시지가 사실은 진정 무엇인지 이해하게 해준다.
☞ 기출 제시문 1 (한양대 1999학년도 정시 논술)
산업시대 개막 이래 여러 세대들은 자연을 지배하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며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가져다 주고 방해받지 않는 개인적인 자유가 보장되리라는 약속을 믿어 왔고 그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기계 에너지와 핵 에너지가 동물의 힘과 인간의 노동력을 대치하고,컴퓨터가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는 산업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우리에게 무한한 생산과 무한한 소비의 길이 열렸으며,기술이 우리를 전능(全能)하게 하고 과학이 우리를 전지(全知)의 존재로 만들게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산업시대는 결국 이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는데 실패하였고,점점 많은 사람이 새로운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안녕을 가져다 주지 않으며 그것은 또한 행복의 길로 이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최대의 쾌락으로 가는 길조차도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사상,감정,취미가 정부와 기업 그리고,이들이 지배하는 대중 매체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 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꿈은 끝나 버렸다.
이제 우리는 사유 재산,이윤,힘을 지주(支柱)로 삼고 있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취득하는 것,소유하는 것,이윤을 남기는 것이 산업 사회에 사는 개인의 신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재산을 획득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생존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 양식을 가장 당연한 생존양식으로,심지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활 양식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사유재산,이윤,그리고 힘을 그 존재의 지주로 삼아 의지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판단이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다.
취득하고,소유하고,이윤을 남기는 것은 산업 사회에 사는 개인의 신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내가 재산을 어디서 어떻게 취득했느냐,또 그것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은 나만의 문제이다.
☞ 기출 제시문 2 (서강대 2002학년도 정시 논술)
쾌락이란 무엇인가?
이 말이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긴 하지만 가장 많이 쓰이는 용례로 볼 때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의) 능동성의 충족과는 무관한 욕망의 충족이라고 정의되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런 쾌락은 강도가 높은 것일 수도 있다.
사회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느끼는 쾌락,돈을 많이 버는 데서 느끼는 쾌락,복권이 당첨됨으로써 느끼는 쾌락,보통 말하는 성적 쾌락,맘껏 먹는 데서 느끼는 쾌락,경주에서 이기는 쾌락,음주 · 환각 · 약품 등에 의해 고양된 상태,혹은 살아 있는 것을 죽이거나 난도질하려는 격정을 충족시키는 데서 느끼는 쾌락 등이 예거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부유해지거나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바쁘다는 의미로 매우 활동적이어야 하지만 '내적 탄생(birth within)'이라는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그들은 '스릴'을 느끼고 '아주 만족하며' '절정'에 도달했다고 느낄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절정인가?
아마 흥분의 절정,만족의 절정,환각적 · 광란적 상태의 절정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은 그들의 열정이다.
그러나 이 열정은 인간적인 것이긴 하지만,그것이 본질적으로 인간 조건의 적절한 해결을 향하지 않는 한 병적인 것이다.
그러한 열정은 더욱 위대한 인간의 성장이나 힘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극단적 쾌락주의자의 쾌락,항상 새로운 물욕(物慾)의 충족,현 사회의 쾌락 등은 정도가 서로 다른 '흥분'을 일으키지만 '기쁨'을 갖다 주지는 못한다.
실상 기쁨이 없기 때문에 항상 새롭고 한층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는 3000년 전에 헤브루 인들이 처했던 상황과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 가장 사악한 죄악 중의 하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은 모든 사물의 충만함 가운데서 마음 속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다."<신명기 28:47>
기쁨은 생산 행위에 따른 부수물이다.
그것은 절정에 이르렀다가 급작스레 끝나 버리는 '절정 경험'(peak experience)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의 본질적인 능력의 생산적 표현을 동반하는 지속적 감정 상태이다.
기쁨은 순간적인 몰아(沒我)의 불꽃이 아니다. 기쁨은 존재와 함께 오는 빛이다.
쾌락과 스릴은 소위 절정에 도달하고 난 후에는 슬픔을 낳는다.
왜냐하면 스릴은 경험했지만 그 용기(容器)가 커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내적 힘은 증가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비생산적 활동의 권태를 돌파하려고 시도하였고 잠시 동안 이성과 사랑을 제외한 그의 모든 에너지를 결합하였다.
그는 인간의 힘을 벗어나 초인(超人)이 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는 승리의 순간에 도달한 것 같이 느끼지만 그 승리에는 깊은 슬픔이 뒤따른다.
그의 내부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에리히 프롬,「소유냐 존재냐」에서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가장 편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대조법'이다.
물론 이분법적 사고의 폐단이 우려되긴 하지만 뚜렷하고 명명백백한 대립 구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전개한 유명한 작품은 많으나 제목에서부터 시작해서 내용 모두 공히 대조법으로 일관한 책을 꼽자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가 가장 먼저 내달려 머릿속 명단의 첫 자리에 턱 앉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 1900~1980)은 이미 친숙할 만큼 친숙해진 이름이어서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등 그가 저술한 유명한 책의 제목 또한 누구에게나 눈에 익을 것이다.
하지만 친숙함과 이해의 감동은 다른 것이고,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간 이 심리학자가 파시즘의 기원 등 다양한 방면에 그의 돋보기를 들이대다 1976년 고희를 넘은 나이에 저술한 '소유냐 존재냐'는 책이 전하는 뜻과 함께 그 문학적 아름다움 역시 놀랍기에 차근차근 책장을 넘기면 새삼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소유냐 존재냐'는 제목에서 바로 짐작되듯이 책 전반에 걸쳐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대비하는 구조로 책이 전개된다.
에리히 프롬의 설명에 따르자면,존재양식은 세계와 하나가 되는 실존양식이고 소유양식은 대상화된 객체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존재양식은 자발적이고 생산적인 반면,소유양식은 수동적이고 불안하다.
존재양식은 체험과 실천을 통해 주체를 성장하게끔 하지만,소유양식은 그 무엇이든 체화(體化)하지 못하고 오로지 소유라는 변방을 떠돌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인간 소외가 바로 소유양식에서 기인한다고 진단하며 주체와 객체를 모두 사물화하는 폐단을 낳는 소유양식을 극복하라고 설파하였다.
소유양식에서는 내가 아니라 나의 소유물이 나의 존재를 정의하는 주체이기에 나의 참 존재를 찾고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존재양식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서,에리히 프롬은 그에게 영향을 준 다양한 인물들을 거론하며 그들이 사상과 인생을 통해 보여준 존재양식을 설명하고,또한 언어 구사와 학습과정 및 사랑 등 다양한 사례에서의 '존재양식'과 '소비양식'의 대조를 뚜렷이 함으로써 그의 메시지를 명확히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대조법의 문제는 이분법적 흑백사고이다.
많은 이들은 에리히 프롬이 소유와 존재를 양자택일의 대립구도로 설정한 것을 두고 그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책의 제목이 '소유냐,존재냐(To Have OR To Be)'가 아니라 '소유와 존재(To Have AND To Be)'가 옳다는 의견도 있다.
확실히 프롬이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기억의 영역과 같은 곳에서조차 대비할 때는 다소 억지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논리의 엄밀성이 떨어져 약간 실망스러운 부분도 분명 발견될지언정 현대인의 삶을 반성적으로 고찰한 책의 가치는 여전하며,소유인가 존재인가의 대립구조는 에리히 프롬이 추구한 '발화'의 노력으로 이해함이 더욱 옳을 것이다.
프롬의 문장을 읽노라면 언어가 가진 에너지가 대조법의 단점을 극복하고 프롬이 건네는 메시지가 사실은 진정 무엇인지 이해하게 해준다.
☞ 기출 제시문 1 (한양대 1999학년도 정시 논술)
산업시대 개막 이래 여러 세대들은 자연을 지배하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며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가져다 주고 방해받지 않는 개인적인 자유가 보장되리라는 약속을 믿어 왔고 그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기계 에너지와 핵 에너지가 동물의 힘과 인간의 노동력을 대치하고,컴퓨터가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는 산업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우리에게 무한한 생산과 무한한 소비의 길이 열렸으며,기술이 우리를 전능(全能)하게 하고 과학이 우리를 전지(全知)의 존재로 만들게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산업시대는 결국 이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는데 실패하였고,점점 많은 사람이 새로운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안녕을 가져다 주지 않으며 그것은 또한 행복의 길로 이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최대의 쾌락으로 가는 길조차도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사상,감정,취미가 정부와 기업 그리고,이들이 지배하는 대중 매체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 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꿈은 끝나 버렸다.
이제 우리는 사유 재산,이윤,힘을 지주(支柱)로 삼고 있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취득하는 것,소유하는 것,이윤을 남기는 것이 산업 사회에 사는 개인의 신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재산을 획득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생존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 양식을 가장 당연한 생존양식으로,심지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활 양식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사유재산,이윤,그리고 힘을 그 존재의 지주로 삼아 의지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판단이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다.
취득하고,소유하고,이윤을 남기는 것은 산업 사회에 사는 개인의 신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내가 재산을 어디서 어떻게 취득했느냐,또 그것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은 나만의 문제이다.
☞ 기출 제시문 2 (서강대 2002학년도 정시 논술)
쾌락이란 무엇인가?
이 말이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긴 하지만 가장 많이 쓰이는 용례로 볼 때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의) 능동성의 충족과는 무관한 욕망의 충족이라고 정의되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런 쾌락은 강도가 높은 것일 수도 있다.
사회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느끼는 쾌락,돈을 많이 버는 데서 느끼는 쾌락,복권이 당첨됨으로써 느끼는 쾌락,보통 말하는 성적 쾌락,맘껏 먹는 데서 느끼는 쾌락,경주에서 이기는 쾌락,음주 · 환각 · 약품 등에 의해 고양된 상태,혹은 살아 있는 것을 죽이거나 난도질하려는 격정을 충족시키는 데서 느끼는 쾌락 등이 예거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부유해지거나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바쁘다는 의미로 매우 활동적이어야 하지만 '내적 탄생(birth within)'이라는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그들은 '스릴'을 느끼고 '아주 만족하며' '절정'에 도달했다고 느낄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절정인가?
아마 흥분의 절정,만족의 절정,환각적 · 광란적 상태의 절정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은 그들의 열정이다.
그러나 이 열정은 인간적인 것이긴 하지만,그것이 본질적으로 인간 조건의 적절한 해결을 향하지 않는 한 병적인 것이다.
그러한 열정은 더욱 위대한 인간의 성장이나 힘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극단적 쾌락주의자의 쾌락,항상 새로운 물욕(物慾)의 충족,현 사회의 쾌락 등은 정도가 서로 다른 '흥분'을 일으키지만 '기쁨'을 갖다 주지는 못한다.
실상 기쁨이 없기 때문에 항상 새롭고 한층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는 3000년 전에 헤브루 인들이 처했던 상황과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 가장 사악한 죄악 중의 하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은 모든 사물의 충만함 가운데서 마음 속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다."<신명기 28:47>
기쁨은 생산 행위에 따른 부수물이다.
그것은 절정에 이르렀다가 급작스레 끝나 버리는 '절정 경험'(peak experience)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의 본질적인 능력의 생산적 표현을 동반하는 지속적 감정 상태이다.
기쁨은 순간적인 몰아(沒我)의 불꽃이 아니다. 기쁨은 존재와 함께 오는 빛이다.
쾌락과 스릴은 소위 절정에 도달하고 난 후에는 슬픔을 낳는다.
왜냐하면 스릴은 경험했지만 그 용기(容器)가 커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내적 힘은 증가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비생산적 활동의 권태를 돌파하려고 시도하였고 잠시 동안 이성과 사랑을 제외한 그의 모든 에너지를 결합하였다.
그는 인간의 힘을 벗어나 초인(超人)이 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는 승리의 순간에 도달한 것 같이 느끼지만 그 승리에는 깊은 슬픔이 뒤따른다.
그의 내부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에리히 프롬,「소유냐 존재냐」에서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