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국 우파 대통령·강국 좌파 외교장관 ‘절묘한 타협’

지명도 낮은 약체 지도자… 美·中에 맞설 카리스마 부족

[Global Issue] 초대 ‘EU 대통령’에 힘없는(?) 반 롬푸이 벨기에 총리
'유럽연합(EU) 대통령'으로 불리는 EU 정상회의 초대 상임의장에 헤르만 반 롬푸이 벨기에 총리(62)가 선출됐다.

리스본 조약에 따라 신설된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을 뽑기 위해 1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특별정상회의에서 반 롬푸이 벨기에 총리가 초대 의장에 선임된 것이다.

EU 외교장관격인 외교 · 안보정책 고위대표에는 영국의 캐서린 애슈턴(53)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지명됐다.

반 롬푸이 상임의장 당선인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으로서 EU의 단합과 행동을 최우선 덕목으로 삼아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리스본 조약에 따라 신설된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2년6개월 임기로 EU 정상회의를 주재하게 되며 대외적으로 EU를 대표하게 된다.

EU는 내달 1일 리스본 조약 발효에 앞서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외교대표 선출을 마침으로써 정치적 통합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됐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유럽 각국간 세력 균형에 초점을 맞추다 미국과 중국의 독주를 막기엔 역부족인 약체 지도자가 선출됐다"고 이번 인선을 평가했다.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랫동안 유럽 외교의 기본 틀로 자리잡았던 '세력균형' 정책이 21세기 '유럽합중국'의 첫 대표를 뽑는 자리에서도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 것이다.

EU의 정치통합을 목표로 삼은 리스본 조약 발효에 발맞춰 'EU 대통령(정상회의 상임의장)'과 'EU 외교장관(외교 · 안보정책 고위대표)'을 선출하기 위해 브뤼셀에서 열린 EU특별정상회의의 핵심 키워드는 여전히 '세력균형'이었다.

반 롬푸이 벨기에 총리를 초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으로 선출한 것은 유럽 내 강대국과 약소국, 좌파와 우파를 모두 만족시키는 절묘한 절충안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반면 미국과 중국에 맞서 EU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에는 지나치게 '무명'의 힘 없는 인물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EU 상임의장은 매년 4회 이상 개최되는 EU 정상회의를 주재하고 EU를 대외적으로 대표한다.

하지만 군사 · 외교 문제 등에서 실질적 권한은 없어 상징적 대표로 평가된다.

⊙ 긴 샅바싸움…전격적인 최종 선택

당초 정상회의가 EU 상임의장을 뽑는 데 지정된 날을 넘길 것이란 전망과 달리 예상보다 빨리 반 롬푸이 총리를 초대 상임의장으로 선출한 것에 대해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리스본조약 비준에 몇 년이 소요됐고, EU 상임의장 후보 선정에도 각국이 수주일간 의견을 좁히지 못했지만 일단 균형점을 찾자 최종 결정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진행됐다"고 평가했다.

앞서 정상회의 시작 전까지 EU 27개국 정상들은 리스본조약으로 신설된 두 자리를 채우는 데 정치 성향과 성별,강대국과 약소국 안배라는 어려운 문제들을 푸느라 사전 합의를 보지 못했다.

초대 상임의장으로 유력했던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유럽대륙의 대주주인 프랑스와 독일의 반대로 사실상 낙마한 뒤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실타래가 얽힌 것이다.

결국 EU 상임의장은 소국인 벨기에에서, 외교대표는 강대국이자 상임의장 자리를 놓쳐 체면을 구긴 영국에 안배하는 타협안이 선택됐다.

여기엔 지정학적 요소와 유럽 각국의 인구 분포까지 고려됐다.

영국 BBC방송은 "균형 추구가 회의의 모든 것이었다"고 전했고, 독일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소국이자 남성 우파 정치인인 롬푸이를 의장에, 대국 출신으로 좌파 여성 정치인인 애슈턴을 외교 · 안보 대표로 뽑아 각국의 요구를 골고루 반영했다"고 분석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EU 27개 회원국 중 인구가 1700만명이 넘는 국가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7개국에 불과하다"며 "강대국들에 의해 세력 균형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한 작은 국가들이 소국 출신 EU 대표를 탄생시켰다"고 설명했다.

⊙ 독자적 목소리 낼지는 미지수

그러나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반 롬푸이-애슈턴 조합'이 냉혹한 국제무대에서 유럽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을지엔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다.

두 사람 모두 그동안 유럽 정치무대에서 사실상 무명으로 주요문제를 다뤄본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롬푸이 총리는 벨기에 총리로 취임한 지 불과 11개월밖에 되지 않아 "아직 적을 만들 시간도 없었다"는 평을 받고 있고, 애슈턴 외교 대표는 영국 내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FT는 "과거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유럽과 얘기하려면 도대체 누구와 통화해야 되냐'라며 유럽의 분열상을 꼬집었지만 약체 상임의장 선출로 리스본조약 발효 후에도 여전히 키신저의 질문에 답할 수 없게 됐다"고 덧붙였다.

⊙ 반 롬푸이, 3개 국어 능통한 '재무통'

'유럽연합의 조지 워싱턴(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비유되고 있는 반 롬푸이 초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벨기에에서 '재무통'으로 유명하다.

1972년부터 3년간 벨기에 중앙은행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는 반 롬푸이는 1990년대 예산장관 재직 당시 정부 재정적자를 큰 폭으로 줄였고, 2004년 내무장관 시절에도 '관리자형 리더'로서의 자질을 발휘하며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벨기에 정가에서 주가를 높였다.

지난해 12월 포르티스은행 매각 재판개입 파문으로 물러난 이브 레테름의 뒤를 이어 올 1월 총리직에 올랐다.

영어와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등 3개 국어에 능통하며, 일본 전통시인 '하이쿠'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애슈턴, 한 · EU FTA 협상 주도

초대 EU외교 · 안보정책 고위대표로 선출된 애슈턴 EU 통상담당 집행위원(53)은 1977년부터 10여년간 핵무기 철폐와 장애인 차별 반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다섯 자녀 중 3명은 입양했을 정도로 아동보호에도 관심이 높다.

1999년 노동당 상원의원이 되면서 정치가의 길에 들어선 애슈턴은 지난해 10월 피터 만델슨(현 영국 산업장관)의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으로 임명되면서 EU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애슈턴은 외교가로서의 경험이 없다거나 여성이라서 어부지리로 자리를 얻었다는 지적엔 강력히 반발한다.

19일 기자회견에선 "내가 하는 일로 나를 평가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애슈턴이 외교대표로 뽑힌 것은 한국에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본인 스스로 한 · EU FTA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지난달 15일 가서명까지 마친 점을 최대 치적으로 꼽고 있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