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모두에게 평등한 위험의 사회다?
곧 있으면 연말이다.
구태여 달력을 헤아리지 않더라도 그 끝이 더욱 맵싸하게 날카로워진 겨울바람이 2009년이 채 50일도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다.
2009년 무슨 일이 있었나를 곱씹어보며 시선을 안으로 돌리다가도 이제 각종 단체에서 연이어 발표할 어록들에 대한 관심이 다시 눈을 바깥으로 향하게 한다.
연말연초에는 늘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조망하는 표현들이 이곳저곳에서 발표되곤 한다.
이번 연말에는 어떠한 표현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지,그리고 또 어떻게 새 장을 펼치는 2010년에 대한 기대를 드러낼지 궁금하다.
그런데 만약 누가 '불안'의 시대라는 화두를 던진다면 많은 이들이 유 · 무언의 공감을 나타낼 것이다.
2009년이든,2010년이든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불안에 시달린다.
어쩌면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비정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개인과 사회의 불안은 그 이유도 다양하고 모양새와 깊이도 복잡다단하다.
하지만 제각각 주관적으로 풀이하는 '불안의 시대'라는 표현은 사실 사회과학에서는 (객관적 이해를 보장하지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 일정한 의미를 획득한 용어이다.
그리고 이 용어를 사회학의 인기어로 조탁(彫琢)한 이는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1944년 출생)이다.
울리히 벡은 뮌헨 대학,뮌스터 대학,밤베르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다양한 저서를 집필하였는데,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위험사회>,<사회적 불평등의 개인화>,<해독제,조직화된 무책임성>,그리고 부인과 함께 저술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이 있다.
이 가운데 1986년 출간한 <위험사회>는 20세기 후반의 사회과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분석서로 꼽히고 있으며,이러한 평가보다 더 주목할 점은 대중적 인기가 높지 않은 사회과학서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출판한 지 5년 동안에만 약 6만권이 팔리는 등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흔히 '대중적 취향'이라고들 칭하는,가볍게 즐길 수 있는 쉽고 어수룩한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폭넓은 관심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은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전달하는 메시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였음을 방증(傍證)한다.
<위험사회>는 책 제목 그대로 현대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사회인지를 설명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은 계산 불가능하고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한 위험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위험사회이다.
사실 이 말만 굳이 발설할 필요도 없는 내용이라 단순히 이러한 분석만 하였다면 울리히 벡이 말하는 '위험사회'가 이목을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의 '위험'이 가지는 특상을 사회의 구조와 연계하여 지구화(globalization)와 함께 동시에 개인화(individualism)가 진행된 평등한 위험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하였다.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는 위험 때문에 계급을 무시하고 공평한 사회라고 말한다.
이전 사회는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하고 계급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였으나,현대사회는 만인을 똑같이 위협하는 '위험'으로 인해 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계급에 속하든 간에 저절로 평등해지는 '부정적 만민평등'의 사회이다.
<위험사회>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부분은 다음 구절로 '스모그는 민주적'이라는 기발한 표현은 이제 <위험사회>를 대표하는 상징적 구절이 되었다.
"현대 사회를 하나의 공식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즉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근대화 위험의 확장에 따라,즉 자연 건강 영양 등의 위험의 확장에 따라 사회적 차이와 한계는 상대화된다.
대단히 상이한 결과들이 이로부터 계속해서 도출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위험은 그 범위 내부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등화 효과를 보여 준다.
위험이 새로운 정치력을 갖게 되는 것은 정확히 그 같은 효과 안에서이다.
이런 점에서 위험사회는 정확히 계급사회가 아니다. 위험사회의 위험지위는 계급지위로 이해될 수 없다.
또는 그 갈등은 계급갈등으로 이해될 수 없다.
우리가 근대화 위험의 특정한 양식,특정한 분배유형을 검토해 보면 이 점은 훨씬 더 명확해진다.
위험은 지구화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산업 생산에는 생산지와는 무관하게 위해의 보편화가 수반된다.
즉 먹이사슬은 실제로 지상의 모든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연결시킨다.
먹이사슬은 국경선 아래로 숨어든다.
대기 중의 산성 성분은 조각물이나 예술 작품만을 조금씩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오래 전에 근대적인 세관의 장벽도 해체했다. (…중략…)
위험사회의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위험에 중독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사회의 동력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나는 배고프다!"
다른 한편 위험사회에서 작동하는 운동은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나는 두렵다!"
위험사회의 유형은 이런 점에서 '불안에서 비롯된 유대'가 생겨나고 정치적 힘이 되는 사회적 시기를 보여 준다."
그런데 현대사회가 단순히 전 지구적 차원의 '위험사회'라는 해석에서 책이 종결되지는 않는다.
<위험사회>의 부제(副題)는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이다.
저자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위험' 내지 '불안'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우리에게 독창적인 진단을 들려주고 싶어하기도 했지만,그가 사람들에게 더욱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새로운 근대성'을 찾자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울리히 벡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책의 표제처럼 현대는 '위험사회'이지만 이러한 위험은 근대성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나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건 등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위험'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성' 안에 내재된 모순의 결과이다.
울리히 벡은 '풍요사회'를 지향했던 기실 근대화가 '위험사회'로 귀착하면서,산업 문명이 자연과 인간의 생명을 불안하게 하는 '제조된 불확실성과 위협'을 점점 증가시켜 왔다고 설명한다.
즉 울리히 벡이 말하는 '위험'은 '근대성'을 부모로 태어난 자식이다.
현명하지 못했던 근대성 추구가 낳은 가공스러운 '위험'에 대한 공포로 사람들은 울리히 벡이 '위험의 덫'이라고 명명한 무력한 상태에 내몰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문제의 구조를 파악하여 위험을 선명히 인식하고 그에 전면적으로 대응하는 제도들을 구축해 나갈 수도 있다.
울리히 벡은 이러한 '성찰적 근대화'를 위해 구성원들의 단결과 유대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위험의 '동등함'은 '불안의 유대력'을 가능케 한다.
만약 이러한 위기의식이 사회 성원들의 비판적 의식과 참여활동으로 이어진다면 울리히 벡이 주창한 '성찰적 근대화'의 근간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 기출 제시문(동국대학교 2009학년도 수시논술)
위험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일상적 합리성과 전문가적 합리성,이해관계와 사실의-승인되지 않고 아직 발전되지 않은-공생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위험은 단순히 전자(인문과학,일상적 합리성,이해관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동시에 후자(자연과학,전문가적 합리성,사실)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도 않는다.
양자는 더 이상 특수화를 통해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각각의 합리성 기준에 따라 발전될 수도 없고 기록될 수도 없다.
위험의 결정에는 학문분과,시민집단,공장,정부와 정치 사이의 거리를 넘어선 협조가 요구되지만,그 과정에서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서로 적대적인 정의(定義)를 제출하고 자신의 정의에 따라 투쟁하는 경우가 사실 더 흔하다.
여기서 본질적이고 중요한 결론이 있다.
즉 위험을 정의함에 있어 합리성에 대한 과학의 독점이 분쇄된다.
근대성의 다양한 매개자들과 영향 받은 집단들의 주장과 이해 관계와 관점은 언제나 경쟁을 벌이고 갈등을 빚어 왔으며,이 때문에 인과관계 속에서,선동자와 상처 입은 자의 의미구조 속에서 위험을 정의해야 했다.
위험의 전문가는 없다.
많은 과학자들은 분명히 자신이 객관적으로 합리적이라고 믿는 데서 비롯되는 정서적 힘에 기반하여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며,객관적이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자신의 정의(定義)에 대한 정치적 만족에 비례하여 성장한다. (…중략…)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은 실제로 분리되지만,동시에 의존한다.
엄격히 말해서 이 같은 구분은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있다.
마치 위험에 관한 사회적 논의와 인식이 과학적 논쟁에 의존하는 것처럼,산업발전의 위험에 관한 과학적 관심은 사실상 사회적 기대와 가치평가에 의존한다.
과학적 논증과 그에 대한 과학적 비판 없이는 대중의 비판은 무디기만 하다.
사실 대중은 자신들이 비판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이나 사건이 거의 '볼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인식조차 할 수 없다.
유명한 문구를 빌려서 말하자면,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며,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
이 문구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합리성 주장들이 빈번히 경쟁한다는 것,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위해 투쟁한다는 것이다.
양 진영은 분명히 서로 다른 점에 집중하고 있다.
앞의 진영(사회적 합리성)은 산업적 생산양식의 변화를 일차적으로 강조하며,뒤의 진영(과학적 합리성)은 사고발생 가능성의 기술적(技術的) 관리능력을 일차적으로 강조한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곧 있으면 연말이다.
구태여 달력을 헤아리지 않더라도 그 끝이 더욱 맵싸하게 날카로워진 겨울바람이 2009년이 채 50일도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다.
2009년 무슨 일이 있었나를 곱씹어보며 시선을 안으로 돌리다가도 이제 각종 단체에서 연이어 발표할 어록들에 대한 관심이 다시 눈을 바깥으로 향하게 한다.
연말연초에는 늘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조망하는 표현들이 이곳저곳에서 발표되곤 한다.
이번 연말에는 어떠한 표현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지,그리고 또 어떻게 새 장을 펼치는 2010년에 대한 기대를 드러낼지 궁금하다.
그런데 만약 누가 '불안'의 시대라는 화두를 던진다면 많은 이들이 유 · 무언의 공감을 나타낼 것이다.
2009년이든,2010년이든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불안에 시달린다.
어쩌면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비정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개인과 사회의 불안은 그 이유도 다양하고 모양새와 깊이도 복잡다단하다.
하지만 제각각 주관적으로 풀이하는 '불안의 시대'라는 표현은 사실 사회과학에서는 (객관적 이해를 보장하지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 일정한 의미를 획득한 용어이다.
그리고 이 용어를 사회학의 인기어로 조탁(彫琢)한 이는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1944년 출생)이다.
울리히 벡은 뮌헨 대학,뮌스터 대학,밤베르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다양한 저서를 집필하였는데,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위험사회>,<사회적 불평등의 개인화>,<해독제,조직화된 무책임성>,그리고 부인과 함께 저술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이 있다.
이 가운데 1986년 출간한 <위험사회>는 20세기 후반의 사회과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분석서로 꼽히고 있으며,이러한 평가보다 더 주목할 점은 대중적 인기가 높지 않은 사회과학서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출판한 지 5년 동안에만 약 6만권이 팔리는 등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흔히 '대중적 취향'이라고들 칭하는,가볍게 즐길 수 있는 쉽고 어수룩한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폭넓은 관심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은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전달하는 메시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였음을 방증(傍證)한다.
<위험사회>는 책 제목 그대로 현대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사회인지를 설명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은 계산 불가능하고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한 위험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위험사회이다.
사실 이 말만 굳이 발설할 필요도 없는 내용이라 단순히 이러한 분석만 하였다면 울리히 벡이 말하는 '위험사회'가 이목을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의 '위험'이 가지는 특상을 사회의 구조와 연계하여 지구화(globalization)와 함께 동시에 개인화(individualism)가 진행된 평등한 위험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하였다.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는 위험 때문에 계급을 무시하고 공평한 사회라고 말한다.
이전 사회는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하고 계급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였으나,현대사회는 만인을 똑같이 위협하는 '위험'으로 인해 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계급에 속하든 간에 저절로 평등해지는 '부정적 만민평등'의 사회이다.
<위험사회>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부분은 다음 구절로 '스모그는 민주적'이라는 기발한 표현은 이제 <위험사회>를 대표하는 상징적 구절이 되었다.
"현대 사회를 하나의 공식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즉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근대화 위험의 확장에 따라,즉 자연 건강 영양 등의 위험의 확장에 따라 사회적 차이와 한계는 상대화된다.
대단히 상이한 결과들이 이로부터 계속해서 도출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위험은 그 범위 내부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등화 효과를 보여 준다.
위험이 새로운 정치력을 갖게 되는 것은 정확히 그 같은 효과 안에서이다.
이런 점에서 위험사회는 정확히 계급사회가 아니다. 위험사회의 위험지위는 계급지위로 이해될 수 없다.
또는 그 갈등은 계급갈등으로 이해될 수 없다.
우리가 근대화 위험의 특정한 양식,특정한 분배유형을 검토해 보면 이 점은 훨씬 더 명확해진다.
위험은 지구화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산업 생산에는 생산지와는 무관하게 위해의 보편화가 수반된다.
즉 먹이사슬은 실제로 지상의 모든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연결시킨다.
먹이사슬은 국경선 아래로 숨어든다.
대기 중의 산성 성분은 조각물이나 예술 작품만을 조금씩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오래 전에 근대적인 세관의 장벽도 해체했다. (…중략…)
위험사회의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위험에 중독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사회의 동력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나는 배고프다!"
다른 한편 위험사회에서 작동하는 운동은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나는 두렵다!"
위험사회의 유형은 이런 점에서 '불안에서 비롯된 유대'가 생겨나고 정치적 힘이 되는 사회적 시기를 보여 준다."
그런데 현대사회가 단순히 전 지구적 차원의 '위험사회'라는 해석에서 책이 종결되지는 않는다.
<위험사회>의 부제(副題)는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이다.
저자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위험' 내지 '불안'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우리에게 독창적인 진단을 들려주고 싶어하기도 했지만,그가 사람들에게 더욱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새로운 근대성'을 찾자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울리히 벡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책의 표제처럼 현대는 '위험사회'이지만 이러한 위험은 근대성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나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건 등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위험'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성' 안에 내재된 모순의 결과이다.
울리히 벡은 '풍요사회'를 지향했던 기실 근대화가 '위험사회'로 귀착하면서,산업 문명이 자연과 인간의 생명을 불안하게 하는 '제조된 불확실성과 위협'을 점점 증가시켜 왔다고 설명한다.
즉 울리히 벡이 말하는 '위험'은 '근대성'을 부모로 태어난 자식이다.
현명하지 못했던 근대성 추구가 낳은 가공스러운 '위험'에 대한 공포로 사람들은 울리히 벡이 '위험의 덫'이라고 명명한 무력한 상태에 내몰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문제의 구조를 파악하여 위험을 선명히 인식하고 그에 전면적으로 대응하는 제도들을 구축해 나갈 수도 있다.
울리히 벡은 이러한 '성찰적 근대화'를 위해 구성원들의 단결과 유대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위험의 '동등함'은 '불안의 유대력'을 가능케 한다.
만약 이러한 위기의식이 사회 성원들의 비판적 의식과 참여활동으로 이어진다면 울리히 벡이 주창한 '성찰적 근대화'의 근간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 기출 제시문(동국대학교 2009학년도 수시논술)
위험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일상적 합리성과 전문가적 합리성,이해관계와 사실의-승인되지 않고 아직 발전되지 않은-공생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위험은 단순히 전자(인문과학,일상적 합리성,이해관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동시에 후자(자연과학,전문가적 합리성,사실)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도 않는다.
양자는 더 이상 특수화를 통해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각각의 합리성 기준에 따라 발전될 수도 없고 기록될 수도 없다.
위험의 결정에는 학문분과,시민집단,공장,정부와 정치 사이의 거리를 넘어선 협조가 요구되지만,그 과정에서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서로 적대적인 정의(定義)를 제출하고 자신의 정의에 따라 투쟁하는 경우가 사실 더 흔하다.
여기서 본질적이고 중요한 결론이 있다.
즉 위험을 정의함에 있어 합리성에 대한 과학의 독점이 분쇄된다.
근대성의 다양한 매개자들과 영향 받은 집단들의 주장과 이해 관계와 관점은 언제나 경쟁을 벌이고 갈등을 빚어 왔으며,이 때문에 인과관계 속에서,선동자와 상처 입은 자의 의미구조 속에서 위험을 정의해야 했다.
위험의 전문가는 없다.
많은 과학자들은 분명히 자신이 객관적으로 합리적이라고 믿는 데서 비롯되는 정서적 힘에 기반하여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며,객관적이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자신의 정의(定義)에 대한 정치적 만족에 비례하여 성장한다. (…중략…)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은 실제로 분리되지만,동시에 의존한다.
엄격히 말해서 이 같은 구분은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있다.
마치 위험에 관한 사회적 논의와 인식이 과학적 논쟁에 의존하는 것처럼,산업발전의 위험에 관한 과학적 관심은 사실상 사회적 기대와 가치평가에 의존한다.
과학적 논증과 그에 대한 과학적 비판 없이는 대중의 비판은 무디기만 하다.
사실 대중은 자신들이 비판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이나 사건이 거의 '볼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인식조차 할 수 없다.
유명한 문구를 빌려서 말하자면,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며,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
이 문구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합리성 주장들이 빈번히 경쟁한다는 것,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위해 투쟁한다는 것이다.
양 진영은 분명히 서로 다른 점에 집중하고 있다.
앞의 진영(사회적 합리성)은 산업적 생산양식의 변화를 일차적으로 강조하며,뒤의 진영(과학적 합리성)은 사고발생 가능성의 기술적(技術的) 관리능력을 일차적으로 강조한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