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지를 당당해 하지 말라”
연전에 어떤 공대생의 항변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인즉슨,
"문과생들은 왜 공대생을 '단순무식'하다고 하느냐,이는 편견에 찬 발언이다. 우리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자연과학 내지 공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지식과 인문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의 지식 분야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과생이 공학적 지식을 모른다고 해서 무식하다며 비웃지 않는다. 하지만 문과생들은 우리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해 낯설어하면 무식하다고 폄하한다. 이는 명백히 부당한 일이다."
평소 조용하던 인물이 열변을 토로했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흥미로웠던 데다 발언의 내용 역시 의미가 깊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확실히 인문계 학생들은 스스로의 '무식'에 대해서 지나치게 당당하다.
날로 쑥쑥 발전해나가는 자연과학을 알지 못하며,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세상은 연계되어 있어 한 분야의 지식만을 빼곡히 안다고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일이고,학문의 융합 같은 거창한 것을 꿈꾸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과학적 소양은 있어야 하다 못해 영화를 보더라도 그 안에 등장한 기술과학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그리고 과학이란 터득해 나가는 과정의 기쁨이 엄청난 학문이다.
아마도 파우스트가 착실히 연구하고 있었더라면 아무리 갱년기 우울증이 심해도 메피스토필리스의 달변에 혹해서 연구소를 뛰쳐나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과학은 사람을 흡입하는 재미가 있다.
자,그럼 자연계 전공자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후안무치의 '무식'에서 벗어나려는 인문사회학도들,혹은 자신이 몸담은 자연과학에 관해 더 넓은 앎의 지평을 얻으려는 이과생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제대로 된 자연과학적 지식을 접할 수 있을까?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뭐니 해도 원전(原典)만한 것이 없다.
저자의 생생한 숨결과 치열한 탐구욕이 묻어나는 원전과 직접 부대낀다면 당신은 껑충껑충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되면 읽어야 하는 책의 가짓수가 너무 많아지고 그 방대한 양을 도저히 견디지 못해 다시 '무식'한 상태로 퇴행하려는 심리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 스스로도 '알게 된다는 것의 희열'을 좇아가면서 우리에게 과학의 원전을 핵심요지만 뽑아서 소개한 학자가 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재직 중인 존 캐리 교수는 비평가 및 방송인 등 여러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과학의 매력을 알리고자 수많은 과학 문헌 중에서 꼭 알아야 할 지식들을 가려 뽑아 모두 102편의 주요 원전을 추려낸 「지식의 원전」(The Faber book of Science)을 편찬하였다.
「지식의 원전」은 각 원전을 연대기 순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두고,원문이 시작하는 앞에는 편저자 존 캐리의 흥미로운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 때문에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과학사를 훑어 볼 수 있다.
이 책은 다 빈치의 부검일지,다윈의 진화 기행문,도킨스의 유전자 에세이 등 말로만 듣던 과학 지식의 원전을 한번에 둘러볼 수 있게 구성되어 진화론,전기의 발명,상대성이론 등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500여년간 인류가 축척해온 중대한 '지식 발견의 순간'을 과학자들이 직접 쓴 원전을 통해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데다 연구기록 외에 칼 세이건,데이비드 보더니스,아이작 아시모프 등 과학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 앞장선 학자 겸 저술가들의 기록들도 포함되어 과학사의 여러 면모를 접할 수 있다.
얼마 전 서울대학교에서는 「지식의 원전」의 저자 서문을 제시문으로 활용하여 과학에 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자는 그의 취지를 요약하도록 하는 논제와 그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본인의 생각을 쓰라는 논제를 출제하였다.
그럼 다음의 글을 읽으며 '과학적 무지'를 당당해하지 말라는 존 캐리의 외침을 곰곰이 반추해보자.
☞ 출제 제시문 (서울대학교 2008학년도 예시논술 제시문)
과학이 무신론이고 윤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견해는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하는 '문화인'들 사이에서 과학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채질하곤 했다.
이 두 가지 반감의 원인이 타당한 것인지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략…)
과학의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이다.
과학은 지식의 범주에 있지만,정치는 견해의 범주에 속한다.
정치는 좋아하느냐 마느냐를 문제 삼는 분야로,단지 말 잔치를 통해 진리의 위치로 상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정치는 인물과 웅변술에 의존하고,사회계층과 인종,그리고 민족을 핵심적인 요소로 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과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정치는 갈등을 기반으로 존재하고 적대세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대립구도가 와해된다면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즉 완벽한 의견 일치를 보이는 세상에서는 정치가 존재할 수 없다.
반면에 과학은 대립이 아닌 상호 협조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물론 과학사는 지독한 논쟁과 고뇌,그리고 반대이론의 파괴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의견 일치에 도달하면 과학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한다.
또 다른 핵심적인 차이로 정치는 인간을 구속하려 든다는 점이다.
정치의 주된 관심은 권력의 집행에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정치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전쟁,학살,테러 등)을 사용할 수도 있으며,가끔 실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열역학 제2법칙과 같은 진리를 규명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물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정반대 의미의 과학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실제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
실제로는 다른 모든 것처럼 과학도 정치에 의해 유린되고 왜곡되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호전적이고 파괴적인 도구로 사용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본질적으로 과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정치의 책임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학의 비정치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이는 과학이 초윤리적(超倫理的)이라는 비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우리는 과학의 초윤리성을 과학의 문제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과 순수성으로 인식해야 한다.
한편 정치는 윤리로부터 절대 분리될 수 없다.
정치는 창자 속의 촌충처럼 윤리성 혹은 개념의 선악을 규정함으로써 발전해간다.
따라서 과학이 초윤리적이지 않고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윤리적인 용어로 냉정하고 논리적이며 비인간적인 인생의 접근방식을 종종 '과학적'이라고 표현하는데,이는 과학적 방법을 윤리적 관점으로 단순히 연결시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학은 그것이 냉정한 것이든 아니든 윤리적 관점과의 연결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중략…)
이처럼 과학이 윤리나 종교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왜 독자들이 구태여 과학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은 과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지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는 무지일 뿐이다.
콜리지는 이러한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최초의 과학자는 관찰대상이 그에게 식량이나 피신처,무기,도구,장신구,또는 장난감을 제공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안다는 것의 희열을 찾기 위해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이었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과학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된 무지의 크기도 커졌다.
문학이나 예술분야에서만 교육받아온 사람들에게는 20세기 후반의 현대적 지식 대부분에서 몽매한 암흑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무지의 추방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의 역사상 처음으로 새로운 형태의 무지한 지식층이 생겨난 것이다. (…중략…)
영국이 경제난국에 처하지 않기 위해 과학을 계속하여야 한다는 식의 얘기는 젊은이들을 과학 분야로 끌어들이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글을 통해 기쁨과 자기 만족이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면,많은 젊은이들이 과학계통의 일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
만약 독자들이 문학교수인 내가 무슨 생각으로 각종 지식 원전을 한데 모으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기쁨과 자기 만족을 위해,그리고 콜리지의 말처럼 '알게 된다는 것의 희열'을 느끼기 위해 만들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연전에 어떤 공대생의 항변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인즉슨,
"문과생들은 왜 공대생을 '단순무식'하다고 하느냐,이는 편견에 찬 발언이다. 우리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자연과학 내지 공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지식과 인문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의 지식 분야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과생이 공학적 지식을 모른다고 해서 무식하다며 비웃지 않는다. 하지만 문과생들은 우리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해 낯설어하면 무식하다고 폄하한다. 이는 명백히 부당한 일이다."
평소 조용하던 인물이 열변을 토로했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흥미로웠던 데다 발언의 내용 역시 의미가 깊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확실히 인문계 학생들은 스스로의 '무식'에 대해서 지나치게 당당하다.
날로 쑥쑥 발전해나가는 자연과학을 알지 못하며,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세상은 연계되어 있어 한 분야의 지식만을 빼곡히 안다고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일이고,학문의 융합 같은 거창한 것을 꿈꾸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과학적 소양은 있어야 하다 못해 영화를 보더라도 그 안에 등장한 기술과학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그리고 과학이란 터득해 나가는 과정의 기쁨이 엄청난 학문이다.
아마도 파우스트가 착실히 연구하고 있었더라면 아무리 갱년기 우울증이 심해도 메피스토필리스의 달변에 혹해서 연구소를 뛰쳐나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과학은 사람을 흡입하는 재미가 있다.
자,그럼 자연계 전공자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후안무치의 '무식'에서 벗어나려는 인문사회학도들,혹은 자신이 몸담은 자연과학에 관해 더 넓은 앎의 지평을 얻으려는 이과생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제대로 된 자연과학적 지식을 접할 수 있을까?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뭐니 해도 원전(原典)만한 것이 없다.
저자의 생생한 숨결과 치열한 탐구욕이 묻어나는 원전과 직접 부대낀다면 당신은 껑충껑충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되면 읽어야 하는 책의 가짓수가 너무 많아지고 그 방대한 양을 도저히 견디지 못해 다시 '무식'한 상태로 퇴행하려는 심리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 스스로도 '알게 된다는 것의 희열'을 좇아가면서 우리에게 과학의 원전을 핵심요지만 뽑아서 소개한 학자가 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재직 중인 존 캐리 교수는 비평가 및 방송인 등 여러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과학의 매력을 알리고자 수많은 과학 문헌 중에서 꼭 알아야 할 지식들을 가려 뽑아 모두 102편의 주요 원전을 추려낸 「지식의 원전」(The Faber book of Science)을 편찬하였다.
「지식의 원전」은 각 원전을 연대기 순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두고,원문이 시작하는 앞에는 편저자 존 캐리의 흥미로운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 때문에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과학사를 훑어 볼 수 있다.
이 책은 다 빈치의 부검일지,다윈의 진화 기행문,도킨스의 유전자 에세이 등 말로만 듣던 과학 지식의 원전을 한번에 둘러볼 수 있게 구성되어 진화론,전기의 발명,상대성이론 등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500여년간 인류가 축척해온 중대한 '지식 발견의 순간'을 과학자들이 직접 쓴 원전을 통해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데다 연구기록 외에 칼 세이건,데이비드 보더니스,아이작 아시모프 등 과학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 앞장선 학자 겸 저술가들의 기록들도 포함되어 과학사의 여러 면모를 접할 수 있다.
얼마 전 서울대학교에서는 「지식의 원전」의 저자 서문을 제시문으로 활용하여 과학에 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자는 그의 취지를 요약하도록 하는 논제와 그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본인의 생각을 쓰라는 논제를 출제하였다.
그럼 다음의 글을 읽으며 '과학적 무지'를 당당해하지 말라는 존 캐리의 외침을 곰곰이 반추해보자.
☞ 출제 제시문 (서울대학교 2008학년도 예시논술 제시문)
과학이 무신론이고 윤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견해는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하는 '문화인'들 사이에서 과학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채질하곤 했다.
이 두 가지 반감의 원인이 타당한 것인지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략…)
과학의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이다.
과학은 지식의 범주에 있지만,정치는 견해의 범주에 속한다.
정치는 좋아하느냐 마느냐를 문제 삼는 분야로,단지 말 잔치를 통해 진리의 위치로 상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정치는 인물과 웅변술에 의존하고,사회계층과 인종,그리고 민족을 핵심적인 요소로 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과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정치는 갈등을 기반으로 존재하고 적대세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대립구도가 와해된다면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즉 완벽한 의견 일치를 보이는 세상에서는 정치가 존재할 수 없다.
반면에 과학은 대립이 아닌 상호 협조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물론 과학사는 지독한 논쟁과 고뇌,그리고 반대이론의 파괴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의견 일치에 도달하면 과학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한다.
또 다른 핵심적인 차이로 정치는 인간을 구속하려 든다는 점이다.
정치의 주된 관심은 권력의 집행에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정치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전쟁,학살,테러 등)을 사용할 수도 있으며,가끔 실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열역학 제2법칙과 같은 진리를 규명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물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정반대 의미의 과학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실제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
실제로는 다른 모든 것처럼 과학도 정치에 의해 유린되고 왜곡되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호전적이고 파괴적인 도구로 사용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본질적으로 과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정치의 책임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학의 비정치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이는 과학이 초윤리적(超倫理的)이라는 비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우리는 과학의 초윤리성을 과학의 문제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과 순수성으로 인식해야 한다.
한편 정치는 윤리로부터 절대 분리될 수 없다.
정치는 창자 속의 촌충처럼 윤리성 혹은 개념의 선악을 규정함으로써 발전해간다.
따라서 과학이 초윤리적이지 않고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윤리적인 용어로 냉정하고 논리적이며 비인간적인 인생의 접근방식을 종종 '과학적'이라고 표현하는데,이는 과학적 방법을 윤리적 관점으로 단순히 연결시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학은 그것이 냉정한 것이든 아니든 윤리적 관점과의 연결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중략…)
이처럼 과학이 윤리나 종교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왜 독자들이 구태여 과학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은 과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지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는 무지일 뿐이다.
콜리지는 이러한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최초의 과학자는 관찰대상이 그에게 식량이나 피신처,무기,도구,장신구,또는 장난감을 제공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안다는 것의 희열을 찾기 위해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이었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과학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된 무지의 크기도 커졌다.
문학이나 예술분야에서만 교육받아온 사람들에게는 20세기 후반의 현대적 지식 대부분에서 몽매한 암흑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무지의 추방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의 역사상 처음으로 새로운 형태의 무지한 지식층이 생겨난 것이다. (…중략…)
영국이 경제난국에 처하지 않기 위해 과학을 계속하여야 한다는 식의 얘기는 젊은이들을 과학 분야로 끌어들이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글을 통해 기쁨과 자기 만족이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면,많은 젊은이들이 과학계통의 일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
만약 독자들이 문학교수인 내가 무슨 생각으로 각종 지식 원전을 한데 모으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기쁨과 자기 만족을 위해,그리고 콜리지의 말처럼 '알게 된다는 것의 희열'을 느끼기 위해 만들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