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통합은 ‘진리의 울림’이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무척이나 꼼꼼한 사람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400년 전에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 재산의 일람표(一覽表)를 작성한 점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그는 기억,상상,이성과 같이 인간의 정신능력을 구분한 다음 이에 맞춰 제 학문을 분류한 일람표를 만들었고,본인이 작성한 일람표를 들여다보면서 결핍된 것은 무엇인지 또는 어떠한 것을 보완해야 할지 고민하며 학문 발전을 계도하고자 하였다.
혹자는 베이컨이 국회의원,검찰총장,대법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다 그만 터진 수뢰사건으로 은인자중해야 하는 신세가 되자 시간이 남아 돌아 그랬으리라는 해석도 내놓지만,아직 권세의 길을 분주히 걷고 있던 1605년에도 이미 '학문의 진보(The Advancement of Learning)'를 집필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단순한 소일거리로 인류의 학문을 구분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이유여하야 어쨌든,베이컨은 이 일로 인류 문화의 전환기를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베이컨은 '학문의 진보'와 1620년 발표한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에서 학문의 '분화'와 '전문화'를 주창하였는데,간략히 옮기자면 학문 발전을 위해서는 인류의 지식을 세분화하여 각 분야 전문가들이 담당 과목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처럼 의욕적으로 서막을 걷어 올린 근대는 곧 다재다능한 르네상스 인재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영국 땅에서 저격해 고꾸라뜨린 베이컨의 위업으로 인해 '한우물만 파라'는 교훈은 지금까지 줄곧 힘을 얻어왔다.
이를 거부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다채로운 이상을 추구하려 드는 자는 딜레탕트(dilettante)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1997년 집필된 한 권의 책은 베이컨의 분류표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새로운 르네상스의 이상을 알렸다.
근대 학문의 아버지 베이컨에게 정면 도전장을 낸 이는 사회생물학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이다.
인간 또한 생물체임에 주목하여 진화의 역사를 거쳐온 인류의 출발점을 생물학의 관점에서 조망하던 윌슨은 그의 학문적 입장을 정리한 '통섭: 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안에서 그와 함께 새로운 모험을 떠나자고 촉구한다.
베이컨이 지식의 분류를 주장했다면,윌슨은 '통섭(consilience)'이라는 독특한 단어를 통해 지식의 통합을 말한 것이다.
윌슨은 지식의 계속적인 파편화와 그로 인한 혼란을 염려하면서 학문의 미래를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지식의 대융합에서 찾는다.
통섭을 통해 지나치게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학문을 개혁하고,세계가 안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윌슨은 학문 통합은 '진리의 울림'이라고 표방한다.
윌슨은 통섭으로 인해 균형 잡힌 관점과 보다 다양화되고 심화된 지식이 가능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통섭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지적인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조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데 있다."
그는 인류발달사를 '후성규칙(epigenetic rules)'과 '유전자 · 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 개념'을 통해 설명하며 본유적 이해를 위해서는 왜 '통섭'이 필요한지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통섭'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윌슨이 말하는 대융합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개별 분과 학문들 간에는 엄격한 장벽이 세워져 있어 자유로이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이 쉽지가 않다.
각 학문의 역사적 전통과 전문직업화로 인한 진입 장벽은 무시할 수 없는 제약이다.
또한 인문학과 과학이 다른 문화라는 점을 수용하여야 하며,각 학문들이 상대 학문을 이해하려면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장은 국내에서도 최재천과 홍성욱을 필두로 활발한 논의가 오가며 수용되고 있으며,여러 대학에서 '네오 르네상스'라든가 '다빈치' 전형이라는 이름의 입학전형을 고안해내는 일도 윌슨의 주장과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 기출 제시문 (중앙대학교 2010학년도 모의논술)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21세기 학문의 거대한 두 가지가 될 것이다.
반면 사회과학은 계속해서 세분화되면서 그 중 어떤 부분은 생물학으로 편입되거나 생물학의 연장선 위에 있게 될 것이며 그 밖의 부분들은 인문학과 융합될 것이다.
사회과학의 분과들은 계속해서 존재하겠지만 결국 그 형태는 극단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철학,역사학,윤리학,비교종교학,미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은 과학에 접근할 것이고 부분적으로 과학과 융합할 것이다.
영국의 신경생물학자 찰스 셰링턴은 1941년에 '인간과 인간의 본성'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뇌를 '요술에 걸린 베틀'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이 베틀을 통해 외부 세계를 끊임없이 직조(織造)해 낸다.
이렇게 본다면 문명 사회의 공동 정신(세계 문화)은 훨씬 더 큰 베틀이리라.인류는 이 공동 지성을 통해 과학의 영역에서는 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훨씬 넓은 영역을 가로질러 외부 세계를 그려 낼 수 있었고 예술의 영역에서는 한 명의 천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다양한 서사,영상 그리고 리듬을 창조해 냈다.
이렇게 과학과 예술 모두에서 동일한 베틀이 작동하고 있다.
또한 그 베틀의 기원과 본성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도 존재한다.
따라서 유전적 진화의 태고 역사에서 현대 문화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간 조건에 관한 일반적 설명이 존재하는 셈이다.
인과적 설명의 통섭은 한 사람의 지성이 공동 지성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을 가장 신속하고 확실하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다.
통섭을 추구하는 일은 산산조각 난 교양 교육을 새롭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 르네상스와 계몽사상이 유산으로 물려준 학문의 통합이라는 이상은 지난 30년 동안 대체로 포기 상태에 있었다.
약간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종합 대학과 단과 대학들은 학과를 잘게 쪼개고 과정을 세분화하여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각 기관에서 학부생이 수강하는 과목의 평균 숫자는 두 배가 되었지만 일반 교양 과정의 필수 과목 비율은 반 이상으로 줄었다.
이 시기에 과학도 격리되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1997년만 해도 학생들에게 자연과학을 반드시 한 과목 이상씩 수강하도록 한 학교는 전체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추세는 억지로 이것저것 들으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역전되지 않는다.
진정한 개혁은 과학을 학문적 측면과 교육적 측면에서 인문 · 사회과학과 통섭함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모든 학부생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무엇이고 그 관계가 인간 복지에 어떻게 중요한가?
모든 대중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도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의회에 계류 중인 법률의 절반 정도는 중요한 과학 기술적 요소들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매일매일 우리를 괴롭히는 이 쟁점들 중 대부분, 예컨대 인종 갈등,무기 경쟁,인구 과잉,낙태,환경,가난 등은 자연과학적 지식과 인문 · 사회과학적 지식이 통합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만이 실제 세계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이 실제 세계를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독단 그리고 임시방편적 렌즈를 통해서 볼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한결 같이 인문 · 사회과학 분야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며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거나 전혀 없다는 현실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열악한 상황은 대중지식인,언론인,평론가,각종 두뇌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들의 분석이 때로는 정확하고 믿을 만한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분석의 실질적인 기초는 파편화되어 있으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균형 잡힌 관점은 분과들을 쪼개서 하나하나 공부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분과들 간의 통섭을 추구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 통합은 쉽게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통합은 진리의 울림이다.
통합은 인간 본유의 충동을 만족시켜 준다.
학문의 커다란 가지들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는 만큼 지식의 다양성과 깊이는 심화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학문들의 기저에 존재하는 응집력 때문이다.
이런 기획은 다른 이유 때문에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성에 궁극적인 목표를 주기 때문이다.
저 수평선 너머에 넘실거리는 것은 혼돈이 아니라 질서다.
그곳으로 모험을 떠나는 일을 어찌 망설일 수 있겠는가!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무척이나 꼼꼼한 사람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400년 전에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 재산의 일람표(一覽表)를 작성한 점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그는 기억,상상,이성과 같이 인간의 정신능력을 구분한 다음 이에 맞춰 제 학문을 분류한 일람표를 만들었고,본인이 작성한 일람표를 들여다보면서 결핍된 것은 무엇인지 또는 어떠한 것을 보완해야 할지 고민하며 학문 발전을 계도하고자 하였다.
혹자는 베이컨이 국회의원,검찰총장,대법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다 그만 터진 수뢰사건으로 은인자중해야 하는 신세가 되자 시간이 남아 돌아 그랬으리라는 해석도 내놓지만,아직 권세의 길을 분주히 걷고 있던 1605년에도 이미 '학문의 진보(The Advancement of Learning)'를 집필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단순한 소일거리로 인류의 학문을 구분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이유여하야 어쨌든,베이컨은 이 일로 인류 문화의 전환기를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베이컨은 '학문의 진보'와 1620년 발표한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에서 학문의 '분화'와 '전문화'를 주창하였는데,간략히 옮기자면 학문 발전을 위해서는 인류의 지식을 세분화하여 각 분야 전문가들이 담당 과목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처럼 의욕적으로 서막을 걷어 올린 근대는 곧 다재다능한 르네상스 인재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영국 땅에서 저격해 고꾸라뜨린 베이컨의 위업으로 인해 '한우물만 파라'는 교훈은 지금까지 줄곧 힘을 얻어왔다.
이를 거부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다채로운 이상을 추구하려 드는 자는 딜레탕트(dilettante)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1997년 집필된 한 권의 책은 베이컨의 분류표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새로운 르네상스의 이상을 알렸다.
근대 학문의 아버지 베이컨에게 정면 도전장을 낸 이는 사회생물학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이다.
인간 또한 생물체임에 주목하여 진화의 역사를 거쳐온 인류의 출발점을 생물학의 관점에서 조망하던 윌슨은 그의 학문적 입장을 정리한 '통섭: 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안에서 그와 함께 새로운 모험을 떠나자고 촉구한다.
베이컨이 지식의 분류를 주장했다면,윌슨은 '통섭(consilience)'이라는 독특한 단어를 통해 지식의 통합을 말한 것이다.
윌슨은 지식의 계속적인 파편화와 그로 인한 혼란을 염려하면서 학문의 미래를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지식의 대융합에서 찾는다.
통섭을 통해 지나치게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학문을 개혁하고,세계가 안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윌슨은 학문 통합은 '진리의 울림'이라고 표방한다.
윌슨은 통섭으로 인해 균형 잡힌 관점과 보다 다양화되고 심화된 지식이 가능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통섭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지적인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조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데 있다."
그는 인류발달사를 '후성규칙(epigenetic rules)'과 '유전자 · 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 개념'을 통해 설명하며 본유적 이해를 위해서는 왜 '통섭'이 필요한지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통섭'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윌슨이 말하는 대융합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개별 분과 학문들 간에는 엄격한 장벽이 세워져 있어 자유로이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이 쉽지가 않다.
각 학문의 역사적 전통과 전문직업화로 인한 진입 장벽은 무시할 수 없는 제약이다.
또한 인문학과 과학이 다른 문화라는 점을 수용하여야 하며,각 학문들이 상대 학문을 이해하려면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장은 국내에서도 최재천과 홍성욱을 필두로 활발한 논의가 오가며 수용되고 있으며,여러 대학에서 '네오 르네상스'라든가 '다빈치' 전형이라는 이름의 입학전형을 고안해내는 일도 윌슨의 주장과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 기출 제시문 (중앙대학교 2010학년도 모의논술)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21세기 학문의 거대한 두 가지가 될 것이다.
반면 사회과학은 계속해서 세분화되면서 그 중 어떤 부분은 생물학으로 편입되거나 생물학의 연장선 위에 있게 될 것이며 그 밖의 부분들은 인문학과 융합될 것이다.
사회과학의 분과들은 계속해서 존재하겠지만 결국 그 형태는 극단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철학,역사학,윤리학,비교종교학,미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은 과학에 접근할 것이고 부분적으로 과학과 융합할 것이다.
영국의 신경생물학자 찰스 셰링턴은 1941년에 '인간과 인간의 본성'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뇌를 '요술에 걸린 베틀'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이 베틀을 통해 외부 세계를 끊임없이 직조(織造)해 낸다.
이렇게 본다면 문명 사회의 공동 정신(세계 문화)은 훨씬 더 큰 베틀이리라.인류는 이 공동 지성을 통해 과학의 영역에서는 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훨씬 넓은 영역을 가로질러 외부 세계를 그려 낼 수 있었고 예술의 영역에서는 한 명의 천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다양한 서사,영상 그리고 리듬을 창조해 냈다.
이렇게 과학과 예술 모두에서 동일한 베틀이 작동하고 있다.
또한 그 베틀의 기원과 본성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도 존재한다.
따라서 유전적 진화의 태고 역사에서 현대 문화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간 조건에 관한 일반적 설명이 존재하는 셈이다.
인과적 설명의 통섭은 한 사람의 지성이 공동 지성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을 가장 신속하고 확실하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다.
통섭을 추구하는 일은 산산조각 난 교양 교육을 새롭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 르네상스와 계몽사상이 유산으로 물려준 학문의 통합이라는 이상은 지난 30년 동안 대체로 포기 상태에 있었다.
약간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종합 대학과 단과 대학들은 학과를 잘게 쪼개고 과정을 세분화하여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각 기관에서 학부생이 수강하는 과목의 평균 숫자는 두 배가 되었지만 일반 교양 과정의 필수 과목 비율은 반 이상으로 줄었다.
이 시기에 과학도 격리되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1997년만 해도 학생들에게 자연과학을 반드시 한 과목 이상씩 수강하도록 한 학교는 전체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추세는 억지로 이것저것 들으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역전되지 않는다.
진정한 개혁은 과학을 학문적 측면과 교육적 측면에서 인문 · 사회과학과 통섭함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모든 학부생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무엇이고 그 관계가 인간 복지에 어떻게 중요한가?
모든 대중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도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의회에 계류 중인 법률의 절반 정도는 중요한 과학 기술적 요소들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매일매일 우리를 괴롭히는 이 쟁점들 중 대부분, 예컨대 인종 갈등,무기 경쟁,인구 과잉,낙태,환경,가난 등은 자연과학적 지식과 인문 · 사회과학적 지식이 통합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만이 실제 세계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이 실제 세계를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독단 그리고 임시방편적 렌즈를 통해서 볼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한결 같이 인문 · 사회과학 분야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며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거나 전혀 없다는 현실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열악한 상황은 대중지식인,언론인,평론가,각종 두뇌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들의 분석이 때로는 정확하고 믿을 만한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분석의 실질적인 기초는 파편화되어 있으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균형 잡힌 관점은 분과들을 쪼개서 하나하나 공부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분과들 간의 통섭을 추구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 통합은 쉽게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통합은 진리의 울림이다.
통합은 인간 본유의 충동을 만족시켜 준다.
학문의 커다란 가지들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는 만큼 지식의 다양성과 깊이는 심화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학문들의 기저에 존재하는 응집력 때문이다.
이런 기획은 다른 이유 때문에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성에 궁극적인 목표를 주기 때문이다.
저 수평선 너머에 넘실거리는 것은 혼돈이 아니라 질서다.
그곳으로 모험을 떠나는 일을 어찌 망설일 수 있겠는가!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