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자유’가 아니라 ‘구속’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당신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소우주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한 톨의 생명이 꿈틀거리는 생명의 알을 목도하고는 격려의 응원을 한다.
'자,너는 아무 것이라도 될 수 있으니 어서 힘내렴!'
내가 당신에게 수행하라고 한 이 사고실험(思考實驗)에서 생명의 알은 과연 어떠한 모양의 생명체로 태어날까?
다음 문장으로 눈을 옮기기 전에 사고실험의 예상 결과를 단 5분 동안이라도 열심히 생각해보자.
정말 5분 이상 진지하게 고민했는가?
고민의 시간을 덜기 위해 조급히 이 문장으로 넘어오지는 않았으리라 신뢰하며 답을 알려주자면,그 생명의 알은 결국 아무 것도 안 될 것이다.
이 무슨 엉뚱한 이야기냐고?
자기 멋대로 괴상망측한 사고실험을 시켜 놓고는 희한한 답을 던져준다고 황당해하는 당신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발현'은 그 자체가 바로 '한계(limitation)'를 의미한다.
당신의 팔을 옆 죽지에서 뻗어 찬찬히 들여다보라.
당신의 팔이 그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그 팔은 그 공간에 국한되고 한정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즉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아무 것이라도 될 수 있는' 완벽한 가능성(可能性)의 상태가 의미하는 바는 '아무 것도 아닌' 상태라는 사실이다.
이를 우주와 인생의 표연한 진리라고 되새기면서 무척 흡족해 하는 나에게,당신은 사고실험이라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하니 내 마음대로 그러한 독단적 실험결과를 내세우지 말라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입장을 지지해 주는 든든한 원군이 지키고 있으니 그 사람을 소개하면서 떫은 철학적 색채가 나는 나의 '썰'은 여기에서 그만 풀기로 하자.
못마땅해 하는 당신에게 소개하는 지원군의 이름은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스워스모어 대학의 사회행동학 교수이다.
배리 슈워츠는 선택심리,의사결정,심리학과 경제학의 상관관계 등에 관심이 많아 지금까지 흥미로운 저서를 여러 권 집필하였는데,'인간 본성의 싸움(The Battle for Human Nature)''삶의 비용(The Costs of Living)''학습과 행위의 심리학(Psychology of Learning and Behavior)'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그가 집필한 가장 인기 있는 저서로는 단연 '선택의 패러독스(The Paradox of Choice)'를 꼽을 수 있는데,바로 이 책이 나의 사고실험을 지지하는 원군이다.
굳은 표정을 풀고 배리 슈워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고실험의 결과가 왜 그러한지 '선택의 패러독스'에서 설명될 것이다.
이 책의 부제(副題)는 '왜 많을수록 더 불행한가(Why more is less?)'이다.
동양 버전으로 깔끔하게 표현하자면 '과유불급(過猶不及)'에 해당하는 이 부제가 슈워츠의 핵심 메시지를 집약한다.
통상 우리에게 선택은 '자율'을 의미한다.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 여러 대안 가운데 내가 원하는 것을 고르는 '선택'은 우리에게 '자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택의 기회가 더 많을수록 더 좋다는(the more is the better) 것이 우리의 일반 통념이다.
하지만 슈워츠는 이에 반박하면서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얄팍한 단순성을 헤집는다.
슈워츠는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삶의 만족도는 더 떨어지는 상황에 주목한다.
실제 조사의 결과 사람들은 선택권이 적은 경우 더 큰 만족도를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역설적 현실의 이유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각각의 행위를 하나 하나 따지고 신중하게 숙고하는 의식 활동이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짐을 지어주기 때문이다.
슈워츠는 '자살을 저지를 것인가,커피를 한 잔 마실 것인가?'라는 카뮈의 말을 인용하면서,인생의 모든 과정이 선택의 연속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 행위가 점점 누적됨으로 인해 초래되는 부담감과 스트레스(the cumulative effect of these added choices that is causing substantial distress)는 현대인들을 '선택의 과부하'에 시달리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 때문에 자유를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미련과 후회,자기책망의 감정에 빠져든다.
슈워츠는 현대인들이 왜 선택 때문에 되레 고생하는가를 설명하면서,사람을 크게 두 유형으로 분류했다.
언제나 절대적 최선(absolute best)만을 고집하는 극대화자(maximizer)가 있고,적당히 좋으면(good enough) 만족하는 만족인(satisficer)이 있다.
극대화된 만족을 추구하는 손실혐오자(maximizer)는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얻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능한 모든 대안을 모조리 점검하며 선택의 폭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
옷 한 벌을 사기 위해 하루 종일 발에 물집이 나도록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 위해 이들은 항상 따지고 또 따진다.
또 다른 선택대안(alternative)이나 밟지 않은 길(roads not traveled)은 이들을 우울하게 한다.
현대인들이 이 모양새가 된 것은 사실 경제학 논리와도 밀접한 상관이 있다.
경제학자들은 어느 특정한 대안의 가치를 다른 대안들과 분리해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느 대안이든 '기회비용'이 따르며,대안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포기하는 기회비용 역시 같이 증가한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가 많아질수록 고려해야 할 대안의 수도 많아지고,선택하지 않은 포기 대안들로 인한 기회비용 증가는 우리가 내린 선택에서 얻은 만족을 희석시킨다.
또한 잘못된 선택에 대한 좌절감과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미련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래서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할수록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선택의 패러독스'를 소개하기에 앞서 그 생명의 알이 아무 것도 되지 않으리라 주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배리 슈워츠는 선택이 주는 후회와 스트레스를 줄이고 선택의 참 효용을 높이기 위해서는 '만족인(satisficer)'으로 사는 것이 행복을 찾는 지름길이라고 조언한다.
배리 슈워츠는 책의 마지막 장을 할애하여,중요한 선택에만 관심을 집중하라,웬만하면 만족하라,일단 한 일은 후회하지 마라,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제약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등의 충고를 한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상품 하나를 사기 위해 검색 웹 페이지가 수십을 넘어가는 인터넷 창을 띄워 놓고 눈에 안약을 떨구어 가며 인터넷 쇼핑을 한 경험이 있다면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는 조언들이다.
'선택의 패러독스'는 실용적 지혜를 담고 있는 교양 심리학 저서인 데다 책 안에 뉴요커(New Yorker)의 만평이 곁들여져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기 바란다.
책을 읽는 내내 '아,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외치면서 통쾌한 기분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기출 제시문 (서강대 2006학년도 정시 예시 제시문)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례가 없었던 또 다른 종류의 선택의 자유를 갖는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다.
각각의 개인들은 세상에 나올 때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짐을 갖고 나온다.
이를테면 인종,민족,국적,종교,그리고 사회적 혹은 경제적 계급 등이다.
이 모든 짐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물려받은 사회적,경제적 계급을 초월하는 더 큰 가능성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태어날 때 물려받은 종교를 벗어 던질 수 있으며,인종적 유산을 포기하거나 수용할 수 있다.
국적을 예찬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인종도 이제는 더 유동적인 것이 되었다.
인종간 결혼이 보다 일반화되면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다양한 피부색과 얼굴 모양을 보여주며,그 결과 '외적인' 인종적 특성을 구분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그리고 사회의 포용성이 커지면서 사람들의 '내적인' 인종적 특성도 보다 탄력적으로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수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상황에 따라 어떤 정체성을 감추거나 강조할 수 있다.
뉴욕에 사는 멕시코 출신의 젊은 이민자 여성은 대학에서 현대 문학 강의를 듣는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중남미인,멕시코인,여성,이민자,혹은 십대 소녀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할 수 있다.
나는 일터에서 유태인인 미국인일 수 있고,시나고그(유태인 회당)에서 미국인이자 유태인일 수 있다.
정체성은 과거에 비해 '물려받은' 특성이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정체성도 선택의 대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정체성의 일부를 거부하는 것은 비록 그 결과가 힘들다 해도 늘 가능한 것이었다.
결혼의 선택과 같이 정체성의 선택은 자동 선택이 너무 강력하고 심리적으로 선택의 의미가 없는 상태에서 선택의 중요성과 의미가 아주 커지는 상태로 이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한 그 모든 선택의 문제들에서 그랬듯이,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선택의 변화는 좋은 소식이기도 하고 나쁜 소식이기도 하다.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점에서는 좋은 소식이고 우리에게 선택의 책임을 부과한다는 점에서는 나쁜 소식이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당신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소우주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한 톨의 생명이 꿈틀거리는 생명의 알을 목도하고는 격려의 응원을 한다.
'자,너는 아무 것이라도 될 수 있으니 어서 힘내렴!'
내가 당신에게 수행하라고 한 이 사고실험(思考實驗)에서 생명의 알은 과연 어떠한 모양의 생명체로 태어날까?
다음 문장으로 눈을 옮기기 전에 사고실험의 예상 결과를 단 5분 동안이라도 열심히 생각해보자.
정말 5분 이상 진지하게 고민했는가?
고민의 시간을 덜기 위해 조급히 이 문장으로 넘어오지는 않았으리라 신뢰하며 답을 알려주자면,그 생명의 알은 결국 아무 것도 안 될 것이다.
이 무슨 엉뚱한 이야기냐고?
자기 멋대로 괴상망측한 사고실험을 시켜 놓고는 희한한 답을 던져준다고 황당해하는 당신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발현'은 그 자체가 바로 '한계(limitation)'를 의미한다.
당신의 팔을 옆 죽지에서 뻗어 찬찬히 들여다보라.
당신의 팔이 그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그 팔은 그 공간에 국한되고 한정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즉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아무 것이라도 될 수 있는' 완벽한 가능성(可能性)의 상태가 의미하는 바는 '아무 것도 아닌' 상태라는 사실이다.
이를 우주와 인생의 표연한 진리라고 되새기면서 무척 흡족해 하는 나에게,당신은 사고실험이라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하니 내 마음대로 그러한 독단적 실험결과를 내세우지 말라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입장을 지지해 주는 든든한 원군이 지키고 있으니 그 사람을 소개하면서 떫은 철학적 색채가 나는 나의 '썰'은 여기에서 그만 풀기로 하자.
못마땅해 하는 당신에게 소개하는 지원군의 이름은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스워스모어 대학의 사회행동학 교수이다.
배리 슈워츠는 선택심리,의사결정,심리학과 경제학의 상관관계 등에 관심이 많아 지금까지 흥미로운 저서를 여러 권 집필하였는데,'인간 본성의 싸움(The Battle for Human Nature)''삶의 비용(The Costs of Living)''학습과 행위의 심리학(Psychology of Learning and Behavior)'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그가 집필한 가장 인기 있는 저서로는 단연 '선택의 패러독스(The Paradox of Choice)'를 꼽을 수 있는데,바로 이 책이 나의 사고실험을 지지하는 원군이다.
굳은 표정을 풀고 배리 슈워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고실험의 결과가 왜 그러한지 '선택의 패러독스'에서 설명될 것이다.
이 책의 부제(副題)는 '왜 많을수록 더 불행한가(Why more is less?)'이다.
동양 버전으로 깔끔하게 표현하자면 '과유불급(過猶不及)'에 해당하는 이 부제가 슈워츠의 핵심 메시지를 집약한다.
통상 우리에게 선택은 '자율'을 의미한다.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 여러 대안 가운데 내가 원하는 것을 고르는 '선택'은 우리에게 '자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택의 기회가 더 많을수록 더 좋다는(the more is the better) 것이 우리의 일반 통념이다.
하지만 슈워츠는 이에 반박하면서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얄팍한 단순성을 헤집는다.
슈워츠는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삶의 만족도는 더 떨어지는 상황에 주목한다.
실제 조사의 결과 사람들은 선택권이 적은 경우 더 큰 만족도를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역설적 현실의 이유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각각의 행위를 하나 하나 따지고 신중하게 숙고하는 의식 활동이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짐을 지어주기 때문이다.
슈워츠는 '자살을 저지를 것인가,커피를 한 잔 마실 것인가?'라는 카뮈의 말을 인용하면서,인생의 모든 과정이 선택의 연속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 행위가 점점 누적됨으로 인해 초래되는 부담감과 스트레스(the cumulative effect of these added choices that is causing substantial distress)는 현대인들을 '선택의 과부하'에 시달리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 때문에 자유를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미련과 후회,자기책망의 감정에 빠져든다.
슈워츠는 현대인들이 왜 선택 때문에 되레 고생하는가를 설명하면서,사람을 크게 두 유형으로 분류했다.
언제나 절대적 최선(absolute best)만을 고집하는 극대화자(maximizer)가 있고,적당히 좋으면(good enough) 만족하는 만족인(satisficer)이 있다.
극대화된 만족을 추구하는 손실혐오자(maximizer)는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얻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능한 모든 대안을 모조리 점검하며 선택의 폭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
옷 한 벌을 사기 위해 하루 종일 발에 물집이 나도록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 위해 이들은 항상 따지고 또 따진다.
또 다른 선택대안(alternative)이나 밟지 않은 길(roads not traveled)은 이들을 우울하게 한다.
현대인들이 이 모양새가 된 것은 사실 경제학 논리와도 밀접한 상관이 있다.
경제학자들은 어느 특정한 대안의 가치를 다른 대안들과 분리해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느 대안이든 '기회비용'이 따르며,대안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포기하는 기회비용 역시 같이 증가한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가 많아질수록 고려해야 할 대안의 수도 많아지고,선택하지 않은 포기 대안들로 인한 기회비용 증가는 우리가 내린 선택에서 얻은 만족을 희석시킨다.
또한 잘못된 선택에 대한 좌절감과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미련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래서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할수록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선택의 패러독스'를 소개하기에 앞서 그 생명의 알이 아무 것도 되지 않으리라 주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배리 슈워츠는 선택이 주는 후회와 스트레스를 줄이고 선택의 참 효용을 높이기 위해서는 '만족인(satisficer)'으로 사는 것이 행복을 찾는 지름길이라고 조언한다.
배리 슈워츠는 책의 마지막 장을 할애하여,중요한 선택에만 관심을 집중하라,웬만하면 만족하라,일단 한 일은 후회하지 마라,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제약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등의 충고를 한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상품 하나를 사기 위해 검색 웹 페이지가 수십을 넘어가는 인터넷 창을 띄워 놓고 눈에 안약을 떨구어 가며 인터넷 쇼핑을 한 경험이 있다면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는 조언들이다.
'선택의 패러독스'는 실용적 지혜를 담고 있는 교양 심리학 저서인 데다 책 안에 뉴요커(New Yorker)의 만평이 곁들여져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기 바란다.
책을 읽는 내내 '아,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외치면서 통쾌한 기분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기출 제시문 (서강대 2006학년도 정시 예시 제시문)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례가 없었던 또 다른 종류의 선택의 자유를 갖는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다.
각각의 개인들은 세상에 나올 때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짐을 갖고 나온다.
이를테면 인종,민족,국적,종교,그리고 사회적 혹은 경제적 계급 등이다.
이 모든 짐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물려받은 사회적,경제적 계급을 초월하는 더 큰 가능성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태어날 때 물려받은 종교를 벗어 던질 수 있으며,인종적 유산을 포기하거나 수용할 수 있다.
국적을 예찬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인종도 이제는 더 유동적인 것이 되었다.
인종간 결혼이 보다 일반화되면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다양한 피부색과 얼굴 모양을 보여주며,그 결과 '외적인' 인종적 특성을 구분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그리고 사회의 포용성이 커지면서 사람들의 '내적인' 인종적 특성도 보다 탄력적으로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수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상황에 따라 어떤 정체성을 감추거나 강조할 수 있다.
뉴욕에 사는 멕시코 출신의 젊은 이민자 여성은 대학에서 현대 문학 강의를 듣는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중남미인,멕시코인,여성,이민자,혹은 십대 소녀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할 수 있다.
나는 일터에서 유태인인 미국인일 수 있고,시나고그(유태인 회당)에서 미국인이자 유태인일 수 있다.
정체성은 과거에 비해 '물려받은' 특성이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정체성도 선택의 대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정체성의 일부를 거부하는 것은 비록 그 결과가 힘들다 해도 늘 가능한 것이었다.
결혼의 선택과 같이 정체성의 선택은 자동 선택이 너무 강력하고 심리적으로 선택의 의미가 없는 상태에서 선택의 중요성과 의미가 아주 커지는 상태로 이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한 그 모든 선택의 문제들에서 그랬듯이,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선택의 변화는 좋은 소식이기도 하고 나쁜 소식이기도 하다.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점에서는 좋은 소식이고 우리에게 선택의 책임을 부과한다는 점에서는 나쁜 소식이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