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철학의 3대 聖人 만나면 어떤 대화 나눌까?
시험장에서 갑작스레 마주하는 인상적인 문제는 몇 년이 지나도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다시금 그 답을 궁리하게 한다.
대학 새내기 때 교양 삼아 수강하였던 동양철학 강좌는 이런 면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는데,아직도 기억나는 중간고사 문제가,“묵자와 공자가 길에서 만났다.둘의 대화는 어떠할지 서술하라.”이다.
교수님이 칠판에 “둘의 대화는?” 이라는 질문을 쓰자,유가와 법가를 비교하라거나 장자의 막위(莫爲)와 혹사(或使)의 논변에 대해서 검토하라는 다른 시험문제들은 갑자기 쉬워 보이기 시작했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하는 황당한 느낌에 한동안 칠판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나중에는 손짓 발짓 지문도 넣어가면서 묵적과 공구의 설전을 열심히 그려나갔던 기억이 난다.
두 사상가가 말로 다투다 흥분해 멱살잡이를 한다는 유치한 결말로 둘의 조우를 마무리했던 것 같은데 그것 외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질문만 오롯이 뇌리에 새겨져 아직까지 여러 장의 모의답안을 구상하게 만들곤 한다.
그런데 강의를 담당하셨던 그 교수님의 기발함이 전적으로 혼자서만 즐기는 재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일본의 한학자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는 1982년 무려 공자와 노자,석가의 세 성인이 한 자리에 모인 삼성회담(三聖會談)을 지면상 개최했기 때문이다.
모로하시 자신이 회담의 사회자로 참여하면서 패널로 초빙된 공자,노자,석가의 대담을 조율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책의 제목은 「공자 노자 석가」로서,100세의 노학자 모로하시가 그간의 충실한 학문을 소박하게 펼쳐놓은 글이다.
「공자 노자 석가」는 각 절마다 주제를 정해,해당 주제에 대해 각 성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는데,모로하시는 삼성(三聖)의 지혜를 이 책 안에서 풀어 나갈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하면서 때로는 독자들이 느끼는 궁금증을 대신하여 질문하기도 한다.
공자,노자,석가가 한 자리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제1장에서 모로하시가 처음 던진 질문은,“좋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과 취미를 소개하는 자리에서,공자는 자기 취미를 음악이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유가사상을 어렵지 않게 전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로하시는 독자들이 동양철학의 어려운 주제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다.
딱딱한 철학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공자 노자 석가」는 독자에게 친절한 입문서이나,세 성현들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모로하시 자신의 부담은 컸을 것이다.
하지만 100세의 나이에서 빛나는 능숙한 노련미는 세 성인의 회담을 충실하고 살갑게 만들었다.
1982년 발간된 「공자 노자 석가」가 판쇄를 거듭하는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였다는 사실은 모로하시 데쓰지가 개최한 삼성회담이 무척 성공적이라는 증거이다.
모로하시 본인도 집필과정이 즐거웠는지,“자칫하면 세 분 성인의 신성함을 모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는 겸손한 저자후기를 남기기는 하였지만 책의 말미에서 2차 삼성회담을 기약하였다.
세 성현이 그럼 다음 장소는 백두산으로 할까 하는 논의로 1차 회담을 마무리하면서 책이 매듭을 맺는다.
하지만 모로하시가 1치 회담을 마무리한 이후 영면을 취하여(생몰 1883년~1982년) 2차 회담은 세기를 달리한 지금까지도 아직 열리지 못하고 있다.
2차 회담이 열렸다면 어떠한 논의가 오갔을 것인지 사뭇 궁금하나,사회자가 저 세상으로 떠났으니 그 궁금증은 모로하시의 다른 글로 달래야겠다.
모로하시는 자신을 사회자로 설정한 「공자 노자 석가」뿐만이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자기 색깔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담백한 글을 쓰는 사람이다.
고전에 정통한 전문가이지만 현학적이고 무거운 글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난해한 구절을 누구나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상냥하게 풀어내면서 고전 속으로 독자들을 잘 이끌고 가는 능력이 있다.
소박하면서도 주도면밀한 글을 쓰는,쉽게 보이나 무척 어려운 이 능력은 오랜 세월을 학문에 바친 노학자의 깊이 있는 평온함 덕분이기도 하지만,그의 철저하고 집요한 자세가 있기에 가능한 결과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단련된 모로하시의 학문은 스스럼없는 소박한 문장을 태어나게 하였다.
그가 학문적으로 얼마나 집요하였는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학문적 이력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1883년 일본 니가타(新潟) 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서당 훈장이었던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던 모로하시는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919년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문부성 장학생으로 중국으로 건너가서 본격적으로 한자와 한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학업을 도와줄 제대로 된 사전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귀국 후에 스스로 사전 편찬에 착수하여 30년 이상을 작업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내용의 정확함과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모로하시는 편찬과정에서 눈을 지나치게 혹사해 한쪽 눈의 시력은 완전히 잃어버리고 다른 한쪽 눈 역시 무척 침침해지는 등 개인적 희생이 컸다.
시력을 잃을 만큼 스스로를 매질하는 집요함과 엄격함이 있었기에,다른 이에게는 쉽고 편안하게 다가가는 글이 모로하시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모로하시의 유명한 저서로는 ‘논어강의’와 ‘노자강의’,‘장자이야기’,‘중국고전명언사전’,‘12지 이야기’ 등을 비롯한 많은 책이 남아있는데,어떠한 책을 읽어보더라도 그의 소박하되 치밀한 글을 접할 수 있다.
저자의 개성이 그러하니 동양철학의 세계를 부담 없이 접하고자 한다면,모로하시의 책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 기출 제시문 (숙명여대 2004학년도 인문계 정시 논술)
[제시문]
맹자는 공자의 덕을 칭송하여,“공자께서는 정도가 심한 일은 하지 않으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공자의 말씀과 행동을 생각해 보면,모두 그 양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지키고 있는 점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공자의 말씀 가운데 “군자는 천하에 적당하고 적당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정(定)하고 정하지 않은 것이 없고,오직 의(義)를 좇아서 의와 함께 살아간다”라고 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를 좇아서 의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의를 본받아 행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렇게 보면 이 또한 중용의 도를 지키라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또 공자는 「논어」에서 백이,숙제,우중,이일,유하혜,소연 등 초야(草野)에 묻혀 지냈던 은사(隱士)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이렇게 평하셨습니다.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이는 백이와 숙제였지.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했으나,말이 도리에 맞고 행동이 사려 깊었던 이는 유하혜와 소연이었어.숨어 살면서 기탄없이 말을 했지만,몸가짐이 깨끗했고 세상을 버리는 것이 시세(時勢)에 맞은 이는 우중과 이일이었지.”
공자는 이렇게 은사들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자는 자신의 입장을 “나는 그들과 달라서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앞서 ‘적당하고 적당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정하고 정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는 얼핏 보기에 주장도 주의도 없는 평범한 무정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속에는 중행(中行),중용(中庸)이라는 지고한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자의 실제 모습에 대해 제자들은 “공자께서는 온화하시되 엄숙하시며,위엄이 있으나 지나쳐서 사납지 않으시며,공손하시면서도 평안하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로하시 데쓰지,「공자 노자 석가」
[논 제] 제시문 (가 : 모로하시 데쓰지의 글)의 핵심 내용을 설명하고,제시문 (나)의 ‘대중문화 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가)의 관점에서 논술하시오.
홍보람 S·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시험장에서 갑작스레 마주하는 인상적인 문제는 몇 년이 지나도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다시금 그 답을 궁리하게 한다.
대학 새내기 때 교양 삼아 수강하였던 동양철학 강좌는 이런 면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는데,아직도 기억나는 중간고사 문제가,“묵자와 공자가 길에서 만났다.둘의 대화는 어떠할지 서술하라.”이다.
교수님이 칠판에 “둘의 대화는?” 이라는 질문을 쓰자,유가와 법가를 비교하라거나 장자의 막위(莫爲)와 혹사(或使)의 논변에 대해서 검토하라는 다른 시험문제들은 갑자기 쉬워 보이기 시작했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하는 황당한 느낌에 한동안 칠판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나중에는 손짓 발짓 지문도 넣어가면서 묵적과 공구의 설전을 열심히 그려나갔던 기억이 난다.
두 사상가가 말로 다투다 흥분해 멱살잡이를 한다는 유치한 결말로 둘의 조우를 마무리했던 것 같은데 그것 외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질문만 오롯이 뇌리에 새겨져 아직까지 여러 장의 모의답안을 구상하게 만들곤 한다.
그런데 강의를 담당하셨던 그 교수님의 기발함이 전적으로 혼자서만 즐기는 재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일본의 한학자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는 1982년 무려 공자와 노자,석가의 세 성인이 한 자리에 모인 삼성회담(三聖會談)을 지면상 개최했기 때문이다.
모로하시 자신이 회담의 사회자로 참여하면서 패널로 초빙된 공자,노자,석가의 대담을 조율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책의 제목은 「공자 노자 석가」로서,100세의 노학자 모로하시가 그간의 충실한 학문을 소박하게 펼쳐놓은 글이다.
「공자 노자 석가」는 각 절마다 주제를 정해,해당 주제에 대해 각 성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는데,모로하시는 삼성(三聖)의 지혜를 이 책 안에서 풀어 나갈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하면서 때로는 독자들이 느끼는 궁금증을 대신하여 질문하기도 한다.
공자,노자,석가가 한 자리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제1장에서 모로하시가 처음 던진 질문은,“좋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과 취미를 소개하는 자리에서,공자는 자기 취미를 음악이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유가사상을 어렵지 않게 전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로하시는 독자들이 동양철학의 어려운 주제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다.
딱딱한 철학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공자 노자 석가」는 독자에게 친절한 입문서이나,세 성현들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모로하시 자신의 부담은 컸을 것이다.
하지만 100세의 나이에서 빛나는 능숙한 노련미는 세 성인의 회담을 충실하고 살갑게 만들었다.
1982년 발간된 「공자 노자 석가」가 판쇄를 거듭하는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였다는 사실은 모로하시 데쓰지가 개최한 삼성회담이 무척 성공적이라는 증거이다.
모로하시 본인도 집필과정이 즐거웠는지,“자칫하면 세 분 성인의 신성함을 모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는 겸손한 저자후기를 남기기는 하였지만 책의 말미에서 2차 삼성회담을 기약하였다.
세 성현이 그럼 다음 장소는 백두산으로 할까 하는 논의로 1차 회담을 마무리하면서 책이 매듭을 맺는다.
하지만 모로하시가 1치 회담을 마무리한 이후 영면을 취하여(생몰 1883년~1982년) 2차 회담은 세기를 달리한 지금까지도 아직 열리지 못하고 있다.
2차 회담이 열렸다면 어떠한 논의가 오갔을 것인지 사뭇 궁금하나,사회자가 저 세상으로 떠났으니 그 궁금증은 모로하시의 다른 글로 달래야겠다.
모로하시는 자신을 사회자로 설정한 「공자 노자 석가」뿐만이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자기 색깔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담백한 글을 쓰는 사람이다.
고전에 정통한 전문가이지만 현학적이고 무거운 글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난해한 구절을 누구나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상냥하게 풀어내면서 고전 속으로 독자들을 잘 이끌고 가는 능력이 있다.
소박하면서도 주도면밀한 글을 쓰는,쉽게 보이나 무척 어려운 이 능력은 오랜 세월을 학문에 바친 노학자의 깊이 있는 평온함 덕분이기도 하지만,그의 철저하고 집요한 자세가 있기에 가능한 결과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단련된 모로하시의 학문은 스스럼없는 소박한 문장을 태어나게 하였다.
그가 학문적으로 얼마나 집요하였는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학문적 이력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1883년 일본 니가타(新潟) 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서당 훈장이었던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던 모로하시는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919년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문부성 장학생으로 중국으로 건너가서 본격적으로 한자와 한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학업을 도와줄 제대로 된 사전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귀국 후에 스스로 사전 편찬에 착수하여 30년 이상을 작업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내용의 정확함과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모로하시는 편찬과정에서 눈을 지나치게 혹사해 한쪽 눈의 시력은 완전히 잃어버리고 다른 한쪽 눈 역시 무척 침침해지는 등 개인적 희생이 컸다.
시력을 잃을 만큼 스스로를 매질하는 집요함과 엄격함이 있었기에,다른 이에게는 쉽고 편안하게 다가가는 글이 모로하시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모로하시의 유명한 저서로는 ‘논어강의’와 ‘노자강의’,‘장자이야기’,‘중국고전명언사전’,‘12지 이야기’ 등을 비롯한 많은 책이 남아있는데,어떠한 책을 읽어보더라도 그의 소박하되 치밀한 글을 접할 수 있다.
저자의 개성이 그러하니 동양철학의 세계를 부담 없이 접하고자 한다면,모로하시의 책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 기출 제시문 (숙명여대 2004학년도 인문계 정시 논술)
[제시문]
맹자는 공자의 덕을 칭송하여,“공자께서는 정도가 심한 일은 하지 않으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공자의 말씀과 행동을 생각해 보면,모두 그 양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지키고 있는 점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공자의 말씀 가운데 “군자는 천하에 적당하고 적당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정(定)하고 정하지 않은 것이 없고,오직 의(義)를 좇아서 의와 함께 살아간다”라고 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를 좇아서 의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의를 본받아 행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렇게 보면 이 또한 중용의 도를 지키라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또 공자는 「논어」에서 백이,숙제,우중,이일,유하혜,소연 등 초야(草野)에 묻혀 지냈던 은사(隱士)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이렇게 평하셨습니다.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이는 백이와 숙제였지.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했으나,말이 도리에 맞고 행동이 사려 깊었던 이는 유하혜와 소연이었어.숨어 살면서 기탄없이 말을 했지만,몸가짐이 깨끗했고 세상을 버리는 것이 시세(時勢)에 맞은 이는 우중과 이일이었지.”
공자는 이렇게 은사들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자는 자신의 입장을 “나는 그들과 달라서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앞서 ‘적당하고 적당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정하고 정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는 얼핏 보기에 주장도 주의도 없는 평범한 무정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속에는 중행(中行),중용(中庸)이라는 지고한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자의 실제 모습에 대해 제자들은 “공자께서는 온화하시되 엄숙하시며,위엄이 있으나 지나쳐서 사납지 않으시며,공손하시면서도 평안하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로하시 데쓰지,「공자 노자 석가」
[논 제] 제시문 (가 : 모로하시 데쓰지의 글)의 핵심 내용을 설명하고,제시문 (나)의 ‘대중문화 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가)의 관점에서 논술하시오.
홍보람 S·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