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관계’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오가면서 여름 무더위가 한창이다.
위세 등등한 여름 하늘을 지배하는 염제(炎帝)를 피해 한적하게 피서를 즐기고 싶다면 책장 사이로 난 오솔길을 총총히 걸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활자의 수풀을 구비구비 지나는 여러 갈래의 오솔길 중에서도 특히 정갈한 느낌이 드는 길을 하나 소개하자면 마르틴 부버의 글이 있다.
사람 얼굴에는 그가 타고난 것과 그가 만들어 온 것들이 함께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마르틴 부버의 사진은 성성한 송충이 눈썹 아래 자리 잡은 고요한 샘물 같은 눈이 항상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의 눈만큼이나 깊고 묵상적인 그의 글을 읽어 보노라면 사나운 여름철 더위도 어느덧 가실 것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 1878~1965)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 사상가로서,유명한 랍비이자 사업가였던 할아버지 솔로몬 부버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유대적 신비주의 유산을 물려받았고,성장해서는 빈,라이프치히,취리히,베를린 대학 등지에서 미술사와 철학을 공부하면서 사상적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인간의 실존과 종교철학,사회사상 등 다방면에서 적극적인 연구 활동을 했던 마르틴 부버는 '인간 문제'(1948) '유토피아에의 길'(1950) '사회와 국가'(1952) 등을 비롯하여 여러 저서를 남겼지만,무엇보다도 그만의 독특한 고유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이자 여름철 피서를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은 '나와 너(Ich und Du)'이다.
'나와 너'는 제목이 워낙 특이해 우선 표제 하나만으로도 기억에 강하게 남는 책인데,이 책 제목이 곧 그대로 부버 사상의 요체이기도 하다.
부버는 세상에는 '나와 너(I-You)'의 관계와 '나와 그것(I-It)'의 관계가 존재하는데,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도구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대상이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일시적이고 기계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가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관계로서,무엇과도 바꿔질 수 없는 유일한 '나'와 대체 불가능한 '너'가 깊은 신뢰 속에서 존재한다.
부버는 인간이 자신의 참다운 내면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관계인가 '나와 그것'의 관계인가는 나의 상대방만이 달라지는 차이뿐만 아니라,'나' 또한 본질적으로 다르게 존재한다.
만약 내가 '나와 그것'의 관계를 맺는다면,그 관계는 나에게 있어서조차 도구로서 존재하는 나의 한 단면만 보여주지,나의 참다운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와 너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너와 더불어 현실에 참여한다. 나는 너와 더불어 현실을 나눠 가짐으로 말미암아 현존적 존재가 된다"고 설파한 부버는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부버의 관계지향적 실존주의 철학은 흔히 '대화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엄숙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진솔한 대화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부버는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그 안에서 찾고자 하였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주장하던 부버는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잃어버리는 현대의 비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참된 관계와 대화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는 참다운 삶은 인격체가 조우하고 교섭하면서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모든 만남의 연장선은 '영원자 너(하나님)'에게 향한다고 말하면서 유대적 신비주의의 일면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부버에 의하면,만남은 개인적 경험이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마치 신의 은총처럼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직관적 판단에 가까운 것이다.
만남은 영혼의 한가로움 속에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영적 합일(合一) 또는 고양(高揚)을 의미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과 하나님 관계의 비유적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어느 경우에도 참된 부름은 참된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라는 마르틴 부버의 철학은 시온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한 그의 인생 행로와도 연관을 맺고 있다고 평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유대교 철학과 윤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38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히브리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아랍인과 유대인의 상호이해 증진을 위하여 노력했던 부버는 '나와 너'의 대화 철학을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서도 펼치고자 하였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대부분이 '나와 그것'의 관계에 불과하지 부버가 주장하는 '나와 너'의 관계는 드물디 드물다.
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들은 모두,너는 나에게 그리고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무엇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나와 너(Ich und Du)'의 내용은 우물처럼 깊지만 다행히 책의 분량은 그리 길지 않으니 마르틴 부버의 글을 한번 꼼꼼하게 읽으면서 보내는 휴양의 시간을 권하고 싶다.
☞ 기출 제시문 (서강대학교 2006학년도 정시 논술)
세계는 사람이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에 따라서 사람에게 이중적이다.
사람의 태도는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의 이중성에 따라서 이중적이다.
근원어는 낱개의 말이 아니고 짝말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나-너'라는 짝말이다.
또 하나의 근원어는 '나-그것'이라는 짝말이다.
'나',그 자체란 없으며 오직 근원어 '나-너'의 '나'와 근원어 '나-그것'의 '나'가 있을 뿐이다.
사람이 '나'라고 말할 때 그는 그 둘 중의 하나를 생각하고 있다.
그가 '나'라고 말할 때 그가 생각하고 있는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또한 그가 '너' 또는 '그것'이라고 말할 때 위의 두 근원어 중 어느 하나의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중략…)
정신이 독자적 삶 속에 작용해 들어가는 것은 결코 정신 자체가 아니며,'그것'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에 의한 것이다.
정신이 자기에게 열려 있는 세계를 향하여 마주 나아가 그 세계에 자기를 바쳐서 세계와 그 세계에 속하여 자기를 구원할 수 있을 때,정신은 참으로 '자기 자신'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 산만하고 약화되고 변질되고 철저하게 모순에 빠진 지성이 다시 정신의 본질,곧 '너'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것'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무제한으로 지배하고 있다.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모든 '물리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또한 자기 경험 안에서 이미 발견되었거나 또는 발견되는 모든 '심리적'인 사건도 필연적으로 인과의 계율로 간주된다.
그 중에서 어떤 목적 설정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건들까지도 역시 '그것'의 세계에 연속체를 이루는 일부로서 인과율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인과율이 '그것'의 세계에서 무한정한 지배력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의 과학적 질서를 위해서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억압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그것'의 세계에만 속박되어 있지 않고,거기에서 벗어나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관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의 세계에서 '나'와 '너'는 서로 자유롭게 마주 서 있으며,어떠한 인과율에도 얽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은 상호 관계에 들어선다.
이 관계의 세계 속에서 사람은 자기의 존재 및 보편적 존재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관계를 알며 '너'의 현존을 아는 사람만이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결단하는 사람만이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는 '너'의 면전에 나아간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관계의 목적은 관계 자체,곧 '너'와의 접촉이다.
왜냐하면 '너'와의 접촉에 의하여 '너'의 숨결,곧 영원한 삶의 입김이 우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 서 있는 사람은 현실에 관여한다.
즉 그는 존재에 그저 맞닿아 있는 것도 아니고,존재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존재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현실은 하나의 작용이다.
나는 그것을 내 소유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 작용에 관여하고 있다.
관여가 없는 곳에는 현실이 없다.
자기 독점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현실이 없다.
관여는 직접적으로 '너'와 접촉하는 것이며,그럴수록 그만큼 더 완전하다.
-마르틴 부버,「나와 너」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오가면서 여름 무더위가 한창이다.
위세 등등한 여름 하늘을 지배하는 염제(炎帝)를 피해 한적하게 피서를 즐기고 싶다면 책장 사이로 난 오솔길을 총총히 걸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활자의 수풀을 구비구비 지나는 여러 갈래의 오솔길 중에서도 특히 정갈한 느낌이 드는 길을 하나 소개하자면 마르틴 부버의 글이 있다.
사람 얼굴에는 그가 타고난 것과 그가 만들어 온 것들이 함께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마르틴 부버의 사진은 성성한 송충이 눈썹 아래 자리 잡은 고요한 샘물 같은 눈이 항상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의 눈만큼이나 깊고 묵상적인 그의 글을 읽어 보노라면 사나운 여름철 더위도 어느덧 가실 것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 1878~1965)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 사상가로서,유명한 랍비이자 사업가였던 할아버지 솔로몬 부버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유대적 신비주의 유산을 물려받았고,성장해서는 빈,라이프치히,취리히,베를린 대학 등지에서 미술사와 철학을 공부하면서 사상적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인간의 실존과 종교철학,사회사상 등 다방면에서 적극적인 연구 활동을 했던 마르틴 부버는 '인간 문제'(1948) '유토피아에의 길'(1950) '사회와 국가'(1952) 등을 비롯하여 여러 저서를 남겼지만,무엇보다도 그만의 독특한 고유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이자 여름철 피서를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은 '나와 너(Ich und Du)'이다.
'나와 너'는 제목이 워낙 특이해 우선 표제 하나만으로도 기억에 강하게 남는 책인데,이 책 제목이 곧 그대로 부버 사상의 요체이기도 하다.
부버는 세상에는 '나와 너(I-You)'의 관계와 '나와 그것(I-It)'의 관계가 존재하는데,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도구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대상이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일시적이고 기계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가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관계로서,무엇과도 바꿔질 수 없는 유일한 '나'와 대체 불가능한 '너'가 깊은 신뢰 속에서 존재한다.
부버는 인간이 자신의 참다운 내면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관계인가 '나와 그것'의 관계인가는 나의 상대방만이 달라지는 차이뿐만 아니라,'나' 또한 본질적으로 다르게 존재한다.
만약 내가 '나와 그것'의 관계를 맺는다면,그 관계는 나에게 있어서조차 도구로서 존재하는 나의 한 단면만 보여주지,나의 참다운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와 너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너와 더불어 현실에 참여한다. 나는 너와 더불어 현실을 나눠 가짐으로 말미암아 현존적 존재가 된다"고 설파한 부버는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부버의 관계지향적 실존주의 철학은 흔히 '대화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엄숙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진솔한 대화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부버는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그 안에서 찾고자 하였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주장하던 부버는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잃어버리는 현대의 비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참된 관계와 대화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는 참다운 삶은 인격체가 조우하고 교섭하면서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모든 만남의 연장선은 '영원자 너(하나님)'에게 향한다고 말하면서 유대적 신비주의의 일면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부버에 의하면,만남은 개인적 경험이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마치 신의 은총처럼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직관적 판단에 가까운 것이다.
만남은 영혼의 한가로움 속에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영적 합일(合一) 또는 고양(高揚)을 의미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과 하나님 관계의 비유적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어느 경우에도 참된 부름은 참된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라는 마르틴 부버의 철학은 시온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한 그의 인생 행로와도 연관을 맺고 있다고 평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유대교 철학과 윤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38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히브리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아랍인과 유대인의 상호이해 증진을 위하여 노력했던 부버는 '나와 너'의 대화 철학을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서도 펼치고자 하였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대부분이 '나와 그것'의 관계에 불과하지 부버가 주장하는 '나와 너'의 관계는 드물디 드물다.
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들은 모두,너는 나에게 그리고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무엇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나와 너(Ich und Du)'의 내용은 우물처럼 깊지만 다행히 책의 분량은 그리 길지 않으니 마르틴 부버의 글을 한번 꼼꼼하게 읽으면서 보내는 휴양의 시간을 권하고 싶다.
☞ 기출 제시문 (서강대학교 2006학년도 정시 논술)
세계는 사람이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에 따라서 사람에게 이중적이다.
사람의 태도는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의 이중성에 따라서 이중적이다.
근원어는 낱개의 말이 아니고 짝말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나-너'라는 짝말이다.
또 하나의 근원어는 '나-그것'이라는 짝말이다.
'나',그 자체란 없으며 오직 근원어 '나-너'의 '나'와 근원어 '나-그것'의 '나'가 있을 뿐이다.
사람이 '나'라고 말할 때 그는 그 둘 중의 하나를 생각하고 있다.
그가 '나'라고 말할 때 그가 생각하고 있는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또한 그가 '너' 또는 '그것'이라고 말할 때 위의 두 근원어 중 어느 하나의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중략…)
정신이 독자적 삶 속에 작용해 들어가는 것은 결코 정신 자체가 아니며,'그것'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에 의한 것이다.
정신이 자기에게 열려 있는 세계를 향하여 마주 나아가 그 세계에 자기를 바쳐서 세계와 그 세계에 속하여 자기를 구원할 수 있을 때,정신은 참으로 '자기 자신'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 산만하고 약화되고 변질되고 철저하게 모순에 빠진 지성이 다시 정신의 본질,곧 '너'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것'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무제한으로 지배하고 있다.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모든 '물리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또한 자기 경험 안에서 이미 발견되었거나 또는 발견되는 모든 '심리적'인 사건도 필연적으로 인과의 계율로 간주된다.
그 중에서 어떤 목적 설정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건들까지도 역시 '그것'의 세계에 연속체를 이루는 일부로서 인과율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인과율이 '그것'의 세계에서 무한정한 지배력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의 과학적 질서를 위해서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억압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그것'의 세계에만 속박되어 있지 않고,거기에서 벗어나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관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의 세계에서 '나'와 '너'는 서로 자유롭게 마주 서 있으며,어떠한 인과율에도 얽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은 상호 관계에 들어선다.
이 관계의 세계 속에서 사람은 자기의 존재 및 보편적 존재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관계를 알며 '너'의 현존을 아는 사람만이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결단하는 사람만이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는 '너'의 면전에 나아간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관계의 목적은 관계 자체,곧 '너'와의 접촉이다.
왜냐하면 '너'와의 접촉에 의하여 '너'의 숨결,곧 영원한 삶의 입김이 우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 서 있는 사람은 현실에 관여한다.
즉 그는 존재에 그저 맞닿아 있는 것도 아니고,존재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존재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현실은 하나의 작용이다.
나는 그것을 내 소유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 작용에 관여하고 있다.
관여가 없는 곳에는 현실이 없다.
자기 독점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현실이 없다.
관여는 직접적으로 '너'와 접촉하는 것이며,그럴수록 그만큼 더 완전하다.
-마르틴 부버,「나와 너」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