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가 도화선…30년 철권 神政체제·경제난에 불만 폭발

[Focus] 이란 反정부 시위는 변화에 목마른 국민들의 절규
지난 12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후 이란은 1979년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끌었던 이슬람혁명 이후 30년 만에 최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란 내부에서 개혁파로 꼽히는 미르 후세인 무사비가 이길 것이란 예상을 깨고 보수 강경파인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현 대통령이 당선됐다는 소식에 수천명의 국민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테헤란 거리로 뛰어나와 2주 넘게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대에 대한 정부 측의 유혈진압 장면은 연일 외신의 머리기사를 장식하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등 서방세계 각국 지도자들도 일제히 이란 정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란의 이번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1차적 원인은 부정선거 시비지만, 실제로는 수십년간 이어진 철권 신정(神政)체제와 경제난에 대한 국민들의 오랜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입헌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바뀐 이후 대통령 및 의회 의원의 직선제를 채택했지만, 모든 국정의 최종 책임권은 이슬람 성직자인 최고지도자가 갖는다.

헌법을 해석하고 선거를 관할하는 헌법수호위원회 멤버 12명의 절반과 대법원장,최고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와 정규군의 사령관을 임명한다.

또 모든 라디오와 TV방송국의 최고책임자도 최고지도자에게 임면권이 있다.

대선 결과도 그의 추인이 필요하다.

당연히 군과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핵개발 문제를 비롯한 국가 안보와 주요 외교정책을 최종 결정한다.

현재 최고지도자는 20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어 온 아야툴라 알리 하메네이다.

이란에서 최고지도자는 가톨릭의 교황처럼 '신의 대리인'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는다.

최고지도자는 이슬람 고위 성직자 86명으로 구성된 전문가회의에서 선출된다.

따라서 전문가회의가 이론적으로는 최고지도자를 선출 및 감시 · 해임하는 권한을 갖지만 실제로는 최고지도자가 사망했을 때 후임자를 뽑는 일에만 관여할 뿐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와 신정체제 형식이 기묘하게 결합돼 있는 구조인 셈이다.

이란의 신정체제는 단순한 정치 시스템이 아니다.

종교와 이념 그리고 정치가 합일된 체제다.

일반 국민들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까지 관장한다.

이런 신정체제 아래서 이란은 오랫동안 폐쇄적인 분위기 속에서 표현의 자유가 상당히 제한돼 왔다.

특히 '여성은 머리와 몸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며 여성들의 사회 활동을 철저히 억압했고, 여성의 정치 참여도 사실상 금지했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트위터와 같은 블로그 문화가 이란 청년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자신의 의견을 펼치고자 하는 이란 국민들의 욕구가 점점 커졌다.

이란의 경제난도 심각하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이란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올해 3.1%,내년 3.4%로 전망되는데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아랍권 내 3대 강대국과 비교해 최저 수준이다.

물가상승률도 이란이 가장 높다.

이란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26% 급등한 데 이어 올해는 18%,내년에는 15%가량 급등할 것이란 전망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이번 반정부 시위가 제2의 이슬람 혁명으로 번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우선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는 무사비가 현 체제의 붕괴를 원하지 않고 있다.

무사비는 이슬람 혁명의 주역 호메이니의 측근이었으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인 1981~1989년 총리를 지냈다.

또 이번 시위가 체제 전복까지 노리는 한차원 높은 단계로 가기 위해선 전국적인 조직망도 필요한데 아직까진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결국 '체제는 유지하되 민주주의의 범위를 더 넓혀가고 경제난 해결에 더욱 신경써야 한다'는 게 이번 시위가 내세우는 주장의 골자다.

아랍권 국가들은 이란 시위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며 매우 예민하고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동안 아랍 현대사에서 이란이 체제 변혁을 이끌어 온 태풍의 눈이었기 때문이다.

이란은 1906년 입헌혁명으로 중동 국가 중 최초로 근대화 혁명을 일으켰다.

또 1951년엔 석유국유화법을 통과시키며 아랍권 전체에 자원민족주의를 확산시켰다.

1979년 혁명 이후 아랍권 국가들에 이슬람원리주의를 퍼뜨린 것도 이란이다.

대부분 세습왕정 체제인 아랍권 나라들은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자칫 자국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크게 우려하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를 통해 이란에서 이슬람 제도와 서구식 민주주의가 결합하는 새로운 정치실험이 성공할 경우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친밀하든 적대적이든 역사적으로 이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외교 관계를 이어온 미국의 입장도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미국은 우선 이란 정부의 시위대 강경 진압에 대해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4일 "어떤 철권(iron fist)도 전 세계가 정의롭고 평화로운 시위자들의 실상을 볼 수 없도록 차단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고 보수파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물론 이란 신정체제의 핵심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까지 직설적 표현으로 겨냥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상당수의 이란 국민들이 이번 선거가 합법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라며 "시위가 국지적인 것도 아니고,이곳저곳에서 나오는 불평 수준도 아니다"고 선거 합법성에 대한 의문을 거듭 지적했다.

시위 도중 총격으로 사망한 이란 여성 네다의 동영상을 언급하면서 "이 같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를 강력히 비난하고 무고한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미국 국민과 함께 애도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그러나 현재로선 실질적으로 이란 시위에 대해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자칫 시위대가 반미 세력으로 몰려 더욱 큰 탄압을 받고, 이란 정부의 반미 성향이 더 강해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중동 및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대(對) 이슬람 화해정책을 펴는 데도 영향을 줄 수 있어 신중론에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이란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중동평화 협상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미국이 신중하게 대응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