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정당 약진… 파시즘 부활 우려도
[Global Issue] 경제위기에 우파 승리로 끝난 유럽의회 선거
제7기 유럽연합(EU) 의회선거가 '우파승리,좌파몰락'으로 막을 내리면서 후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식 복지국가 자본주의 체체가 유럽의 지배모델로 떠오른 가운데 영국 정부는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유럽 좌파진영에서는 극우정당의 약진에 과거 대공황 때처럼 파시즘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 경제 중시한 중도우파의 부상

지난 4~7일 실시된 EU의회선거에서 중도우파의 승리는 독일과 프랑스식 복지국가자본주의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영국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9일 평가했다.

EU 의회선거 최종 결과 보수성향의 중도우파인 '국민당그룹'(EPP-ED)은 전체 734석 가운데 264석을 차지하며 사회당그룹(183석)과 중도 자유민주당(84석), 그리고 녹색당(50석)을 압도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서 유권자들은 글로벌 경제위기에도 집권당인 중도우파정당에 힘을 실어줬다.

전통적으로 국가주의와 극우성향이 짙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에서도 보수층이 유럽의회의 주류로 등장했다.

FT는 이번 선거에서 글로벌 경제위기가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며 독일과 프랑스 중심의 복지국가자본주의가 유권자들로부터 글로벌 금융위기를 타개할 체제로 선택받았다고 해석했다.

원래 중도우파지도자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무책임한 자본주의 체제의 옹호자로 여겨질 위험에 처했던 게 사실이다.

이들은 그러나 영미식 자본주의체제를 비판하면서 최악의 경기침체 속에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빈곤층과 시민을 돌보고 지키는 복지국가의 면모를 보여줘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분석이다.

실제 EU 정책입안자들이 지난 6개월 동안 내놓았던 4000억유로의 경기부양대책은 대부분 실업수당 지급,의료지원 등 사회안전망 지출이 주류를 이룬다.

이에 반해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로 표출된 자본주의 위기가 좌파를 정당화한다는 중도좌파와 사회주의 정당의 호소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 거세지는 선거 후폭풍

이번 선거의 최대 승자인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지난 11일 파리에서 만나 오는 18일 열리는 유럽 정상회담의 의제를 조율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금융규제 강화와 기후변화정책 비용 분담이 핵심 의제로 다뤄졌고,주제 마누엘 바로수 유럽연합 위원장의 2차 임기 연장안도 제안됐다.

FT는 사르코지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의 입김이 세지면서 프랑스와 독일식 개혁이 본격 추진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반해 영국에서는 고든 브라운 정부의 위기가 고조됐다.

집권당인 노동당은 보수당뿐 아니라 반EU성향의 극우정당인 독립당에도 밀려 3위로 처지는 굴욕을 당했다.

이 때문에 1년도 채 남지 않은 차기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가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 파시즘 부활하나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또 하나의 두드러진 현상은 극우파의 약진이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인구비례에 따라 유럽연합 의원 736명을 뽑는 이번 선거에서 극우파 정당은 8석을 늘려 34석을 차지했다.

지난 선거보다 전체 의석이 49석 준 것을 고려하면 뚜렷한 약진이다.

유럽의회에서 9개국 출신 25명 이상이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어,이들의 행보가 주목된다.

비록 중도우파나 중도좌파에 비하면 여전히 소수지만,반이민 · 반이슬람 · 강경 민족주의 강령을 내건 극우파의 승리는 새로운 파시즘 도래의 징후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9일 "파시스트가 돌아왔다"며 "세계화의 충격과 경기 후퇴,사회 변화 등이 전통 정치에 대한 불신과 공포의 씨를 뿌렸다"고 전했다.

정치분석가 마시모 프랑코는 9일 FT 인터뷰에서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등에서 특히 심화되고 있는 외국인 혐오세력을 합법화해 준 선거 결과"라고 분석했다.

경제위기 속에서 이민자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반감과 저소득층 이민자의 범죄 등에 따른 치안 불안 우려가 극우파의 표로 연결됐다는 설명이다.

"영국 일자리는 영국인에게" "외국인을 먼저 해고하라"는 구호가 이런 정서를 잘 보여준다.

영국의 그레이엄 왓슨 유럽의회 의원은 "경기침체와 이민자들의 사회통합 실패가 외국인 혐오를 부르짖는 정당의 선출로 이어진 것은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한편 극우파의 득세를 파시즘의 복귀로까지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제3제국,새로운 역사'의 저자 마이클 벌리는 영국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민주주의 경험이 짧은 동유럽 등의 현상이 우려스럽기는 하지만,극우파는 그동안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공포에 떨 필요는 없다"고 분석했다.

리처드 오베리 에세스터대 교수는 "극우파는 새로운 사회질서나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며 "파시즘의 복귀라기보다는 이민과 외국인,유럽통합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 사상 최저 투표율

이번 선거에서는 역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해 유럽의회의 대표성 논란도 일고 있다.

유럽의회 사무국의 잠정 집계에 따르면 예상 투표율은 43%대로 종전 최저였던 2004년 선거보다 2%포인트 떨어졌다.

1979년 초대 선거 이후 유럽의회 선거 투표율이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어 5년 후 치러지는 다음 선거에서는 투표율이 30%대로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등 EU를 대표하는 회원국들의 투표율도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유권자들이 경제위기로 인해 국내 문제도 아닌 EU 정치 문제에 관심을 쏟을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 한-EU FTA에는 긍정적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가 막바지 협상을 진행 중인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유럽의회 선거라는 정치 일정이 그동안 EU 측의 협상 태도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면 이제는 정치 일정상 불확실성이 제거됐기 때문에 오는 26일 예정된 한-EU 통상장관 회담에서 EU 측이 좀더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할 토대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더욱이 선거가 자유무역주의 성향이 강한 우파의 승리로 끝난 상태여서 EU 내부에서 FTA 타결론이 더욱 힘을 받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원 김득갑 전문위원은 "좌파가 승리했다면 고용안정이나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했을텐데,우파의 승리로 인해 좌파의 논리가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환경이 조성됐다"며 "FTA 최종 타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유럽의회 선거 결과로 인해 FTA 체결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의 재임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점도 낙관론에 힘을 싣고 있다.

바로수 위원장은 2006년 '글로벌 유럽'이라는 EU 집행위 차원의 보고서를 통해 EU가 근접국,옛 식민지 국가에서 벗어나 원거리 국가와의 FTA 체결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던 인물.

실제로 바로수 위원장은 이후 우리나라와 인도,아세안(ASEAN) 등과 FTA 협상에 적극 나섰고,특히 한국과의 진척 속도가 가장 빨라 타결에 상당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캐서린 애슈턴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최근 한-EU FTA 타결을 최우선 현안으로 꼽고,내달 체코로부터 EU 이사회 순번의장국 지위를 넘겨받는 스웨덴도 FTA 타결에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보내는 등 협상을 둘러싼 외부 환경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