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이란 이름의 정체성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36. 구효서「카프카를 읽는 밤」
⊙ 민족은 구시대의 유물인가

인류가 진보해온 역사를 거칠게 언급한다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화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현상이 그곳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곳에까지 미치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지금 겪고 있는 경제 위기만 하더라도 뉴욕에서 시작된 일이 어느 새 유럽으로,그리고 아시아로 급속하게 번지는 것을 보면 현대인이 살아가는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금융 위기를 경험한 탓에 잠시 주춤한 면도 있지만 세계화는 실상 적지 않은 인류가 지향해오던 삶의 조건이기도 했다.

비판적인 목소리도 거세지만 지금도 수많은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자유무역협정의 경우 세계화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규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 경제적인 경계를 무너뜨리고 자본을 자유롭게 이동하게 하며 투자의 장벽을 과감히 제거해 경제를 활성화시키자는 것이 세계화의 가장 기본적인 메커니즘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회 문화적으로도 세계화는 진행 중이다.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는 경제적인 분야만이 아니라 문화 · 예술의 분야에서도 적용되는 것이어서 자국의 문화 · 예술산업이 글로벌 환경에서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각국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높은 영어에 대한 관심 역시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정치 · 경제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민족과 국가의 경계가 희미해졌을 뿐 아니라 그것은 과거처럼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될는지도 모른다.

⊙ 말과 글의 혼란에 빠지다

경제적인 풍요와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민족이라든지,이념과 같은 공동체적인 가치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소설에서도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민족문학적 주제의식은 약화되고 대신 개인의 사적 경험을 중시하는 소설들이 대거 출판되었고 또 읽혀나갔다.

세계화를 추구하며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민족적 정서가 이전처럼 폭넓은 공감을 얻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학이론가들은 근대소설의 양식이 종말을 맞은 게 아니냐는 우려를 표명한 적이 있었고 몇몇 소설가들은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한편으로 자신들의 고뇌를 솔직하게 다룬 소위 소설가 소설들을 창작하기에 이른다.

구효서의 소설 「카프카를 읽는 밤」도 그 중 한 편이다.

작품의 서술자는 다름 아닌 소설가 바로 자신이다.

그는 종종 중이염을 앓게 되었는데 그것은 소설을 창작하는 데 상당히 큰 장애로 작용한다.

그는 일단 중이염을 앓게 되면 목소리가 자기 목소리 같지 않게 굉장히 낯선 음성으로 들리게 되고,나중에는 말의 내용조차 장애를 일으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는 그런 현상이 글에까지 전염이 되어 주부와 술부의 상응관계라든지 시제라든지 하는 게 제멋대로 되거나,'지평선'을 '수평선'으로 쓰고,심지어 '있었다'는 서술어를 한 문장에 세 번 중복해 쓸 정도로 언술체계가 막 무너지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당연히 잡지에 연재하던 소설 쓰기가 어려워졌고 현재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소설을 떠나 해남 대흥사에 내려와 있는 중이다.

작품의 서술자인 소설가가 중이염을 통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자신의 말과 글을 낯설게 느끼는 데에 있다.

이야기를 창조해야 하는 사람이 자신의 표현수단을 낯설게 느낀다면 어떻게 작품을 창작하겠는가.

결국 작품 속 소설가가 앓고 있는 중이염이란 전에 없이 낯설어진 말과 글에 대한 불편함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자기 말과 글에 대해 혼란에 빠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대흥사에서 만난 한 낯선 여인에 의해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 말과 글,사유와 삶의 보루

작가는 자기가 머물고 있는 모텔에 함께 투숙하고 있는 한 여인을 식당에서 만나게 된다.

관광객이 끊긴 비수기에 모텔에 숙박하는 사람은 단 둘뿐이었는데 둘은 우연히 길 위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작가는 얼결에 중이염 증상을 이야기하며 그것 때문에 글쓰기가 곤란하다는 푸념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녀 역시 소설가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재일 한국인 2세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 역시 서술자인 작가와 마찬가지로 언술체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전 소설을 썼던 게 아녜요.

그저 답답해서 무언가를 써냈을 뿐이지요.

무얼 쓰겠다는 생각 이전에 벌써 쓰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5년을 줄곧 써온 셈이지요."

"그래도 오래 쓰다 보면 탈피하고 싶어지지 않나요?" (중략)

"탈…피하고 싶지만 될 수가 없어요.

자기 영토에서 문학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에요.

영토를 갖지 못한 작가는 소…외감에서 벗어나기 힘들거든요.

숙…명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건지도 몰라요.

보세요,제가 일본에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제…재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재일한국인 2세의 재일한국인 이야기.

여기에서 그들은 부분적인 문학적 효용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발견하고 인정하게 된 거죠. (중략)

무슨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어요.

그러나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제가 구사하고 있는 언어에서 발견됐어요.

식민시대 한민족의 언어를 혹독하게 지배했던 원수의 언어,지금은 제 의식과 재일 소수민족들의 삶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는 지배자의 언어를 가지고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을까.

문장이 뒤틀리고 얘기가 빗나가 괴상한 몰골의 소설들만 나왔어요.

물론 아무도 읽지 않았죠.

저들의 언술체계가 내 안에서 막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던 거예요.

-구효서 「카프카를 읽는 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그녀는 소설을 쓰게 된 것이 '어머니가 소리 없이 얻어맞는 것을 보고 나서'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친아버지가 죽고 난 뒤 어머니가 일본인 남자에게 재가한 뒤 남편에게 끝없이 폭행을 당했는데 그 광경을 엿보면서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종이 위에 쏟아놓았던 것이 소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그녀는 일본에서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적 성공을 거뒀지만 더 이상 재일 소수민족에 대한 일본인들의 천박한 호기심과 흥미를 충족시키는 작가가 되지는 않겠다며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 후 자신의 언술체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가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한 혼란과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지배자의 언어'라는 자각은 그녀의 창작 자체를 방해했던 것이다.

작품 말미에 작가는 카프카를 잠시 떠올린다.

그리고 그는 카프카의 여러 작품들이 난해하고,비정상적이고 끊임없이 착각에 빠져들게 만드는 글,언술체계가 무너진 것만 같은 글이 된 까닭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유태인 카프카 역시 프라하에 남아 독일인의 언어로 소설들을 써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창작하는 자체가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돌려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 끝에 본인이 창작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에 잠기게 된다.

세계화의 급류 속에서 '민족' '민족의식' '민족주의' '민족어'와 같은 개념들은 20세기의 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또 일각에서 비판하고 있듯이 그것이 일정하게 폐쇄성과 배타성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의 소설에서 보듯이 자아의 말과 글을 가능하게 하고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기능한다.

삶이 기본적으로 말과 글,그리고 생각 없이 가능하지 않다면 어쩌면 우리는 민족의 개념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계화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정체와 뿌리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