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공감의 가치는 관심의 원근법을 따른다"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 헤드의 말이 있다.
쟁쟁한 철학자들이 그토록 많은데 화이트 헤드는 왜 섭섭하게시리 플라톤만 그렇게 손꼽는 것일까?
화이트 헤드(이 분의 이름도 사뭇 재미있다)가 혹시 플라톤의 몸매를 흠모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명망 높은 아테네 귀족집안의 자제였던 플라톤의 본명은 원래 아리스토클레스로서,사람들이 그를 흔히 칭하는 이름인 플라톤은 체격이 좋은 몸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플라톤(platon)이라는 말은 '넓다(platys)'에서 파생한 단어로 '어깨가 넓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경기장을 드나들며 격투기를 즐겼던 아리스토클레스의 넓은 어깨와 떡 벌어진 가슴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플라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인데,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몸짱' 되시겠다.
이러하니 만약 철학자들을 그들의 사상이 아니라 몸매로 줄 세운다면 단연 플라톤이 앞줄에 설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 헤드가 비실비실한 철학자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플라톤을 역성든 것일까?
꽤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니다.
화이트 헤드가 서양철학사를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고 평가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가지는 특이성 때문이다.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고자 했던 플라톤은 크고 작은 대회에서는 몇 번 우승했지만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지는 못하고,대신 소크라테스를 만나 철학 공부에 전념한다.
그런데 그간 운동을 지나치게 하면서 사람이 좀 단순 과격해졌는지 그 철학 사상 또한 이분화된 단순 논법을 펼치는데,그의 주장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성 중심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진정한 인식과 도덕적 판단은 이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성우위 논리가 서구를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서양 철학사에서는 이성만이 진정한 인식 기능이고 도덕적 주체라고 보는 사조가 우세했다.
그래서 서양철학사를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기를 든 철학자가 있다.
감정을 인간 본연의 능력이자 삶에 있어 필수적인 기능으로 받아들인 독일의 현상학자인 막스 쉘러(Max Scheler · 1874~1928)다.
쉘러는 뮌헨대학에서 의학과 철학을,베를린대학에서 생철학과 사회학을 공부했으며,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와 하빌리타치온을 받고 1907년 뮌헨대학 강사가 된 후 1919년 퀼른대학 교수,1928년 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가 되었다.
쉘러의 학문적 노정을 살피면 무슨 공부를 이리 다양하게 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인데 그는 그러한 학업에 어울리게 윤리 · 사회 · 예술 · 과학 등의 영역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때까지 학문 영역의 밖에 놓여 있던 여러 가지 문제를 대담하게 학문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여러 현상들의 구체적 해명을 통해 독자적인 학문적 업적을 쌓아 올렸다.
엄격한 이성주의적 윤리학을 뒤집어 엎고,감정의 가치 직관만이 선(善)을 보장한다는 감정론적 윤리학을 전개한 쉘러를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현대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이러한 쉘러가 '철학적 윤리학을 위한 현상학적인 토대를 부여'하려는 목적으로 쓴 책이 있다.
1912년 초판을 출간하고 1922년에 많은 보완을 거쳐 지금의 형태로 출판한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Wesen und Formen der Sympathie)'이라는 책이다.
쉘러는 이성만이 아니라 감정에도 그 나름의 논리와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고 감정론적 철학을 전개하면서 감정의 가치질서를 밝히고자 하였다.
쉘러는 감정적 느낌이 인식의 진정한 근원이자 윤리의 기초라고 말하면서,느낌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허위적이라고 비판했다.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은 총 세 개의 장으로 편제되었는데,제1장은 동감,제2장은 사랑과 미움,제3장은 타인의 자아에 관해 이뤄져 있다.
그런데 쉘러가 동감을 인간의 선천적 기능으로 이해하면서 정교한 논의를 펼치긴 했지만,윤리의 기초를 감정으로 바라본 서구 철학자들은 쉘러 이전에도 분명히 존재하였다.
흄,애덤 스미스,루소,쇼펜하우어 등 일군의 철학자들은 타인에 대한 동정심과 동감을 선악 판단의 기초로 보았다.
그러나 쉘러는 이들이 펼친 동감 윤리학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쉘러가 보기에 이들은 '동감을 타인이 느끼는 그대로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분별 없는 감정의 반작용'에 불과한 것으로 착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쉘러는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안에서 다양한 동감의 종류와 형태들을 분류하고 그 우열을 가리며 진정성 여부를 밝히려고 한다.
그는 동감의 다양하고 미묘한 차이를 정교하고 섬세하게 분석하면서 동감을 '뒤따라 느낌' '감정 전염' '합일적 감정' '진정한 동감'의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쉘러가 진정한 동감과 사이비 동감을 까탈스럽게 구분하는 이유는 '진정한 동감만이 진정한 선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동감이란 타인의 감정 체험에 참여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진정한 동감은 타인(他人)으로서의 타인을 지향한다.
즉 타인과의 동일화(同一化)는 결코 동감이 아니다.
이러한 진정한 동감은 감정 상태가 아닌 감정 기능으로서,경험적으로 획득되는 기능이 아니라 선천적인 능력이다.
따라서 스스로 체험한 것만 동감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류다.
진정한 동감은 자신의 삶의 확장과 풍부화의 계기로서 작용하며 능동적,창조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사이비 동감은 수동적이며 기만적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기 반응을 염려하는(자신의 약한 신경이 염려돼) 가짜 동감은 타인의 기쁨이나 고통보다도 자신의 기쁨과 고통에 관심을 둔다는 것으로 윤리학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자아투사적인 감정이나 실제적인 고통을 겪는 감정 전염 역시 동정이 아니며,자신의 체험을 재생하는 감정의 재생산(再生産)은 동감을 오히려 혼탁하게 만든다.
막스 쉘러는 동감의 창조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서 사랑에 관해서도 심오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동감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사랑하는 만큼 동감한다'는 말이 궁금하고,'동감'과 '사랑'의 본질적 차이를 해명하는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쉘러의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을 한번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남에 대해 무엇을 얼마만큼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비단 윤리학에서만 거론되는 쟁점이 아니라 소설과 드라마 혹은 애니메이션에서까지 두루 등장하면서 누구 하나 속 시원한 결론을 못 내리고 고민하는 주제가 아니던가.
☞ 기출 제시문 (고려대학교 2009학년도 정시 논술 : 고려대학교에서는 출제의도에 맞추어 원문을 발췌,편집하였다)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도 오래도록 만나지 않으면 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일본인 1000명의 익사나 러시아인 2000만명의 기아에 관한 기사도 내 아내의 베인 손가락과 위통에 시달리는 어린 아들의 찡그린 표정만큼 나의 동정심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분명 먼 곳의 불행과 가까운 곳의 불행은 우리 마음에 서로 다른 파장을 일으키고,모든 인간적 사랑과 공감,그리고 가치 부여는 관심의 원근법의 지배를 받는다.
어떤 이들은 사랑이 좁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로 확산돼 가고,그와 더불어 사랑의 가치도 증대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자기애보다 동료애가,동료애보다 조국애가,그리고 조국애보다는 인류애가 더욱 가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사랑도 보편화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심의 거리가 변하면서 나타나는 여러 사랑을 제각기 참되다고 인정하지 않고,단지 사랑이라는 동일한 집합의 양적 확장에서 나타난 산물로 여긴다.
즉 강도와 양상을 달리하는 여러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단 하나의 사랑이 그 가치를 증대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사랑의 가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범위가 커질수록 사랑의 대상에 대한 관심의 거리도 벌어지고,그에 비례해 집합 안에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가치들도 주변화된다는 사실이다.
가족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는 인격적 가치로 간주되던 것이 더 확장된 공동체에 대한 사랑에서는 그러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크기나 그 집합에 속한 사람들의 수와는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의미상의 거리이고,그 거리가 부여하는 가치의 내용이다.
물론 인류 공동체는 어떤 민족이나 국가보다 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지금-여기'에 속박된 인간이 정말 그런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모든 개인은 인류 공동체의 구성원이지만 동시에 더 작고 더 친밀한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며,공동체 각각의 가치를 구현하며 살고 있다.
그런 개인에게 가까운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처럼,아니 그보다 더 강하게 저 먼 인류를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류애보다 조국애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조국은 인류보다 구체적인 가치의 내용을 개인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민족보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 헤드의 말이 있다.
쟁쟁한 철학자들이 그토록 많은데 화이트 헤드는 왜 섭섭하게시리 플라톤만 그렇게 손꼽는 것일까?
화이트 헤드(이 분의 이름도 사뭇 재미있다)가 혹시 플라톤의 몸매를 흠모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명망 높은 아테네 귀족집안의 자제였던 플라톤의 본명은 원래 아리스토클레스로서,사람들이 그를 흔히 칭하는 이름인 플라톤은 체격이 좋은 몸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플라톤(platon)이라는 말은 '넓다(platys)'에서 파생한 단어로 '어깨가 넓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경기장을 드나들며 격투기를 즐겼던 아리스토클레스의 넓은 어깨와 떡 벌어진 가슴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플라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인데,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몸짱' 되시겠다.
이러하니 만약 철학자들을 그들의 사상이 아니라 몸매로 줄 세운다면 단연 플라톤이 앞줄에 설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 헤드가 비실비실한 철학자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플라톤을 역성든 것일까?
꽤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니다.
화이트 헤드가 서양철학사를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고 평가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가지는 특이성 때문이다.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고자 했던 플라톤은 크고 작은 대회에서는 몇 번 우승했지만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지는 못하고,대신 소크라테스를 만나 철학 공부에 전념한다.
그런데 그간 운동을 지나치게 하면서 사람이 좀 단순 과격해졌는지 그 철학 사상 또한 이분화된 단순 논법을 펼치는데,그의 주장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성 중심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진정한 인식과 도덕적 판단은 이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성우위 논리가 서구를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서양 철학사에서는 이성만이 진정한 인식 기능이고 도덕적 주체라고 보는 사조가 우세했다.
그래서 서양철학사를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기를 든 철학자가 있다.
감정을 인간 본연의 능력이자 삶에 있어 필수적인 기능으로 받아들인 독일의 현상학자인 막스 쉘러(Max Scheler · 1874~1928)다.
쉘러는 뮌헨대학에서 의학과 철학을,베를린대학에서 생철학과 사회학을 공부했으며,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와 하빌리타치온을 받고 1907년 뮌헨대학 강사가 된 후 1919년 퀼른대학 교수,1928년 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가 되었다.
쉘러의 학문적 노정을 살피면 무슨 공부를 이리 다양하게 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인데 그는 그러한 학업에 어울리게 윤리 · 사회 · 예술 · 과학 등의 영역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때까지 학문 영역의 밖에 놓여 있던 여러 가지 문제를 대담하게 학문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여러 현상들의 구체적 해명을 통해 독자적인 학문적 업적을 쌓아 올렸다.
엄격한 이성주의적 윤리학을 뒤집어 엎고,감정의 가치 직관만이 선(善)을 보장한다는 감정론적 윤리학을 전개한 쉘러를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현대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이러한 쉘러가 '철학적 윤리학을 위한 현상학적인 토대를 부여'하려는 목적으로 쓴 책이 있다.
1912년 초판을 출간하고 1922년에 많은 보완을 거쳐 지금의 형태로 출판한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Wesen und Formen der Sympathie)'이라는 책이다.
쉘러는 이성만이 아니라 감정에도 그 나름의 논리와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고 감정론적 철학을 전개하면서 감정의 가치질서를 밝히고자 하였다.
쉘러는 감정적 느낌이 인식의 진정한 근원이자 윤리의 기초라고 말하면서,느낌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허위적이라고 비판했다.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은 총 세 개의 장으로 편제되었는데,제1장은 동감,제2장은 사랑과 미움,제3장은 타인의 자아에 관해 이뤄져 있다.
그런데 쉘러가 동감을 인간의 선천적 기능으로 이해하면서 정교한 논의를 펼치긴 했지만,윤리의 기초를 감정으로 바라본 서구 철학자들은 쉘러 이전에도 분명히 존재하였다.
흄,애덤 스미스,루소,쇼펜하우어 등 일군의 철학자들은 타인에 대한 동정심과 동감을 선악 판단의 기초로 보았다.
그러나 쉘러는 이들이 펼친 동감 윤리학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쉘러가 보기에 이들은 '동감을 타인이 느끼는 그대로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분별 없는 감정의 반작용'에 불과한 것으로 착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쉘러는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안에서 다양한 동감의 종류와 형태들을 분류하고 그 우열을 가리며 진정성 여부를 밝히려고 한다.
그는 동감의 다양하고 미묘한 차이를 정교하고 섬세하게 분석하면서 동감을 '뒤따라 느낌' '감정 전염' '합일적 감정' '진정한 동감'의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쉘러가 진정한 동감과 사이비 동감을 까탈스럽게 구분하는 이유는 '진정한 동감만이 진정한 선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동감이란 타인의 감정 체험에 참여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진정한 동감은 타인(他人)으로서의 타인을 지향한다.
즉 타인과의 동일화(同一化)는 결코 동감이 아니다.
이러한 진정한 동감은 감정 상태가 아닌 감정 기능으로서,경험적으로 획득되는 기능이 아니라 선천적인 능력이다.
따라서 스스로 체험한 것만 동감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류다.
진정한 동감은 자신의 삶의 확장과 풍부화의 계기로서 작용하며 능동적,창조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사이비 동감은 수동적이며 기만적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기 반응을 염려하는(자신의 약한 신경이 염려돼) 가짜 동감은 타인의 기쁨이나 고통보다도 자신의 기쁨과 고통에 관심을 둔다는 것으로 윤리학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자아투사적인 감정이나 실제적인 고통을 겪는 감정 전염 역시 동정이 아니며,자신의 체험을 재생하는 감정의 재생산(再生産)은 동감을 오히려 혼탁하게 만든다.
막스 쉘러는 동감의 창조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서 사랑에 관해서도 심오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동감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사랑하는 만큼 동감한다'는 말이 궁금하고,'동감'과 '사랑'의 본질적 차이를 해명하는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쉘러의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을 한번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남에 대해 무엇을 얼마만큼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비단 윤리학에서만 거론되는 쟁점이 아니라 소설과 드라마 혹은 애니메이션에서까지 두루 등장하면서 누구 하나 속 시원한 결론을 못 내리고 고민하는 주제가 아니던가.
☞ 기출 제시문 (고려대학교 2009학년도 정시 논술 : 고려대학교에서는 출제의도에 맞추어 원문을 발췌,편집하였다)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도 오래도록 만나지 않으면 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일본인 1000명의 익사나 러시아인 2000만명의 기아에 관한 기사도 내 아내의 베인 손가락과 위통에 시달리는 어린 아들의 찡그린 표정만큼 나의 동정심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분명 먼 곳의 불행과 가까운 곳의 불행은 우리 마음에 서로 다른 파장을 일으키고,모든 인간적 사랑과 공감,그리고 가치 부여는 관심의 원근법의 지배를 받는다.
어떤 이들은 사랑이 좁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로 확산돼 가고,그와 더불어 사랑의 가치도 증대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자기애보다 동료애가,동료애보다 조국애가,그리고 조국애보다는 인류애가 더욱 가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사랑도 보편화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심의 거리가 변하면서 나타나는 여러 사랑을 제각기 참되다고 인정하지 않고,단지 사랑이라는 동일한 집합의 양적 확장에서 나타난 산물로 여긴다.
즉 강도와 양상을 달리하는 여러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단 하나의 사랑이 그 가치를 증대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사랑의 가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범위가 커질수록 사랑의 대상에 대한 관심의 거리도 벌어지고,그에 비례해 집합 안에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가치들도 주변화된다는 사실이다.
가족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는 인격적 가치로 간주되던 것이 더 확장된 공동체에 대한 사랑에서는 그러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크기나 그 집합에 속한 사람들의 수와는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의미상의 거리이고,그 거리가 부여하는 가치의 내용이다.
물론 인류 공동체는 어떤 민족이나 국가보다 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지금-여기'에 속박된 인간이 정말 그런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모든 개인은 인류 공동체의 구성원이지만 동시에 더 작고 더 친밀한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며,공동체 각각의 가치를 구현하며 살고 있다.
그런 개인에게 가까운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처럼,아니 그보다 더 강하게 저 먼 인류를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류애보다 조국애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조국은 인류보다 구체적인 가치의 내용을 개인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민족보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