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은 비판·파괴적인 동시에 재생의 기능을 한다.”

[실전 고전읽기] 20. 라블레「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
프랑스의 문인 미쉘 뷔토르가 다음과 같이 평가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작품은 정녕 프랑스 문학 중에서 가장 어려운 작품이다. 말라르메는 그에 비하면 차라리 쉽기만 하다."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실존주의 작가들을 비롯하여 머릿속에 별별 이름이 다 떠올랐을테지만 정답은 프랑수아 라블레(Rabelais)이다.

라블레는 15세기 말에 태어나(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프랑스 16세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였다.

1532년에 발간한 '위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아들이자 디프소드의 왕,지극히 명망 높은 팡타그뤼엘의 두렵고도 가공할 무훈과 용맹'은 라블레의 첫 정식 작품으로서 당시 유행하던 작자 미상의 '가르강튀아 연대기'에서 착안해서 집필한 소설이다.

거인왕 가르강튀아의 아들 팡타그뤼엘(팡타그뤼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목이 마르다'는 의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 작품이 성공하자,라블레는 이제는 팡타그뤼엘의 아버지 이야기를 집필하여 '팡타그뤼엘의 아버지인 위대한 가르강튀아의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1534년에 발표하면서 다시금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후 한동안 창작활동을 쉬던 라블레는 1546년 팡타그뤼엘의 심복인 파뉘르주의 결혼 문제에 대한 일련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대화형식의 글인 '팡타그뤼엘 제3서'를 세상에 내놓고,1552년에는 팡타그뤼엘 일행이 신성한 술병의 신탁을 받으러 떠나는 여행기인 '팡타그뤼엘 제4서'를 출판한다.

환상의 섬들을 묘사하면서 현실사회의 모순과 비리를 신랄하게 고발한 풍자문학의 백미인 '제4서'는 라블레가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다.

그런데 잠깐,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당신의 표정이 영 석연치 않다.

당신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한다.

프랑수아 라블레라는 사람이 글을 재미나게 잘 쓴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이 사람의 소설이 '프랑스 문학 중에서 가장 어려운 작품'이냐는 의혹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풍자와 해학이 왜 어렵다는 거지? 풍자와 해학이 뭐가 심오하지?

이러한 질문이 마음 속에서 그르렁대고 있을 테니 표정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웃음이 마냥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웃음이야말로 곧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말도 있다.

라블레의 작품은 많은 문인들과 학자들이 탐구하는 연구대상인데 특히 라블레의 작품이 전달하는 통렬한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있게 분석한 미하일 바흐친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웃음에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가 있다. 웃음은 세계 전체에 관한,그리고 역사와 인간에 관한,진리의 본질적인 형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웃음은 세계와 관계하는 특수한 관점이다. 세계는 엄숙함의 관점에서 본 것 못지않게,아니 아마도 훨씬 더 심오하고 새롭게 보인다. 그러므로 웃음은 엄숙함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문제들을 제기하는 위대한 문학 속에 수용될 수 있다. 세계의 어떤 본질적 측면들은 오직 웃음을 통하여 접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라블레의 작품이 웃음을 유발하는 글이라고 해서 그의 글이 깊이가 없다거나 난해하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웃음 안에는 복층적 구조가 겹겹이 포진하고 있으며 구비구비 돌아가는 의미의 통로들이 터트리는 웃음을 딛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다.

그런데 라블레의 작품이 어렵다는 평가는 어찌 보면 라블레 자신의 복합적 성격에서 일부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를 기막힌 해학과 풍자의 작가로 소개받는데,라블레가 밟아온 삶의 여정을 되짚어 보면 그가 종교적 세계에서 첫 발걸음을 떼었음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변호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수도원에 들어간다.

경망하고 천박하다는 비난이 빗발치고 불온한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던 라블레가 사실은 근엄한 수도사 출신이라니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해학은 삶의 원초적 생명력을 일깨우지만,동시에 권위를 뒤흔든다.

중세인들은 엄숙한 종교적 질서 속에서 생활했고 사제들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종교적 규율을 확립하고 지켜나가는 것이었다.

중세의 권위주의 문화를 이끌었던 사제가 16세기 버전의 개그 콘서트를 기안하였다니 선뜻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고위 귀족계층을 비롯해서 집안의 둘째 아들은 별 볼일 없으면 일찌감치 종교계로 '치워버리는' 관행이 존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라블레가 열렬한 신앙심에서 발원한 엄숙한 봉사정신 때문에 스스로 수도사 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등 떠밀려서 수도원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사건의 진면모는 당사자인 라블레만이 알 것이니 그가 수도원에 들어간 계기는 이쯤에서 그만 궁금해 하고,라블레가 수도원 생활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살펴보자.

라블레는 중세 사회에서 유일무이하게 지적인 풍토를 자랑하던 공간이던 수도원에서 풍부한 지적 세례를 받은 지식인으로 성장한다.

라블레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그리스어를 공부하면서 고전 연구에 몰두하고,퐁트네에서 열리는 법률가들의 토론회에 참석하면서 그 무렵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인문주의 사상에 눈을 뜬다.

이 인문주의 씨앗이 라블레 속에서 싹튼 결과는 의학 공부였다.

라블레가 법률과 신학을 공부한 뒤 의학을 선택한 이유는 의미심장하다.

'육체이자 영혼인 인간'의 총체적 인식에 대한 관심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블레가 육체적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신체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받아들인 사실은 중세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상징하는 일이다.

수도원을 떠나 재속(在俗) 사제의 신분으로 몽펠리에 의대에서 의학을 공부한 라블레는 리옹의 시립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문학 작품을 일궈나간다.

모든 문인은 그의 시대와 밀착되어 있는데 특히 라블레의 언어와 목소리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당대의 상황을 반드시 감안해야 한다.

라블레는 중세의 질서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면서 새롭고 참된 지식의 보급에 힘을 썼다.

당시 경박한 이야기로 가득 찬 책이라는 멸시를 받던 소설을 집필하면서 해학과 풍자를 즐기던 그는 그저 익살로만 그치지 않고 작품 안에 진지한 논의를 숨겨 놓았다.

웃음은 비판적이고 파괴적이자 동시에 재생의 기능을 한다.

라블레는 웃음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고 구 시대를 파괴하면서 사회의 재생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건설을 원했던 것이다.

하늘 높이 올려진 권위를 고꾸라지게 만드는 라블레의 문학을 한 토막이나마 즐겨보도록 하자.

☞ 기출제시문 (연세대학교 2004학년도 정시 논술고사)

[논제]


다음 제시문들(아리스토파네스,'구름'/ 라블레,'팡타그뤼엘의 아버지인 위대한 가르강튀아의 소름 끼치는 이야기'/ 코헨,'조크에 대한 철학적 사고')은 웃음의 유발과 관계된 것이다. 각각의 경우 웃게 되는 이유와 그 의미를 분석하고,적절한 예를 통해 그와 같은 웃음의 사회적 기능을 논술하시오.

[제시문]

가르가멜이 어린애를 낳게 된 상황과 방식은 다음과 같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항문이 빠져버릴 일이다.

2월 3일 저녁,고드비요(gaudebillaux)를 너무 먹은 나머지 가르가멜의 항문이 빠져버리고 있을 때였다.

고드비요란 쿠아로(coiraux)의 기름기 있는 내장 요리를 말한다.

쿠아로란 여물통과 프레 기모(prez guimaulx)에서 살찌운 소의 고기를 말한다.

이들 중 367,014마리를 잡아,사육제 마지막 날 소금에 절인다.

봄이 왔을 때,소금기 있는 고기를 기림으로써 술판을 더 잘 벌이기 위해서이다. (…중략…)

선량한 그랑구지에는 이것을 너무 즐긴 나머지 모든 음식마다 한 국자 가득 청했다.

그러면서 출산을 앞둔 아내에게는 이 모든 내장 요리가 그다지 권할 만하지 못한 만큼,조금만 먹으라고 했다.

"똥자루를 먹는다는 건,그만큼 똥을 먹고 싶다는 거지"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열여섯 가마 두 말 여섯 되를 먹었다.

오,그 얼마나 사랑스런 배설물이 그녀 몸 안에서 부풀어 오르고 있었던가! (…중략…)

얼마 후 사방에서 산파들이 몰려와 아래에 손을 대보았는데,맛없고 더러운 오물 덩어리가 나온 것을 보고는 어린애인 줄만 알았다.

하나 그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내장 요리를 너무 많이 먹은 까닭에 여러분이 '직장(直腸)'이라 부르는 곧은 창자가 늘어나면서 빠져 나온 항문이었다. (…중략…)

이 불행한 사건 때문에 자궁의 태반엽이 늘어나 버렸고,그래서 태아는 대신 공정맥(空靜脈) 안에 파고들어 횡경막을 따라 올라가 어깨 근처까지 이르게 되었다.

정맥이 두 가닥으로 나뉘는 그 부분에서 왼쪽 길을 택한 태아는 급기야 왼쪽 귀를 통해 나오고야 말았다.

애는 태어나기가 무섭게 보통 애처럼 "앙! 앙!" 하고 울지 않고,목청껏 "술! 술! 술!" 하며 모든 사람에게 한 잔 하라는 듯 부르짖었으니,심지어 뵈스(Beusse)나 비바루아(Bibarois) 지방에서조차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여러분은 이처럼 괴이한 출생을 그다지 믿지 않을 것이다.

믿지 않아도 걱정될 건 없지만,선량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면 들은 말이나 책에서 읽은 말을 믿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우리의 법규나 신앙이나 이성이나 성서에 어긋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나로서는 성서에서 그런 일에 반대되는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다.

가령 하느님의 뜻이 그러했다 할진대,여러분은 하느님이 그렇게 하실 리가 없다고 하겠는가?

제발,그런 헛된 생각으로 정신이 흐리멍텅 어리둥절해지는(emburelucocquez) 일 없기 바란다.

여러분에게 고하노니,하느님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그러므로 만일 하느님이 원하기만 하신다면,여자들은 이제부터 그처럼 귀로 애를 낳게 될 것이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bb@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