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일상속 정체성을 잃은 현대인의 삶
⊙ 일상을 전복하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다소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 뫼르소가 자기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하는 장면이 가장 먼저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시신이 안치된 방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며 그곳의 문지기와 함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등 어머니를 잃은 자식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 행렬을 함께 하면서도 슬프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날씨가 너무나도 덥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장례식만 아니라면 가벼운 산책을 했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데 이런 태도를 일상적인 상주(喪主)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프고 가슴 아픈 '어머니의 죽음'을 주인공 뫼르소가 무미건조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한 작가가 뫼르소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주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절차 속에 삶의 의지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수행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현대인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타인이 규정해 놓은 삶의 방식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카뮈가 창조한 뫼르소는 자못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도덕이나 윤리,혹은 사랑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살인을 저지른 뒤에도 참회하지 않았고,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겠다는 변호를 거부하는 한편 사형집행을 앞두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 했던 사제마저 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은 그가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과 죽음이 규정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뫼르소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삶의 의지를 느끼게 된다.
자신의 의지대로 죽음을 앞두게 된 후에야 비로소 살아 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 일상의 반복과 허무한 일탈
최윤의 소설 「푸른 기차」는 현대사회에 익명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일상적인 소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등장인물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인물 사이의 갈등이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그런 까닭에 작품의 핵심적인 줄거리가 쉽사리 잡히지도 않는다.
또한 등장인물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점도 특징적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스물여덟 살의 대학 강사인 '그'는 쉽게 예견할 수 있듯이 익명적인 존재로서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을 상징한다.
어떤 개인이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삶의 구체적인 방향성을 상실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삶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작품 속의 '그'는 소설 전체를 통해 어떤 일을 하려 하다가도 정작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주는데 이는 '그'가 적극적인 삶의 실천의지가 없는 존재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품의 첫 장면은 그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눈을 뜨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타인들의 바쁜 발걸음 소리와 수돗물 소리,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세상에 어떤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세상이 언제나 먼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인데 이는 주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지 않는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세상의 소리'에 타율적으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특별히 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할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학기 마지막 주에 있는 토론회에 참여해야 했으며 적어도 불참한다고 전화라도 했어야 했다.
뿐만 아니다.
그는 그에게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도 않았고 심지어 자기가 작성하는 논문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에게 전해지는 각종 독촉장이나 광고장 같은 우편물 역시 그의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한마디로 그는 그가 해야 할,그리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모든 일을 중단한 채 모든 사람과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만다.
그의 일상은 단지 하루 종일 멍하게 누워만 있다가 대충 빨래를 하고 미지근한 물에 커피를 타 마시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 문득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러나 별다른 이유도 없이 여행을 포기하고 만다.
⊙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기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는 점에서 「푸른 기차」의 주인공은 「이방인」의 뫼르소와 매우 닮았다.
다만 뫼르소가 의욕이 없으면서도 일상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데 비해 「푸른 기차」의 그는 작품의 처음부터 반복되는 일상에서 일탈해 있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일체의 일상적인 관습과 규칙,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철저히 벗어난 삶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그는 한 벌 있는 여름 양복을 220볼트 다리미로 다린다.
그를 늘 지하철 역까지 내려다 놓던,지하철 역 정류장 이상 더 멀리까지 타본 적이 없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까운 곳까지 간다.
버스 안은 거의 비어 있으며 운전사가 켜놓은 라디오에서는 정류장 이름을 알리는 낡아서 궁글려진 녹음된 목소리 사이사이로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차창 밖으로는 개발에 뒤처진 지역이 지니는 표시들을 나열하며 거리들이 스쳐 지나간다. (…중략…)
그는 충무로쯤에서 내린다.
그리고 걷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주머니에 손을 넣고,가끔 풀려나가는 운동화의 끈을 다시 매기 위해서만 멈추면서.
무수한 사람들이 그의 뒤에서부터 걸어와 그의 앞 저쪽으로 멀어져 가고,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먼 산의 나무들처럼 앞에서 다가온 사람들은 그를 스치고 사라져버린다.
그는 걷는다.
충무로에서 명동 쪽으로 명동에서 퇴계로 쪽으로 퇴계로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끔 그의 운동화 뒤축을 밟으며,거칠고 무딘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부딪쳐오는 사람들,앞을 보고 빨리 걸으며 어떤 사건에도 무심하게 그만큼 빨리 멀어져 가는 사람들,가족과 돈과 탄생과 죽음에는 이의 없이 감격하며,이권 권력과 민족과 핏줄에 대해서는 세 줄을 넘지 않는 논의 끝에 무조건 동의하는 사람들,선과 악,상과 하,전과 후,안과 밖에 대해 불변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그는 그를 스쳐 지나가는 그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 최윤 「푸른 기차」
그는 몇 달 동안 모아둔 저금을 모두 현금으로 찾은 뒤 외출을 시도한다.
그것은 그가 삶에 대한 욕망을 얻고자 하는 최소한의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온갖 욕망의 블랙홀인 서울 시내를 아무리 거닐어도 그에게는 어떤 감정적인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감정이나 욕망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에 그는 우연히 큰누이의 아파트를 찾아 조카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주말에는 누이의 식구와 외식을 하고 노래방도 가면서 잠시 잠깐 일상의 평화를 꿈꿔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기를 살갑게 따르는 조카를 이해하지 못하고,결혼과 같은 일상의 규칙을 받아들이라는 누이의 조언도 따르지 않으며 결국 일상에서 유폐된 자기의 방으로 회귀하고 만다.
현대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거대한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개인이 자율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이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시지푸스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듯이,그리고 그 순간순간이 의미가 있듯이 인간 역시 거대한 사회 구조 안에서 자신의 자율성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행위일 수 있다.
미리 주어진 구조가 자율성을 억압하고 침해한다고 받아들이기보다는 구조 안에서 자신의 자율성을 맘껏 펼쳐 보여야만 견고한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 일상을 전복하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다소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 뫼르소가 자기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하는 장면이 가장 먼저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시신이 안치된 방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며 그곳의 문지기와 함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등 어머니를 잃은 자식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 행렬을 함께 하면서도 슬프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날씨가 너무나도 덥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장례식만 아니라면 가벼운 산책을 했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데 이런 태도를 일상적인 상주(喪主)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프고 가슴 아픈 '어머니의 죽음'을 주인공 뫼르소가 무미건조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한 작가가 뫼르소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주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절차 속에 삶의 의지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수행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현대인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타인이 규정해 놓은 삶의 방식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카뮈가 창조한 뫼르소는 자못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도덕이나 윤리,혹은 사랑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살인을 저지른 뒤에도 참회하지 않았고,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겠다는 변호를 거부하는 한편 사형집행을 앞두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 했던 사제마저 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은 그가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과 죽음이 규정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뫼르소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삶의 의지를 느끼게 된다.
자신의 의지대로 죽음을 앞두게 된 후에야 비로소 살아 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 일상의 반복과 허무한 일탈
최윤의 소설 「푸른 기차」는 현대사회에 익명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일상적인 소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등장인물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인물 사이의 갈등이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그런 까닭에 작품의 핵심적인 줄거리가 쉽사리 잡히지도 않는다.
또한 등장인물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점도 특징적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스물여덟 살의 대학 강사인 '그'는 쉽게 예견할 수 있듯이 익명적인 존재로서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을 상징한다.
어떤 개인이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삶의 구체적인 방향성을 상실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삶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작품 속의 '그'는 소설 전체를 통해 어떤 일을 하려 하다가도 정작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주는데 이는 '그'가 적극적인 삶의 실천의지가 없는 존재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품의 첫 장면은 그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눈을 뜨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타인들의 바쁜 발걸음 소리와 수돗물 소리,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세상에 어떤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세상이 언제나 먼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인데 이는 주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지 않는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세상의 소리'에 타율적으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특별히 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할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학기 마지막 주에 있는 토론회에 참여해야 했으며 적어도 불참한다고 전화라도 했어야 했다.
뿐만 아니다.
그는 그에게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도 않았고 심지어 자기가 작성하는 논문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에게 전해지는 각종 독촉장이나 광고장 같은 우편물 역시 그의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한마디로 그는 그가 해야 할,그리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모든 일을 중단한 채 모든 사람과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만다.
그의 일상은 단지 하루 종일 멍하게 누워만 있다가 대충 빨래를 하고 미지근한 물에 커피를 타 마시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 문득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러나 별다른 이유도 없이 여행을 포기하고 만다.
⊙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기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는 점에서 「푸른 기차」의 주인공은 「이방인」의 뫼르소와 매우 닮았다.
다만 뫼르소가 의욕이 없으면서도 일상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데 비해 「푸른 기차」의 그는 작품의 처음부터 반복되는 일상에서 일탈해 있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일체의 일상적인 관습과 규칙,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철저히 벗어난 삶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그는 한 벌 있는 여름 양복을 220볼트 다리미로 다린다.
그를 늘 지하철 역까지 내려다 놓던,지하철 역 정류장 이상 더 멀리까지 타본 적이 없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까운 곳까지 간다.
버스 안은 거의 비어 있으며 운전사가 켜놓은 라디오에서는 정류장 이름을 알리는 낡아서 궁글려진 녹음된 목소리 사이사이로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차창 밖으로는 개발에 뒤처진 지역이 지니는 표시들을 나열하며 거리들이 스쳐 지나간다. (…중략…)
그는 충무로쯤에서 내린다.
그리고 걷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주머니에 손을 넣고,가끔 풀려나가는 운동화의 끈을 다시 매기 위해서만 멈추면서.
무수한 사람들이 그의 뒤에서부터 걸어와 그의 앞 저쪽으로 멀어져 가고,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먼 산의 나무들처럼 앞에서 다가온 사람들은 그를 스치고 사라져버린다.
그는 걷는다.
충무로에서 명동 쪽으로 명동에서 퇴계로 쪽으로 퇴계로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끔 그의 운동화 뒤축을 밟으며,거칠고 무딘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부딪쳐오는 사람들,앞을 보고 빨리 걸으며 어떤 사건에도 무심하게 그만큼 빨리 멀어져 가는 사람들,가족과 돈과 탄생과 죽음에는 이의 없이 감격하며,이권 권력과 민족과 핏줄에 대해서는 세 줄을 넘지 않는 논의 끝에 무조건 동의하는 사람들,선과 악,상과 하,전과 후,안과 밖에 대해 불변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그는 그를 스쳐 지나가는 그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 최윤 「푸른 기차」
그는 몇 달 동안 모아둔 저금을 모두 현금으로 찾은 뒤 외출을 시도한다.
그것은 그가 삶에 대한 욕망을 얻고자 하는 최소한의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온갖 욕망의 블랙홀인 서울 시내를 아무리 거닐어도 그에게는 어떤 감정적인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감정이나 욕망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에 그는 우연히 큰누이의 아파트를 찾아 조카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주말에는 누이의 식구와 외식을 하고 노래방도 가면서 잠시 잠깐 일상의 평화를 꿈꿔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기를 살갑게 따르는 조카를 이해하지 못하고,결혼과 같은 일상의 규칙을 받아들이라는 누이의 조언도 따르지 않으며 결국 일상에서 유폐된 자기의 방으로 회귀하고 만다.
현대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거대한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개인이 자율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이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시지푸스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듯이,그리고 그 순간순간이 의미가 있듯이 인간 역시 거대한 사회 구조 안에서 자신의 자율성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행위일 수 있다.
미리 주어진 구조가 자율성을 억압하고 침해한다고 받아들이기보다는 구조 안에서 자신의 자율성을 맘껏 펼쳐 보여야만 견고한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