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여성, 정체성을 찾는 길

⊙ 젠더 정체성의 이해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32. 오정희「옛 우물」
현재 한국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규 임용되는 여성 검사의 비율이 갈수록 오르는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은 성공 신화를 써 나가고 있다.

그러나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08년 글로벌 성(性)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 대상 130개국 가운데 108위를 차지했을 만큼 성적 불균형이 심각하다.

세계적으로 보면 한국 사회는 아직도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 여성은 불평등한 지위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걸까.

다른 분야는 그만두더라도 사회 구성원을 대표하는 여성 정치인은 어째서 소수에 불과할까.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은 스스로 정치적 권리마저 포기해 버린 것일까.

남녀 차별적인 관행과 제도적 모순 같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는 여성 스스로가 상황 자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도 함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어째서 여성은 불평등한 상황을 문제 삼지 않는 걸까.

의문의 실마리는 성 정체성의 개념 속에 존재한다.

인간의 성 정체성은 크게 생물학적인 성 정체성(sex)과 사회학적인 성 정체성(gender)으로 구분된다.

용어 그대로 생물학적인 성 정체성은 신체적인 차이에 따른 구분이며,이에 반해 젠더 정체성은 지속적인 사회적 과정을 거쳐 남녀에게 구별,혹은 차별되어 부여된 특별한 역할과 지위를 뜻하는 개념이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해 왔으므로 남녀에 대한 젠더 정체성도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가부장제는 남성을 중심으로 위계적인 사회관계,권력 체계,가치 체계가 만들어진 제도이다.

따라서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은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한 존재로 사회화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실제 경험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젠더 정체성을 부여받아 왔다.

한마디로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자기희생을 도덕적 이상으로 간주하였으며 조건 없는 사랑과 순응을 행위의 원칙으로 내면화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부장제의 여성 젠더 정체성에 자아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자식이,부모가 중요한 상황에서 자아는 자리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게 되고 그런 상황 속에서 사회경제적 지위를 얻는 것은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부장제 속에 존재하는 젠더 정체성이 여성을 지배해 왔던 셈이다.

⊙ 타자(他者)로 규정된 여성

오정희의 소설 「옛 우물」은 마흔 다섯 살 어느 중년 여성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비교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과 성실한 아들을 두고 있는,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여성이다.

유행하는 시와 에세이를 읽고 TV 뉴스를 보며 한 달에 한 번씩 아들의 학교 자모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쑥탕에 가는 전형적인 중년 여성의 모습을 그녀는 지녔던 것이다.

하지만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작품의 주인공은 일상 속에서 자아 개념을 찾지 못한다.

그녀를 규정짓는 것은 빨래와 밥짓기 같은 가사 노동과 약간의 교양과 취미,그리고 남편의 아내이며 아들의 어머니라는 대타적(對他的) 의미가 전부이다.

그녀를 규정짓는 여타의 역할과 지위는 작품 속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쉽게 말해 주인공은 전통적인 여성 젠더 정체성의 지배를 받아 온 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상황에 때때로 낯선 감정을 느낀다.

우연히 교차로에서 목격한 남편이나,학교에 등교하는 아들에게서 그녀는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평범한 일상과 충실한 관습,그리고 습관의 미덕에 기대어 살아가던 주인공이 일탈과 외유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작품 속 그녀는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불륜일 수 있는 이 사실은 실은 정체성 탐색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상적인 삶 속에 매몰된 그녀는 전통적인 젠더 정체성의 억압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자아를 탐색하다가 한 남자를 만나게 된 셈이다.

물론 그것이 사회적 금기를 위반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문학적 상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녀의 외유가 단순한 불륜이 아닌 까닭은 작품에 등장하는 두 가지 소재들로도 증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어릴 적 증조 할머니가 말해 준 '옛 우물'에 산다는 '금빛 잉어'이다.

우물 바닥을 걷었을 때 '금빛 잉어'가 허구라는 사실을 그녀도 확인하게 되지만,주인공은 금빛 잉어의 존재를 끝내 부정하지 않는다.

또 다른 대상은 연당집의 존재다.

그것은 재개발 예정인 아파트 야산에 있는 오래된 낡은 기와집인데 그녀는 연당집에 대해 집착에 가까울 만큼 관심이 높다.

이 두 소재는 모두 옛것,낡은 것,잊혀진 것이란 점에서 공통적인데 그런 까닭에 그것들은 젠더 정체성의 지배 속에서 잊혀진 자아의 상징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일상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른 남자처럼 말이다.

⊙ 진정 나는 누구인가

주인공의 탐색은 그러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옛 우물은 메워졌고,연당집은 해체되었으며 그 남자는 세상을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샤워기의 물을 잠그고도 한참을 그대로 거울을 보며 서 있었다.

차츰 수증기가 걷히고 맑아지는 거울 면에 아주 먼 곳으로부터 다가오듯 천천히 얼굴 윤곽이 살아났다.

잘못 당겨진 천처럼 얼굴 좌우 대칭이 깨진 얼굴.

그가 죽은 뒤 내게 미미하게 나타난 변화.

마른 빨래를 개키면서 건성 눈길을 주었던 신문의 부고란에서 그의 이름을 보았을 때,괄호 속에 박힌 직장과 전화번호를 재차 확인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거울을 본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 어떤 심리가 나를 거울 앞으로 이끌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다가간 거울에 조각조각 균열된 얼굴이 비쳤다.

갑자기 눈에 띄는 주름살도,처음의 놀람처럼 거울이 깨진 것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 길들여진 관습과 관행이 한순간에 깨진 얼굴이었다.

아,내 안의 비명이 새어나오기도 전에 깨진 얼굴은 스러지고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자신의 것이면서도 거울이나 사진이라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거울 앞을 떠난 나는 빨래를 마저 개키고 낮에 절여둔 배추를 버무려 김치를 담갔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말고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오정희,「옛 우물」


위의 인용에서 보듯 남자가 죽었다는 신문 부고란을 보자마자 그녀가 처음 한 일은 거울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쳐진 영상은 조각조각 균열된 얼굴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 갑자기 일상 속에 침입해 들어왔고 그 때문에 일상의 습관과 관습은 한순간에 깨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가 부고란을 보고 곧장 거울을 보았던 것은 그녀에게 '그'는 자아를 비춰 볼 수 있는 그 무엇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자기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 하나의 반사경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거울 앞을 떠나 일상 속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빨래를 개고 배추를 버무리도록 강요하는 전통적인 젠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소설 「옛 우물」은 소극적인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체성이나 자아 개념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성적 불균형,혹은 성적 억압 등은 대개 전통적인 젠더 정체성의 메커니즘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성적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형성되어 온 젠더 정체성을 해체하고 동시에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모색하며 또 그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바로 이러한 고전적인 젠더 정체성의 해체 작업을 촉구하는 담론인 동시에 여성들로 하여금 아내,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혹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묻게 하는 철학이다.

「옛 우물」의 그녀가 거울을 통해 확인하려는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보편적 인간으로서 해결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문이었던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