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은 열정과 영감으로 맞서야 하는 늙은 악마다”
가끔 어떠한 단어에 일상의 용례에서는 감지하지 못하는 뜻밖의 의미가 누적되어 있음을 새삼 발견하고 놀라는 일이 있다.
직업이라는 단어가 그러하다.
직업은 직(職)과 업(業)이라는 한자로 이루어져 있는데,종사하는 일의 종류를 드러내는 직(職)이라는 글자야 그렇다 치고,업(業)이라는 글자를 유심히 들여다 보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카르마(karma)'가 업(業)으로 번역되어 그러한지 몰라도 '나는 나만의 업(業)이 있다'라는 문장을 접했을 때 피어나는 느낌은 마냥 단순하지가 않다.
업(業)이라는 글자는 '그러할 수밖에 없는' 혹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숙명(宿命)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살아오며 저지르고 일궈온 모든 총체가 전달하는 삶의 노작(勞作)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업(業)이라는 글자에는 긴 세월에 걸쳐 켜켜이 쌓인 의미가 여러 겹으로 앉아 있어,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직업(職業)을 받아들이기에는 충분하지 않고 그 이상의 엄숙함으로 다가서야 제대로 그 뜻을 이해할 듯 하다.
서양에서도 직업을 말할 때 신의 부름이라는 소명(vocation)이라는 표현을 쓴다.
신의 자신을 앞으로 불러내어 내린 명령이 바로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직업(職業)으로서 학문을 선택한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복잡미묘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막스 베버가 뮌헨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막스 베버는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하면서 활발하게 삶을 전개하였고,특히 20대에 대학교수가 되어 오랜 학문의 여정을 밟았다.
그러한 그가 죽기 얼마 전 뮌헨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였는데,노학자가 젊은이들과 나눈 열띤 이 시간의 주제는 바로 학문을 한다는 것의 의의였다.
이 강연의 원고가 정리되어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제목은 '직업으로서의 학문(Wissenschaft als Beruf)'이다.
이 책에서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의 외적 조건,내적 조건 및 직분에 대해 논한다.
베버는 학문을 늙은 악마라고 한다.
노화한 이 악마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의 수천 년을 이미 살았으므로 단단한 각오를 하고 맞서야 한다.
베버는 이 악마와 씨름하기 위해서는 열정과 영감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데,과연 어느 정도의 열정이 필요한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 정도의 결심이 없다면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열정이 아무리 순수하며 깊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열정만으로는 어떤 학문적 성과도 억지로 얻어 낼 수는 없으므로 영감과 재능 또한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점차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학문에 관한 여러 환상을 배격하고 학문의 진정한 의미를 차분하게 발굴한다.
이 책은 강연 원고를 옮긴 것이니 만큼 길이가 짧아 한번쯤 읽어볼 만하며,더욱이 막스 베버의 원숙한 사상이 길지 않은 분량 속에 쉽게 표현되어 있으므로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논 · 구술의 단골 출제 지문이기도 한 만큼 읽어두면 여러모로 유용한 책이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의 태두 막스 베버가 전하는 학문의 의미를 다음 구절을 함께 읽으면서 평가해 보자.
☞ 기출 제시문 (서울대학교 1999학년도 법과대학 논술고사,고려대학교 2009학년도 모의논술시험)
학문 연구를 예술 활동과 구분짓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학문 연구가 진보의 과정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에는 학문 분야에서와 같은 의미의 진보가 없다.
새로운 기술적 수단을 개발했던 시대의 예술품이 그 전 시대의 예술품보다 순수한 예술적 관점에서 항상 뛰어난 것은 아니다.
가령 원근법을 개발했던 시대의 예술품이 단지 원근법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만들어진 예술품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후자의 예술품이 원근법 같은 기술적 조건과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예술성에 합당하도록 대상을 선택하고 형상화하여 재료적 적합성과 형식적 적합성을 지니게 되었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진실로 '완성'된 예술품은 능가되지도 낡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완성된 예술품에 대한 개별적인 평가는 얼마든지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적 의미에서 진실로 '완성'된 작품이 다른 하나의,역시 '완성'된 작품에 의해 '추월당했다'라고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 분야와 달리 학문 분야에서는 어떤 연구 결과든 10년,20년,50년이 지나면 낡은 것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것이 학문 연구의 운명이자 목표이다.
학문은 그것과 유사한 운명에 처한 여타의 문화 영역들과 달리 매우 독특한 의미에서 이 운명과 목표에 예속되고 내맡겨져 있다.
학문상의 모든 '완성'은 새로운 '질문'을 뜻한다.
그 완성과 질문을 통해 학문은 '능가'되고 낡아 버리기를 바란다.
학문에 헌신하려는 자는 누구나 그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학문적 업적이 그것의 예술적 우수성 때문에 '향유 수단'으로서 또는 학문적 작업에 대한 훈련 수단으로서 지속적으로 그 중요성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학문적으로 능가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일 뿐만 아니라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멀리 나아가기를 희망하지 않고서는 연구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 진보가 무한히 계속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학문의 의미를 문제 삼게 된다.
학문이 무한한 진보라는 법칙에 예속된다는 것이 과연 그 스스로에 본질적으로 의미가 있는지 그다지 자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는 결코 종결되지 않으며,또 종결될 수도 없는 일을 하는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즉 광의의 기술적 목적이 거론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학문적 경험을 통해 가능해진 예측과 기대를 우리의 현실적 행위에 길잡이로 삼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답은 실용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만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러나 학문 연구라는 자신의 직업에서 학자가 진정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학문 연구는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학자는 주장한다.
학문 연구는 세상 사람들이 사업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성과를 얻도록 하기 위해,다시 말해 사람들이 잘 먹고,잘 입고,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는 항상 낡아 버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업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그의 작업은 전문 분야들로 나뉘어 무한히 진행되는 과정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이내 낡아 버린다.
그 속에서 그는 도대체 어떤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믿는가?
이 물음은 어떤 보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학문의 진보는 우리가 수천 년 전부터 겪어온 저 지성화 과정의 작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대개 매우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과학과 과학 기술에 의한 지성적 합리화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인디언이나 호텐토트인보다 자신의 생활 조건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다. (…중략…)
그러므로 지성화를 통한 합리성의 증대가 우리가 처해 있는 생활 조건에 대한 일반적 지식의 증대와 곧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지성화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지식의 획득 가능성이다.
지성화를 통해 우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삶의 조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삶에서 작용하는 어떤 힘들도 원래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힘들이 아니므로 모든 사물이 원칙적으로는 계산을 통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을 알거나 믿게 되었다.
이것은 세계의 탈 주술화를 뜻한다.
우리는 더 이상 미개인처럼 신비하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며,주술적 수단으로 정령을 다스리는 따위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
주술이 담당했던 일들을 오늘날은 기술적 수단과 계산이 해준다.
바로 이것이 지성화가 그 자체로서 의미하는 바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bb@nonsul.com
가끔 어떠한 단어에 일상의 용례에서는 감지하지 못하는 뜻밖의 의미가 누적되어 있음을 새삼 발견하고 놀라는 일이 있다.
직업이라는 단어가 그러하다.
직업은 직(職)과 업(業)이라는 한자로 이루어져 있는데,종사하는 일의 종류를 드러내는 직(職)이라는 글자야 그렇다 치고,업(業)이라는 글자를 유심히 들여다 보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카르마(karma)'가 업(業)으로 번역되어 그러한지 몰라도 '나는 나만의 업(業)이 있다'라는 문장을 접했을 때 피어나는 느낌은 마냥 단순하지가 않다.
업(業)이라는 글자는 '그러할 수밖에 없는' 혹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숙명(宿命)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살아오며 저지르고 일궈온 모든 총체가 전달하는 삶의 노작(勞作)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업(業)이라는 글자에는 긴 세월에 걸쳐 켜켜이 쌓인 의미가 여러 겹으로 앉아 있어,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직업(職業)을 받아들이기에는 충분하지 않고 그 이상의 엄숙함으로 다가서야 제대로 그 뜻을 이해할 듯 하다.
서양에서도 직업을 말할 때 신의 부름이라는 소명(vocation)이라는 표현을 쓴다.
신의 자신을 앞으로 불러내어 내린 명령이 바로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직업(職業)으로서 학문을 선택한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복잡미묘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막스 베버가 뮌헨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막스 베버는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하면서 활발하게 삶을 전개하였고,특히 20대에 대학교수가 되어 오랜 학문의 여정을 밟았다.
그러한 그가 죽기 얼마 전 뮌헨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였는데,노학자가 젊은이들과 나눈 열띤 이 시간의 주제는 바로 학문을 한다는 것의 의의였다.
이 강연의 원고가 정리되어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제목은 '직업으로서의 학문(Wissenschaft als Beruf)'이다.
이 책에서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의 외적 조건,내적 조건 및 직분에 대해 논한다.
베버는 학문을 늙은 악마라고 한다.
노화한 이 악마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의 수천 년을 이미 살았으므로 단단한 각오를 하고 맞서야 한다.
베버는 이 악마와 씨름하기 위해서는 열정과 영감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데,과연 어느 정도의 열정이 필요한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 정도의 결심이 없다면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열정이 아무리 순수하며 깊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열정만으로는 어떤 학문적 성과도 억지로 얻어 낼 수는 없으므로 영감과 재능 또한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점차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학문에 관한 여러 환상을 배격하고 학문의 진정한 의미를 차분하게 발굴한다.
이 책은 강연 원고를 옮긴 것이니 만큼 길이가 짧아 한번쯤 읽어볼 만하며,더욱이 막스 베버의 원숙한 사상이 길지 않은 분량 속에 쉽게 표현되어 있으므로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논 · 구술의 단골 출제 지문이기도 한 만큼 읽어두면 여러모로 유용한 책이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의 태두 막스 베버가 전하는 학문의 의미를 다음 구절을 함께 읽으면서 평가해 보자.
☞ 기출 제시문 (서울대학교 1999학년도 법과대학 논술고사,고려대학교 2009학년도 모의논술시험)
학문 연구를 예술 활동과 구분짓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학문 연구가 진보의 과정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에는 학문 분야에서와 같은 의미의 진보가 없다.
새로운 기술적 수단을 개발했던 시대의 예술품이 그 전 시대의 예술품보다 순수한 예술적 관점에서 항상 뛰어난 것은 아니다.
가령 원근법을 개발했던 시대의 예술품이 단지 원근법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만들어진 예술품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후자의 예술품이 원근법 같은 기술적 조건과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예술성에 합당하도록 대상을 선택하고 형상화하여 재료적 적합성과 형식적 적합성을 지니게 되었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진실로 '완성'된 예술품은 능가되지도 낡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완성된 예술품에 대한 개별적인 평가는 얼마든지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적 의미에서 진실로 '완성'된 작품이 다른 하나의,역시 '완성'된 작품에 의해 '추월당했다'라고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 분야와 달리 학문 분야에서는 어떤 연구 결과든 10년,20년,50년이 지나면 낡은 것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것이 학문 연구의 운명이자 목표이다.
학문은 그것과 유사한 운명에 처한 여타의 문화 영역들과 달리 매우 독특한 의미에서 이 운명과 목표에 예속되고 내맡겨져 있다.
학문상의 모든 '완성'은 새로운 '질문'을 뜻한다.
그 완성과 질문을 통해 학문은 '능가'되고 낡아 버리기를 바란다.
학문에 헌신하려는 자는 누구나 그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학문적 업적이 그것의 예술적 우수성 때문에 '향유 수단'으로서 또는 학문적 작업에 대한 훈련 수단으로서 지속적으로 그 중요성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학문적으로 능가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일 뿐만 아니라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멀리 나아가기를 희망하지 않고서는 연구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 진보가 무한히 계속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학문의 의미를 문제 삼게 된다.
학문이 무한한 진보라는 법칙에 예속된다는 것이 과연 그 스스로에 본질적으로 의미가 있는지 그다지 자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는 결코 종결되지 않으며,또 종결될 수도 없는 일을 하는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즉 광의의 기술적 목적이 거론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학문적 경험을 통해 가능해진 예측과 기대를 우리의 현실적 행위에 길잡이로 삼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답은 실용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만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러나 학문 연구라는 자신의 직업에서 학자가 진정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학문 연구는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학자는 주장한다.
학문 연구는 세상 사람들이 사업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성과를 얻도록 하기 위해,다시 말해 사람들이 잘 먹고,잘 입고,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는 항상 낡아 버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업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그의 작업은 전문 분야들로 나뉘어 무한히 진행되는 과정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이내 낡아 버린다.
그 속에서 그는 도대체 어떤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믿는가?
이 물음은 어떤 보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학문의 진보는 우리가 수천 년 전부터 겪어온 저 지성화 과정의 작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대개 매우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과학과 과학 기술에 의한 지성적 합리화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인디언이나 호텐토트인보다 자신의 생활 조건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다. (…중략…)
그러므로 지성화를 통한 합리성의 증대가 우리가 처해 있는 생활 조건에 대한 일반적 지식의 증대와 곧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지성화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지식의 획득 가능성이다.
지성화를 통해 우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삶의 조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삶에서 작용하는 어떤 힘들도 원래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힘들이 아니므로 모든 사물이 원칙적으로는 계산을 통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을 알거나 믿게 되었다.
이것은 세계의 탈 주술화를 뜻한다.
우리는 더 이상 미개인처럼 신비하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며,주술적 수단으로 정령을 다스리는 따위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
주술이 담당했던 일들을 오늘날은 기술적 수단과 계산이 해준다.
바로 이것이 지성화가 그 자체로서 의미하는 바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bb@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