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부 입김에 여·야 합의한 금산분리 완화법 ‘반쪽’

[Focus] 국회 상임위에서 법안 통과해 봤자 소용없다?
국회는 각자 생업에 바쁜 국민들을 대신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그 결과를 법률로 만들어 내는 기능을 한다.

국회에서는 선거를 통해 대표성을 부여받은 국회의원들이 일하고 있다.

현재 우리 국회의 의원 정수는 299명이다.

각 지역구마다 한 명씩 뽑아 국회로 올려 보낸 지역구 의원 245명, 전국 단위의 정당 투표로 뽑힌 비례대표 의원 54명을 합한 숫자다.

법률을 만들 때 왜 이렇게 많은 의원이 필요할까.

해당 사안을 잘 아는 전문가 한두 사람이 논의해서 만들면 안 되는 것일까.

우리 헌법이 법률 제정권을 합의제 의사결정기구인 국회에 부여한 것은 특정인의 독단으로 법률을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법률로 일단 정해지면 모든 국민이 따라야 하기에 최대한 다양한 견해가 국회의원을 통해 국회에서 모이게 한다는 얘기다.

각 지역별, 사회계층별, 이익집단별로 각각 다른 이해관계를 효과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국회는 교섭단체 제도를 가지고 있다.

교섭단체는 보통 정당 단위로 구성(현재의 한나라당 민주당)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정당이 모여서 하나의 교섭단체를 구성(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이 모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하기도 한다.

이렇게 교섭단체 사이의 합의제로 운영되는 국회가 토론보다는 '멱살잡이'의 무대가 되는 까닭은 뭘까.

최근에는 교섭단체 간 합의로 제출된 법률안이 본회의에서 부결되는 사태까지 빚어지면서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과정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계기를 던져 주고 있다.

머리를 맞대고 상의해서 법률을 만들라고 국회의원을 뽑아 놨더니 여당(집권당)과 야당(집권당이 아닌 정당)으로 패를 갈라 정쟁으로 날을 지새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에는 그걸로도 모자라 같은 당 내부에서까지 계파로 나뉘어 싸우는가 하면 "당론을 따르라"는 원내 지도부와 "상임위 논의를 존중하라"는 소속 의원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일까지 생겼다.

'민의(民意)의 전당'이라기보다는 권력 투쟁의 '정글'로 바뀌어 가는 듯하다.

물론 이념이 다르고, 대표하는 사회적 계층이 다른 집단끼리 국회에서 각각 서로 차별화된 생각과 목소리를 꺼내 놓고 논의하는 것 자체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도 최소한의 규칙(룰)이 있다.

이게 자꾸 무시되는 양상이 빚어지는 건 한국의 정치 문화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회에서 합의를 이뤄 가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구조로 이해하는 선진국에 비해 우리는 여야 간에 자신의 주장을 얼마나 더 반영하느냐를 두고 싸우는 과정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회는 교섭단체 간 입장 차이가 극단으로 치닫는 일이 없도록 자체적인 의사 진행 규칙을 만들어 두고 있다.

국민들의 입법에 대한 의견 형성에서부터 최종적인 본회의 의결까지 일련의 입법 과정이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끔 기본적인 룰을 국회법에 정해 놓은 것이다.

아울러 최소한의 비용과 노력으로 양질의 법률이 제 · 개정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도 있다.

즉 민주성과 효율성이 입법 과정에서 적절히 조화되도록 하는 게 의사 진행 규칙을 만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입법 절차는 헌법(제52조)과 국회법(제79조)에 규정돼 있다.

일단 의원 발의나 정부 법안 제출이 그 시발점이 된다.

물론 국회의원이나 정부는 원칙적으로 법안 제 · 개정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바탕으로 입안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제안된 법률은 우선 분야별로 나뉘어진 17개의 상임위원회에 배정해 논의한다.

한 가지 안건에 299명이나 되는 의원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심의할 수 없기에 법제사법 정무 기획재정 외교통상통일 국방 행정안전 등 분야별로 20명 안팎의 의원들로 나뉘어 전문적인 검토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법률을 만드는 문제에 있어 국회의원들의 견해가 찬성과 반대로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통상 여당과 야당 사이에 이런 식으로 견해 차가 크면 일단 상임위 내부에 있는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각 상임위 소위에서 전문성을 갖춘 의원들끼리 합리적인 대안을 찾고 이걸 상임위 전체회의와 본회의에서 각각 다수결로 인준받아 법률을 만들게 된다.

만약 두 곳의 상임위 사이에 입장이 다를 경우엔 연석회의도 열 수 있다.

쟁점이 더욱 극명한 법안이라면 본회의에 올리기 전 의원 전원이 참석하는 전원위원회에서 '끝장 토론'을 하는 방법도 있다.

상임위원회에서 법안을 그대로 혹은 수정을 가해 통과시키면 법사위에서 체계나 자구(字句)가 법률로서 그럴 듯한지 심의하는 과정을 거쳐 본회의로 올려 보낸다.

본회의에서 반대 토론을 다시 한번 거친 뒤 표결해서 출석한 국회의원의 과반수 찬성을 얻으면 법률로서 확정된다.

이렇게 법안을 심의 · 의결하는 절차가 국회법에 자세하게 규정돼 있지만 실제 국회에선 이런 과정이 곧잘 무시되곤 한다.

양지에서 벌어지는 정상적인 회의 절차보다는 여야 간의 '막후 협상'에 더 많이 의존하는 정치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양쪽 세력이 크나큰 정치적 부담을 져야 하는 협상이라면 모르지만, 일상적인 쟁점 법안 하나 하나를 여야 지도부가 협상해 방향을 제시하는 게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가급적 상임위의 결정에 맡겨 두는 게 생산적이라는 얘기다.

지난달 30일 4월 임시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이런 문제로 국회 안팎이 시끌시끌했다.

산업자본의 은행 및 은행지주회사 지분 보유 한도를 기존의 4%에서 10%로 올리는 내용의 금산분리 완화 법안(은행법,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이 정상적인 국회법상 절차에 따라 상임위를 통과했는데, 해당 상임위 소속이 아닌 다른 야당 의원이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자 여당과 야당 원내대표가 막판에 지분 보유 한도를 9%로 낮추는 선에서 절충안을 만든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해당 법률을 담당하는 상임위인 정무위원회의 김영선 위원장(한나라당 의원)이 여기에 거세게 반발하는 연설을 펼쳤다.

결국 여야 합의로 올린 금융지주회사법이 부결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결국 금산분리 완화법은 반쪽짜리가 됐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두고 여야 간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효율적인 의사 진행을 위해 여야 지도부의 합의와 지시를 개별 의원들이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상임위 논의 절차를 존중하는 쪽으로 가야 하는지 두고 두고 논란이 될 주제다.

차기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