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길들이는 감시 사회

⊙ 통제사회에 대한 성찰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31. 윤흥길「제식훈련 변천약사」
소설가 윤흥길은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장마」로 아주 잘 알려진 작가이다.

분단과 이산의 민족적 상처를 '구렁이'라는 주술적 상징물을 통해 극복했던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비극을 가족애와 민족애로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어 주었다.

윤흥길의 작품은 「장마」와 같이 이산과 분단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는 「아홉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와 같은 연작을 통해 산업화 속에 소외된 인간성과 소시민의 허위의식을 들춰내기도 했으며 「완장」 같은 작품에서는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권력에 대한 욕망을 풍자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다채로운 윤흥길의 작품 중에는 70년대 정치 상황에 대한 풍자적인 내용도 눈에 띈다.

1975년 <한국문학> 7월호에 발표한 「제식훈련 변천약사」도 그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작가 윤흥길은 일상 속에 잠재된 전체주의적인 요소와 이를 강제하는 사회적 감시와 통제의 시선을 '제식훈련'이라는 코드를 통해 비판적으로 제시해주었는데 이는 유신 정권 하의 통제사회에 대한 성찰로 해석할 수 있다.

⊙ 군대식 전체주의 문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고등학교에서 군대식 제식훈련을 가르치던 시절이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각급 고등학교에는 교련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에 담당교사는 군대식 제식훈련 및 총검술 등을 학생들에게 지도해왔다.

지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이겠지만 과거에는 초등학교에서까지 애국조회라는 형태로 군대식 제식문화가 존재했다.

이 작품의 주요 이야기는 이런 제식훈련을 지도해야 했던 체육교사들의 1급 정교사 연수 기간에 벌어진다.

1급 정교사 연수는 교직에 들어선 지 3년차 되는 2급 정교사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데 연수를 수료하면 승급과 더불어 호봉이 한 단계 높아진다.

한마디로 급여가 늘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사회인이 된 교사들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연수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간혹 몇몇 교사들은 연수 자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체육교사인 윤성철,서창원,안종복은 대학 시절 자신들의 은사였던 강명록 교수로부터 1급 정교사 연수의 일환으로 제식훈련을 받는다.

그런데 강 교수는 뜨거운 여름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학생을 지도하듯 엄격하고 꼼꼼하게 교사들을 훈련시키고 체육교사들은 불만이 가득하면서도 문제 제기 한번 없이 고스란히 강 교수의 훈련을 따른다.

그러던 차에 함께 1급 정교사 연수를 받고 있는 대학시절 동창인 국어교사 이문택의 놀림과 회유에 빠져 윤성철 등은 강 교수의 오후 강좌에 불참한 채 술을 마신다.

이에 강 교수는 세 사람에게 1급 정교사 연수 수료가 불가하니 앞으로 훈련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인다.

이후 세 사람은 강 교수의 집에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고 함께 따라나선 국어교사 이문택은 오히려 삐딱한 자세로 강 교수의 처사가 지나쳤다고 지적하고 나선다.

그러는 와중에 강 교수는 동료 최 교수의 연락을 받고 근처 맥주집으로 향하고 윤성철 일행도 그 자리에 합석하게 된다.

그곳에서도 역시 이문택은 강 교수에 대한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이를테면 추수지도(追隨指導)의 학점 나부랑일 가지고 제자들한테 째째하게 굴지 않느냐며 직설적으로 따지고 물었던 것이다.

계속된 이문택의 공격 때문인지 강 교수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드디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다.

강 교수는 자신이 연수생들에게 엄격하게 굴었던 것은 실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연수생들의 태도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표현대로 연수생들의 지나치게 수동적인 태도가 억누름 자체에 맛을 들이게 했고 그러다 보니 차츰 목적하고 수단이 전도되어서 종당에는 가르치기 위해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억누르기 위해서 가르치는 형국이 되었다고 자기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 일상화된 감시와 통제의 시선

자신의 입장을 밝힌 강 교수는 본격적으로 자기가 지도하고 있는 제식훈련이 최근에 어떤 식으로 변해가는지를 술자리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어떤 한 단위 사회가 처해 있는 시대상황을 가장 첨예하게 반영하는 것이 그 사회가 실시하는 제식훈련이라는 전제 하에 일본군대의 제식훈련,독일 나치의 제식훈련,북한의 제식훈련을 예로 들면서 획일 체제 하에서의 제식훈련이 좀 더 과장되고 부자연스러웠다고 운을 뗀다.

"그럼 우리 한국의 제식훈련 실태는 어떠한가.

아까도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나라는 왜정 때 일제 군국체제의 제식훈련에 오래 젖어왔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이번엔 미국아이들 걸 그대로 받아들여 병영이나 학교에서 두루 활용해 나왔는데,그후 급변하는 국제정세나 제반 국내 여건에 대처하기엔 미흡하다는 판단 아래 미식 제식훈련을 한국 실정에 맞게 수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선 간단한 예를 들어,경례 동작만 해도 전에는 이렇던 것이 지금은 이렇게 바뀌었고,차렷 자세나 행진 및 정지간에 있어서의 주먹도 전엔 달걀을 쥐듯 자연스럽게 쥐던 것이 오늘날은 엄지가 집게손가락 둘째마디를 꽉 누르도록 힘차게 쥐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예를 들자면 한이 없는데,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제식의 변화가 무얼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 실정이 개인보다는 확실히……"

"이봐,선생!"

별안간 감때 사납게 울리는 웬 목소리가 일사천리로 달리던 강 교수의 말허리를 중도에서 뚝 꺾어놓았다.

이때 우리는 홀 안쪽에 테이블에서 이쪽을 향해 거의 뜀걸음으로 다가오는 건장한 체격의 청년을 볼 수 있었다.

"뭐가 어째구 어째?"

우리의 숨구멍을 틀어막듯 통로에 버티고 서며 청년은 대뜸 시비를 걸어왔다.

"술집에 왔으면 곱게 술이나 처마시고 갈 일이지,뭐 나치아이들이 어떻구 이북아이들이 어떻다구?"

윤흥길,「제식훈련 변천약사」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강 교수의 발언 요지는 우리나라의 제식훈련이 최근에 자연스러운 행동을 버리고 좀 더 과장적이고 절도 있는 행동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강 교수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우리의 실정이 개인보다는 확실히 집단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로 나아간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 교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다.

갑자기 등장한 한 사내 때문인데 그는 앞뒤 문맥을 따져볼 때 강 교수 일행을 감시하던 정보기관원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한가롭게 맥주를 즐기는 자리에서까지 기관원이 나와 감시를 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70년대 유신시절이 감시가 만연한 사회였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감시와 통제의 시선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강 교수는 자신의 소신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고 그런 시스템에 길들여져 자신도 모르게 전체주의적인 억압과 지배를 '제식훈련'을 통해 연수생들에게 실천했던 것이며,연수생들은 연수생들대로 교수의 통제에 또다시 길들여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 윤흥길은 바로 이러한 감시와 통제의 순환적 고리를 파헤치는 동시에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제식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에 분명한 초점을 맞춰왔던 것이다.

⊙ 감시와 통제 극복하기

오늘날 각급 고등학교에서는 더 이상 제식훈련을 실시하지 않는다.

또한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이루어가면서 전체주의적인 요소도 많이 누그러들었고 이와 상응해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도 많이 신장되었다.

그러나 감시와 통제가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또한 권력은 감시와 통제에 대한 유혹을 떨쳐내기가 어려울 수 있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논란이 일었던 사이버 모욕죄나 우리 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던 미네르바 재판의 경우도 그 근저에는 여론을 보다 쉽게 파악하고 장악하려는 의도가 놓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네르바 사건의 경우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이루어진 만큼 개인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전망이다.

공동체와 사회발전을 이루기 위해 약간의 진통과 아픔이 있을지언정 개인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옳은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에 합당하게 개인들도 자기 발언과 의사표현에 좀 더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