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A출신 월가 CEO들의 도덕적 해이로 ‘책임론’ 불거져

금융위기 이후 대비 새 커리큘럼…사회적 책임·위험관리 강조

[Global Issue] ‘탐욕의 산실’이란 오명 벗자 … 美 MBA는 변신중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MBA(경영학석사) 학위는 내게 '주홍글씨'와도 같은 부끄러움이 돼 버렸다."

영국의 한 신문기자 출신으로 2006년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땄던 필립 델브스 브라우튼이 지난달 초 영국 일간지 선데이타임스에 기고한 글이다.

세계 명문 경영대학원 중 하나로 꼽히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대해 이 같은 자조섞인 비판이 나온 이유는 바로 최근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동문들 때문이다.

파산 위기에 처해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인수된 뒤에도 자기 사무실을 꾸미는데 130만달러나 들인 존 테인 전(前) 메릴린치 최고경영자(CEO)와, 경영 잘못 책임을 지고 제너럴모터스(GM)에서 쫓겨난 릭 왜고너 전 GM CEO 등이 바로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출신들이다.

세계 금융시장을 이끄는 엘리트 인재의 산실로 각광받아 온 미 MBA 과정이 최근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여론의 따가운 질타를 받고 있다.

MBA 과정이 단기적인 고수익과 기계적인 자산분석 기법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엘리트주의에 따른 과도한 자신감을 키웠다는 게 비판의 주된 이유다.

파이낸셜타임스는 "MBA 출신들은 재학 중 엄격한 케이스 스터디 평가 과정을 거치면서 졸업할 무렵이면 자신의 가치와 능력이 최고 수준에 달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며 "이런 자신감이 위험성 높은 고수익 금융파생 상품을 무모하게 운용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 반성 속에 변화 나서는 MBA

미 주요 경영대학원들도 이 같은 외부의 비판에 깊이 공감하는 분위기다.

인디애나주 노트르담대학의 캐롤린 우 경영대학장은 지난 2일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겪고 있는 금융위기는 높은 인센티브만을 추구하며 금융권에 대한 규제 감독을 소홀히 한 데 따른 것"이라며 "비즈니스 교육계의 전반적인 재점검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고 밝혔다.

제이 라이트 하버드 경영대학장도 지난해 10월 열렸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설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우리 모두는 금융시스템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며 책임을 인정했다.

MBA 과정 재학생들도 커리큘럼의 혁신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미 최대 MBA 학생 조직인 넷임팩트가 지난 3월 MBA 과정 재학생 18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MBA 커리큘럼에서 배운 의사전달 결정이 향후 금융위기의 재발을 막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단 16%에 불과했다.

또 전체 응답자 중 78%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지속가능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MBA과정 커리큘럼이 수정돼야 한다'고 답변했다.

일부 경영대학원들의 경우 이미 MBA 과정 커리큘럼의 구체적인 개편 작업에 나서기 시작하고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교수진들은 기존 커리큘럼이 가졌던 약점들을 전면적으로 점검하고, 위험관리 및 윤리 부문 수업을 강화하는 내용의 교육과정 혁신안 보고서를 오는 5월 말 발표할 예정이다.

미 UCLA 비즈니스 스쿨의 경우 금융위기와 관련된 생생한 케이스를 수업 소재로 삼기 위해 월스트리트저널 파이낸셜타임스와 같은 경제신문의 기사들을 주요 강의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제니퍼 아믹스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현재의 금융위기와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갖는 유사성에 대한 새로운 강의노트를 준비했다.

네덜란드 에라스무스대학 로테르담경영대학원의 조지 입 학장은 "과거 경영대학원들은 '뇌물을 받지 마라' 정도로 단순한 윤리를 가르쳤지만 이제 인센티브가 어떻게 비윤리적인 행동을 유발하는지와 같은 좀 더 깊이 있는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카스 경영대학원의 스테판 스지만스키 부학장은 "금융위기에 대해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강의가 처음부터 제대로 가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MBA, 고액 연봉 약속하는 황금열쇠 아냐

'경영대학원(MBA) 졸업=고액 연봉 보장' 공식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는 MBA 졸업생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성공을 보장하는 황금열쇠'를 꿈꾸며 MBA에 도전했던 많은 인재들이 실업난에 허덕이고 있다.

과거 눈도 돌리지 않던 기업에 취직을 읍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급 인턴직이라도 구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고급 경영관련 능력키우기'를 목표로 한 MBA가 낡은 커리큘럼에 안주, 시장변화의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경제위기 상황에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최근 "MBA 졸업생이라고 자동적으로 인턴십 수당을 더 받는 것은 아니다"며 "과거 문화 · 예술이나 순수과학 분야에서만 존재하던 무급 인턴제가 비즈니스 스쿨까지 침투하고 있다"고 전했다.

자금력이 떨어지는 중소업체 외에 인턴 일자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투자 부티크나 헤지펀드, 대기업 모두 무급 인턴을 늘리고 있다는 것이다.

비즈니스위크는 금융위기로 인해 올 여름 미국 내 주요 기업의 인턴십 자리가 21%가량 줄면서 무급 인턴직이 증가하는 현상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잭 오크스 버지니아대 다든 비즈니스 스쿨 커리어개발 총괄담당은 "예년 같으면 무급 인턴직은 전체 인턴 자리의 1%가량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이미 5%대에 근접했고 아마 10% 수준까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스태시 러드닉 텍사스 오스틴대 매컴 비즈니스 스쿨 MBA커리어 담당도 "보통 같으면 5% 미만의 졸업생이 무급 인턴을 했겠지만 올해는 적어도 10%가 무급 인턴 외엔 인턴십을 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 3월 한 달간 미국에서 없어진 일자리만 66만3000개에 달하고, 지난해 12월 이후 실업자가 510만명에 이르면서 MBA 졸업생을 위한 정식 일자리도 크게 줄고 있다.

전미 MBA 취업담당관들의 모임에선 절반가량의 취업담당관들이 올 MBA 졸업생 일자리가 이미 10% 이상 줄었다고 응답했다.

미 교육부에 따르면 MBA를 포함해 올해 15만8000여명이 대학원을 졸업할 예정으로, 아직까지 취업하지 못한 지난해 졸업생들까지 감안하면 취업 바늘구멍은 더 좁아지게 된다.

이처럼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과거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중소기업으로 눈을 돌리는 MBA 졸업생도 늘고 있다.

MBA 졸업생들이 당연시하던 고액연봉도 사라지고 안정된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 일자리로 가는 졸업생도 적지 않다.

또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미국 내에서도 '철밥통'인 공무원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졸업생이 늘고 있다.

미국 내 전체 금융부문 채용은 지난 2월 1년 전에 비해 3.6% 줄었지만 연방정부 채용은 오히려 4.3% 증가하는 등 공무원은 일자리가 늘어난 얼마 안되는 분야다.

게다가 안정적인 보수와 건강보험 연금 등의 혜택을 따질 때 그만한 일자리가 없다는 평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MBA 출신 구직자들이 공직으로 몰리고 있다"며 "올초 매릴랜드대 MBA에서 정부가 개최한 채용행사에는 지난해의 열배가 넘는 100여명의 학생이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팬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같은 명문 MBA에서도 '공직열풍'이 예외가 아니라는고 이 신문은 전했다.

경제위기가 낡은 커리큘럼으로 배운 MBA 졸업생들의 진로를 180도 돌려놓고 있는 것이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