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확장돼야 하는가?

[논술 기출문제 풀이] 2009학년도 고려대학교 정시 논술 문제 해제 (下)
전쟁을 피해 고향 집에 돌아온 나는 하루 종일 독서와 사색에 빠져서 가족들을 무심히 대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 가슴에 사무쳤다.

고아는 배고픔에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헐벗은 노파는 이불도 없이 밤새 웅크려 있으며,몹쓸 병에 걸린 자들이 허리를 조아려 구걸을 해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

나는 이들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에 하루하루를 탄식 속에 지냈다.

저들은 저들 자신이 괴로운 것일 뿐 나와는 무관한 일인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까지 동요시키는 것일까?

생각해 보건데 나에게 있는 지각이 천지의 기(氣)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혈맥이 온 몸에 통하듯이 모든 사람은 천지의 기와 연결되어 있다.

자석도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데 지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남의 불행을 차마 견디지 못하는 인(仁)이야말로 바로 사람을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온 세상 모든 인류는 나의 동포이다.

겉모습은 서로 다르고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날 수 없다하더라도,나는 책을 통해 저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고 세계 곳곳에서 만든 물건들을 사용하고 여러 나라의 예술을 향유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가 진보하면 우리도 진보하고 퇴보하면 우리도 퇴보하며,그들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고 그들이 처참해지면 나도 처참한 심정이 된다.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사랑으로 끌어당기니 내 어찌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열강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난세에 태어나 계급과 인종과 남녀 사이의 억압으로 인한 세상의 괴로움을 목격했다.

내 생각으로는 모든 차별을 없애는 대동(大同)의 도(道)야말로 모든 사람을 이러한 괴로움에서 구제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대동의 도를 이루자면 차별을 낳는 가족이나 국가 역시 없애고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가족이 있으면 자기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탐욕을 부리게 되며,불우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질병과 추위,굶주림과 무식함을 벗어날 수 없다.

국가가 있으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남의 나라를 착취하며 결국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참혹한 지경에 몰아넣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족과 국가의 구별을 넘어 온 세계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도 오래도록 만나지 않으면 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일본인 1000명의 익사나 러시아인 2000만명의 기아에 관한 기사도 내 아내의 베인 손가락과 위통에 시달리는 어린 아들의 찡그린 표정만큼 나의 동정심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분명 먼 곳의 불행과 가까운 곳의 불행은 우리 마음에 서로 다른 파장을 일으키고,모든 인간적 사랑과 공감,그리고 가치 부여는 관심의 원근법의 지배를 받는다.

어떤 이들은 사랑이 좁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로 확산되어 가고,그와 더불어 사랑의 가치도 증대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자기애보다 동료애가,동료애보다 조국애가,그리고 조국애보다는 인류애가 더욱 가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사랑도 보편화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심의 거리가 변하면서 나타나는 여러 사랑을 제각기 참되다고 인정하지 않고,단지 사랑이라는 동일한 집합의 양적 확장에서 나타난 산물로 여긴다.

즉 강도와 양상을 달리하는 여러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단 하나의 사랑이 그 가치를 증대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사랑의 가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범위가 커질수록 사랑의 대상에 대한 관심의 거리도 벌어지고,그에 비례해 집합 안에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가치들도 주변화된다는 사실이다.

가족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는 인격적 가치로 간주되던 것이 더 확장된 공동체에 대한 사랑에서는 그러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크기나 그 집합에 속한 사람 수와는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의미상의 거리이고,그 거리가 부여하는 가치의 내용이다.

물론 인류 공동체는 어떤 민족이나 국가보다 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지금-여기'에 속박된 인간이 정말 그런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모든 개인은 인류 공동체의 구성원이지만 동시에 더 작고 더 친밀한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며,공동체 각각의 가치를 구현하며 살고 있다.

그런 개인에게 가까운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처럼,아니 그보다 더 강하게 저 먼 인류를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류애보다 조국애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조국은 인류보다 구체적인 가치의 내용을 개인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민족보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예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다음과 같은 가상적 상황을 생각해 보자.

어느 겨울 아침 나는 강둑을 따라 걷고 있다.

그때 한 자선단체 봉사자가 내게 급히 뛰어와 말하기를,내가 입고 있는 외투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자선단체는 외투를 불쌍한 한 어린이의 생명을 구하는 데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나는 자선단체 봉사자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중 하나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첫째,자선단체는 내가 기부한 외투를 판매해 현재 장티푸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빈곤국의 한 어린이에게 예방접종을 해 주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둘째,가까운 곳에서 물에 빠진 아이가 구조되었는데 이 아이를 체온저하증으로부터 보호할 외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체온저하증 상황은 장티푸스 위험의 상황보다 더 시급하지만,장티푸스에 걸린 아이가 받을 고통은 체온저하증 아이가 받을 고통보다 훨씬 더 심하다.

내가 실행할 수 있는 행위 A와 B가 있을 때,'나는 A가 B보다 더 좋거나 덜 나쁘다고 생각한다'를 간단히 '나는 A를 B보다 선호한다'로 표현하자.

내가 '최소한의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나의 선호는 다음 조건들을 만족시킨다.

(조건1) 체온저하증으로 고통받는 아이가 있음이 사실로 밝혀질 때,나는 체온저하증 아이를 돕는 행위(SN)를 이 아이를 돕지 않는 행위(AN)보다 선호한다.

(조건2) 나는 체온저하증 아이를 돕지 않는 행위(AN)를 장티푸스의 위험에 처한 아이를 돕지 않는 행위(AD)보다 선호한다.

(조건3) 나는 장티푸스의 위험에 처한 아이를 돕는 행위(SD)를 체온저하증 아이를 돕는 행위(SN)보다 선호한다.

내가 '합리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나의 선호는 다음 조건들을 만족시킨다.

(조건4) A,B,C라는 실행 가능한 행위들 중 하나를 선택할 때,내가 A를 B보다 선호하고 B를 C보다 선호하면,나는 A를 C보다 선호한다.

(조건5) 조건4에서 행위들 중 하나가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밝혀지더라도,나머지 행위들에 대한 나의 선호는 바뀌지 않는다.

(조건6) 내가 A를 B보다 선호하면,나는 B를 실행하지 않는다.

Ⅱ. ‘공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제시문 (나) (다) (라)를 비교하고,이 제시문들을 참고하여 공감
과 도덕적 실천의 상관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50점)


Ⅲ. 제시문 (마)의 ‘조건1’에 언급된 선호에 따른 행위는 도덕적으로 요구되는 행위인 반면,예방접종을 받으면 장티푸스를 피할 수 있는 먼 나라의 아이가 있음이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그 아이를 돕지 않는 행위는 도덕성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주장이있다.


제시문 (마)에 주어진 ‘최소한의 도덕성’과 ‘합리성’의 조건들을 근거로 하여 이 주장을 비판적으
로 논하시오. (20점)


※ 유의 사항

1. 답안에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을 쓰지 말 것.

2. 답안에 제목을 쓰지 말 것.

3. 제시문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쓰지 말 것.

4. 분량은 띄어쓰기를 포함해 Ⅰ은 500자(±50자),Ⅱ는 1000자(±100자)가 되게 할 것. Ⅲ은 제공된 답안지 내에서 자수에 제한없이 쓸 수 있음.

⊙ 논제 Ⅱ 해제

논제 Ⅱ에서는 '공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제시문 (나),(다),(라)를 비교하고,공감과 도덕적 실천의 상관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학생이 작성하는 글은 제시문을 '비교'하는 내용과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내용으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먼저,'비교'는 비교의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며 서술하는 것인데,비교 대상 간 공통점이 흔히 '비교의 기준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문제에서 '공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비교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공감 확장의 가능성,영향력,태도와 범위 등을 중심으로 분석해 각 제시문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존재하는지 서술하면 되겠습니다.

제시문 (나)는 '대동의 도(道)'를 이루기 위해 모든 차별을 낳는 국가와 가족의 구별을 넘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를 자신의 동포로 인식하기 때문에 보다 확장된 공감을 중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제시문 (다)는 공감의 범위가 확장되면 대상에 대한 관심의 거리도 멀어지고 그에 따라 가치가 상실된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에서 민족보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 공감의 범위 확대는 현실적으로 그 가치를 창출할 수 없으므로,좁고 친밀한 범위 안에서 구체성을 가지는 공감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제시문 (라)는 이별의 아픔을 겪으면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당신을 사랑하듯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김용택의 '사랑'이라는 시입니다.

개인적인 사랑과 이별을 통해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구체적이고 좁은 범위에서의 공감이 보편적인 공감으로 확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시문 (나)와 (다)는 공감의 범위에 따라 국지적 차원과 지구적 차원이 대립할 수 있다고 보고 제시문 (나)는 보편적 공감을 우선시하고,제시문 (다)는 특수한 공감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공감의 범위에 대해 서로 상반된 입장이라면,제시문 (라)는 두 관계가 상충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이라는 것에 주목해 정리하면 됩니다.

두 번째,'자신의 견해'는 일반적인 글쓰기에서의 자유로운 견해가 아니므로 제시문에서 드러난 견해 중 일부를 선택해 다른 견해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얼마나 설득력있게 전개하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세 제시문을 참고하라는 조건이 붙어 있으므로 (나)의 보편적 공감,(다)의 특수한 공감,(라)의 두 관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제시문 중 한 관점을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입장을 선택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논리적으로 다른 견해를 비판하고,얼마나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가입니다.

⊙ 논제 Ⅲ 해제

논제 Ⅲ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논제에서 묻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문제에서 제기된 주장을 제시문 (마)의 '최소한의 도덕성'과 '합리성'의 조건을 근거로 비판하는 문제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시문 (마)의 조건 1,2,3은 '최소한의 도덕성'을 가진 사람들이 선호하는 조건이며,조건 4,5,6은 '합리성'을 가진 사람들이 선호하는 조건들입니다.

조건 1은 (체온저하증 아이를 돕는 행위) SN > (아이를 돕지 않는 행위) AN

조건 2는 (아이를 돕지 않는 행위) AN > (장티푸스의 위험에 처한 아이를 돕지 않는 행위)AD

조건 3은 (장티푸스의 위험에 처한 아이를 돕는 행위) SD > (체온저하증 아이를 돕는 행위) SN이므로 이를 종합하면,SD > SN > AN > AD가 됩니다.

이 중 문제 상황에서 주요하게 고려할 행위는 SD와 AD입니다.

그런데 조건 4에서 A,B,C라는 실행 가능한 행위들 중 하나를 선택할 때 A를 B보다 선호하고 B를 C보다 선호하면,A를 C보다 선호한다고 했으므로 SD를 AD보다 선호하게 됩니다.

따라서 장티푸스의 위험에 처한 아이를 돕는 행위가 돕지 않는 행위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선호는 조건 5에 의해 SN과 AN가 실행되지 않더라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건 6에 의해 SD를 AD보다 선호하므로 AD를 실행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최소한의 도덕성과 합리적인 사람은 장티푸스에 걸릴 위험에 처한 아이를 돕는 행위를 선택하게 되므로,'예방접종을 받으면 장티푸스를 피할 수 있는 먼 나라의 아이가 있음이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그 아이를 돕지 않는 행위는 도덕성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올바른 것이 아니게 됩니다.

사실 논제 Ⅲ은 문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주어진 조건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해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추리논증문제로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문제 유형이란 점에서 많은 학생들을 당혹케 했다고 합니다.

이 문항은 대학 측에서 발표한 '출제의도'에 따르면 수험생들의 논리적 사고 능력을 평가하고자 의도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대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논제에서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한 후 논제를 충족시킬 수 있는 내용들이 제시문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김은희 S · 논술 선임연구원 lovemin@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