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폭력보다 잔인한 건 시간을 통제하는 규율

1. 자유를 억압하는 규율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27. 이청준「잔인한 도시」
197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를 읽어가다 보면 바로 그 전 해에 국내에 개봉되었던 밀로스 포먼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떠올릴 수 있다.

작품의 소재가 전자의 경우 교도소이고,후자의 경우는 그와 비슷한 환경을 지닌 정신병원인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두 작품 모두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 존재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신 시절을 겪고 있던 한국이나 베트남 전쟁으로 황폐해진 미국 역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적잖이 억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쉽사리 겹쳐진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범죄자 맥머피는 좀 더 편한 생활을 위해 스스로 미친 척하며 정신병원으로 후송된다.

그러나 보다 자유로울 것 같았던 병원에서도 보이지 않는 압력은 존재하고 있었고 이를 벗어나려던 맥머피는 결국 간호사에게 끌려가 끔찍한 전기 치료를 받게 된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교도소가 아닌 일상적인 공간에서도 사소한 규율을 가지고 미시적인 권력을 작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병원 간호사 레취드는 겉으로는 폭력을 행사하진 않지만 규율된 시간을 통해 환자들의 신체와 정신을 통제하고 있는데 이는 그 어떤 물리적 폭력보다도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주제의식은 근대적인 규율 권력을 비판한 미셸 푸코와도 연결될 수 있다.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벤담의 원형 감옥을 소개했는데 그것은 근대적 규율 권력의 가장 상징적인 기구였던 것이다.

한가운데 감시탑이 솟아 있고 그 주위에 원형으로 감방들이 배치돼 있는 원형 감옥은 감시원은 항상 죄수를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시원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죄수들은 끊임없이 감시하는 시선을 의식하다가 결국에는 이를 내면화하여 스스로 자신을 규율하기에 이른다.

영화 속의 정신병원처럼 원형 감옥은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신체와 정신을 규율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원형 감옥의 구조가 현대 사회에 일반화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감시의 대상도 범죄자 같은 예외적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로 확대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공장,학교,병원,군대,교회 등은 모두 이러한 감시를 가능하게 하는 기구이며 개인은 권력 기구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적 존재가 된다.

결국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근대의 규율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미학적으로 접근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2. 방생을 통한 자유의 대리만족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는 대표적인 규율 권력 기구인 감옥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권력과 개인의 자유 사이의 갈등을 주제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한 늙은 사내가 가막소에서 출옥한다.

가막소는 지금의 교도소인데 이상하게도 사내는 출옥한 뒤에 곧장 귀가하지 않고 그 주변을 맴돌게 된다.

그리고는 길가나 숲에서 주워 모은 동전으로 새를 방생(放生)하는 장사꾼에게서 하루에 한 마리씩 새를 사서 공중에 날려 보낸다.

아직도 여전히 가막소에 수감된 자들의 소망을 위해 그는 수감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으로 새를 날려 보냈던 것이다.

작품 속 방생의 행위가 자유에 대한 대리만족임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지만 현실에서 그렇지 못한 이들이 심리적인 위안으로,혹은 대리만족으로 방생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새를 방생하는 장사가 작품 속에서 매우 성업 중이라는 사실이다.

원래 새 장수는 가막소에서 이제 막 출소한 사람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았었다.

자신이 그간 억눌려 왔던 삶에서 벗어난 그 마음으로 새를 자유롭게 방생하는 기분을 출감자들은 즐겼던 것이다.

그런데 늙은 사내가 출옥할 즈음 새 장수는 출감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새를 팔고 있었고 그 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이는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일반인들도 수감자들 못지않게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유를 억압받은 채로 살아 왔다는 방증이 된다.

현실에서 자유로운 삶을 향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생을 통한 대리만족을 하게 되는 것이다.

텍스트를 벗어나 잠시 작품이 창작될 때의 한국 사회를 살펴보면 시민들의 자유가 엄격히 통제되고 제한되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당시의 독재 정부는 규율 권력을 매우 효율적으로 행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머리 길이,치마 길이와 같은 얼핏 사소해 보이는 것에 대한 통제였다.

물론 은밀한 곳에서 물리적 폭력도 행사되었겠지만 당시의 정권은 겉으로는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시민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미시적인 규율 권력을 활용한 까닭이었다.

머리라든지 의복과 같은 신체에 대한 자기 검열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의식에 대한 자기 검열로 이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당대의 시민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을 경험했고 그런 까닭에 자유에 대한 갈망은 무의식 속에서 더욱 강렬해졌다.

실제 자기 자신은 아니더라도 새의 방생을 통해 자유를 대리만족하고 싶은 이들이 늘어난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3. 규율 권력의 균열과 자유

작품 속에서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아들을 기다린다는 명분,새를 한 마리씩 날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끝끝내 늙은 사내가 가막소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 내용이다.

왜 늙은 사내는 가막소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가막소가 늙은 사내의 자유 의지를 앗아갔기 때문이다.

규율 권력이란 종국에는 자유 의지를 앗아서 규율에 적합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수십년간 가막소에서 살았던 늙은 사내는 가막소라는 규율 권력에 의해 자유 의지를 상실해 버린 가막소 인간형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늙은 사내에게 가장 편한 공간은 가막소와 그 주변이 되는 것이다.

자,이제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한 부분을 함께 읽어 보도록 하자.

손 안에 든 새가 사내를 재촉하듯 날개를 두어 번 퍼득대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도 이제 그만 녀석을 놓아 줄 자세를 취했다.

퍼득여 대는 녀석의 양 날개 밑으로 손끝을 집어넣어 녀석을 높이 받쳐 올렸다.

그리고 그가 뭔가 혼잣말 같은 것을 입 속으로 중얼대며 녀석을 막 놓아 주려던 참이었다.

사내는 금세 뭐가 이상해졌는지 숲으로 놓아 주려던 녀석을 다시 가슴팍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녀석의 날개를 들추고 벌어진 날갯죽지 밑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가 들춰낸 녀석의 양쪽 날개 밑엔 무슨 가위 같은 물건으로 속깃을 잘라낸 자국이 역력했다.

사내는 일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며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기게 됐는지 짐작이 안 가는 듯 멍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히 잘려나간 녀석의 속날개깃 자국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의 눈길에 이윽고 어떤 세찬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이청준,잔인한 도시


인용된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새 장수가 새를 얻었던 방법은 새를 멀리 날아가지 못하게 속깃을 잘라 내는 것이었다.

방생을 하더라도 멀리 날아가지 못해 다시 인근 숲으로 되돌아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늙은 사내가 가막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새는 분명히 날아간다.

그러나 새의 비상(飛上)에는 한계가 있다.

늙은 사내는 분명 자유롭다.

그러나 그는 가막소 주변을 맴도는 자유밖에 누릴 줄을 모른다.

새나 늙은 사내나 모두 규율에 의해 길들여진 존재였던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늙은 사내는 새의 속깃이 잘려 나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아무리 규율 권력이 개인을 지배하려 해도 언제나 성립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늙은 사내는 '속깃이 잘려 나간 새'를 보면서 종국에는 가막소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자유 의지를 회복한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포먼의 영화에서 맥머피는 전기 치료로 제정신을 잃는다.

그러나 맥머피를 그저 지켜만 보던 벙어리 추장은 '제정신을 잃은 맥머피'를 보며 유유히 병원을 빠져 나간다.

가막소를 벗어나는 늙은 사내와 같이.

아무리 규율 권력이 개인을 완벽히 지배하려 해도 균열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자유에 대한 열망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