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경기 살리려면 돈 필요한데 … 세계가 돈 구하기 열풍”

[Focus] “빚을 내서라도 경제위기 넘기자”… 글로벌 ‘쩐(錢)의 전쟁’
세계 경제 위기가 한창인 가운데 그 뒤에선 '글로벌 쩐의 전쟁'이 한창이다.

금융 위기의 발원지였던 미국을 비롯해 중국 유럽연합(EU) 일본 등 주요국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현금 확보 전쟁이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막대한 무역 적자를 내고 있는 미국은 적자를 메우고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려면 무한정 돈을 조달해야 할 상황이다.

자국 통화인 달러화가 세계 기축 통화로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엄청난 이점 때문에 미국은 중앙은행에서 돈을 계속 찍어 내 현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혹은 국채를 발행해 세계 각국에 팔아 재원을 조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 국채 시장에서 미 국채를 주로 사들이던 중국 일본 러시아 영국 등에서 회의적인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들 주요 수요국의 경우 당장 자국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돈을 확보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 이들 국가는 이미 너무 많은 미 국채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무한정 계속해서 미 국채를 사들일 수 없는 처지다.

다시 말해 미국이 내는 적자를 다른 나라들이 국채를 사들여 메워 주어야 하는 '글로벌 임밸런스(전 세계 불균형)'가 언젠가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한 것이다.

미 정부는 금융시장 안정 자금 8500억달러와 2차 경기부양 자금 7870억달러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의 2009년 재정 적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 규모인 1조7500억달러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산됐다.

미 재무부가 2008년 발행한 국채는 8860억달러였다.

올해는 2조달러에 달하는 국채를 발행해야 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국의 국채 발행은 부족한 재원을 메워 주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국가 부채로 직결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금융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2008년 9월30일 이미 10조달러를 넘어섰다.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부근 한 빌딩에 설치된 '국가 부채 시계'는 이미 14자리(10조달러)까지 늘어난 상태다.

미 재무부가 발행한 국채는 현재까지 세계 주요 투자국들이 소화하고 있다.

2008년 말 기준 미 국채 보유 현황을 보면 중국 일본 영국 3개국에서만 1조7000억달러어치에 달하는 미 국채를 사들여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

미 국채 7000억달러가량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은 요즘 걱정이 많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1차에 그치지 않고 더 큰 2차 파도가 몰려들면서 미 국채 수익률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외환보유국인 중국은 외환보유액 중 36%를 미 국채를 매입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미 국채 수익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게 하락하는 상황에서도 중국은 2186억달러어치 국채를 추가로 사들였다.

미 국채 외에 다른 자산 투자까지 합하면 중국은 지난해 한 해에만 국내총생산(GDP)의 10%인 4000억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미국에 투자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렇게 중국이 보유한 미 국채, 공공기관 채권, 은행 예금 등을 모두 합하면 1조7000억달러라는 막대한 규모에 이른다.

미국 내 자산이나 달러화 표시 자산 가치가 떨어진다고 갖고 있는 미 국채를 시장에 내놓는 순간 스스로 가격 폭락을 유도하는 셈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또 중국이 미 국채를 내놓으면 미국과의 무역 · 환율 분쟁도 가열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달 하순 중국을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미국과 중국은 한 배에 탔다"고 표현한 것은 이런 상황을 의미한다.

클린턴 장관은 "다행히 미국과 중국이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며 중국의 미 국채 매각 유보를 기정 사실화했다.

문제는 중국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 및 지방 정부가 발행하는 지방채의 발행도 올해 급격히 늘어날 것이란 점이다.

쑹리(宋立) 중국 인민대학 개혁과발전연구원 교수는 "중앙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2조위안 재정 투자 가운데 중앙정부 부담은 1조1800억위안이고 나머지는 지방정부 · 공기업 등이 투자를 통해 메우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재정이 불안한 지방 정부를 대신해서 중앙 정부가 채권을 발행해 분배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지난해 1100억위안의 재정 적자를 냈던 중국은 올해엔 그 9배에 가까운 9500억위안의 재정 적자를 감수하겠다는 계획이다.

국채 발행을 통해 경기 회복을 추진하고 나선 일본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일본의 올해 성장률을 전후 최악인 -4%대로 예상한 뒤 장기 국채 신용등급(AA)을 하향 조정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본 국채 불패 신화도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외국계 국부펀드가 일본 국채를 매입하면 이자 소득세(현재 15%)를 감면해 주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또 집권 자민당을 중심으로 무이자 국채(제로 쿠폰)를 발행해 개인 보유 상속 · 음성 자금을 대거 국채 시장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올해 일본의 신규 국채 발행은 작년보다 31% 증가한 33조2900억엔이고 차환 채권 등을 포함한 국채 발행 총액은 132조2800억엔대에 달할 것으로 예상됐다.

이는 전년보다 약 6조엔 증가한 수치다.

특히 올해는 재정지출 규모가 대폭 늘어나는 데 비해 국가 세수는 줄어들면서 일반 회계 예산 88조엔(세출 기준) 가운데 약 33조엔을 신규 국채 발행으로 충당해야 한다.

또 1월 중 무역 적자가 9526억엔(약 100억달러)대로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하는 등 1990년대 장기 불황 때보다 경기 추락이 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올해 예산과 별도로 추가 국채 발행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선진국 간 국채 발행 경쟁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유로존에서는 이미 국채 발행 공조가 진행 중"이라며 "각국 정부가 앞다퉈 국채를 발행하는 경쟁적인 상황은 피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섰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