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는 선인도 악인도 될줄 알아야 한다”

[실전 고전읽기] ⑨ 마키아벨리「군주론」
사람을 평가할 때 흔히 "누구(유명 인사)와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그런데 누가 당신더러 '마키아벨리'와 같다고 평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아무리 취향이 독특하기로서니 그런 말에 우쭐한 느낌이 들기란 힘들 것이다.

우리 뇌리에 각인된 마키아벨리의 이미지로 말하자면,간교하고 약삭빠르기 이를 데 없는 권모술수의 달인이자 신의와 도덕 따위는 저 멀리 내팽개친 위인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배덕자(背德者)'라는 공식이 얼마나 고약하게 굳어졌는지 시중에는 「마키아벨리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책도 출간되어 있다.

내용은 제목 하나로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출세를 하고 싶다면 철저하게 야비한 인간이 되라는 염세적 유머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이렇듯 도매금으로 넘어가 욕만 잔뜩 먹어도 괜찮은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서양 격언에도 "책을 평가하려면 겉 표지가 아닌 책 내용으로 판단하라."는 일갈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수사(修辭)적 장식으로서 마키아벨리의 이름을 연발할 뿐이지,실제 마키아벨리라는 인물이 어떤 고민과 생각을 품고 이 세상을 살다 갔는지는 잘 모른다.

마키아벨리의 진면목을 살펴보고 싶다면 그의 저서를 찬찬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가 현재와 같은 악명을 떨치게 된 이유는 순전히 그의 저서 「군주론」이 피력하고 있는 정치 사상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 태어난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는 생전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악행을 저질렀거나 기벽으로 특이한 유명세를 얻은 적도 없는 멀쩡한 인물이었다.

행정 관리로 활동한 경력도 있고 외교관으로 봉직하였으며,우수한 역사학자이자 정치이론가였던 그가 악랄한 배덕자로 자리매김한 까닭은 오로지 마키아벨리가 상정한 이상적 군주상이 도덕군자와는 거리가 꽤나 멀기 때문이다.

"무슨 일에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스스로를 선한 인간으로만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많은 악인들의 무리 속에서 파멸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는 선하기만 해서도 안 되고 필요에 따라서는 선인도 악인도 될 줄 알아야 한다."라고 설파한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도덕적 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강하고 현명한' 군주의 자질은 종종 모질고 잔인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의 이름을 권모술수의 대명사쯤으로 생각할 사람들에게는 놀랍게도 그의 「군주론」은 근대 정치학을 개척한 획기적인 저서로 공인받는다.

방금 인용한 「군주론」의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알겠지만,마키아벨리가 결코 위악(僞惡)을 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악을 위해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현실 정치에 적합한 처방이 요구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해지는 것이다.

정치란 본래 도덕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으며,도덕에 연연하는 순간 침몰하게 마련이다.

「군주론」이 근대 정치학의 초석을 놓은 고전으로 평가되는 이유도 마키아벨리가 정치를 도덕과 종교로부터 해방시켜 고유의 독립영역을 창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정치일 뿐이다.

그리고 정치는 동기와 수단을 떠나 오로지 결과 그 자체가 중요하다.

물론 마키아벨리도 자신의 주장이 양심적 삶에 걸맞지 않음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정치 현실을 무시하고 백일몽을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척이나 솔직한 인간이었던 그는 '그랬으면 좋겠다'와 '실제로 그러하다'를 명확히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삶과 있어야 할 삶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까닭에,일어나야 할 당위(當爲)만을 주시하고 현실(現實)에서 일어나는 실태를 고려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를 보존하기 보다는 오히려 파괴한다."라는 「군주론」의 구절에서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냉정한 머리로 이 세상을 관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이렇게 냉정한 정치 이론을 펼치게 된 데에는 당대의 종교운동 실패 또한 영향을 미쳤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꽃이 만개한 나라이기도 하였지만 프랑스의 침입과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청거리는 나라이기도 하였다.

이 때 도미니크 수도원 원장이었던 사보나롤라(Savonarola)는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입을 참된 신앙의 결여와 도덕의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해석하고,도덕적 설교와 예언을 통해 이상적 나라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사보나롤라의 실패한 혁명을 관찰한 마키아벨리는 이를 두고 "장미와 화환만으로는 혁명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마키아벨리 역시 외세의 침략과 내분에 허덕이는 조국 이탈리아가 구원되기를 간절히 염원하였다.

하지만 지도자의 흥망(興亡)과 국가의 영락(榮落)을 동일시한 마키아벨리의 '메시아'는 강력한 권능을 가진 '군주'의 모습을 가진다.

철저한 현실주의의 견지에서 조국을 구원할 '메시아'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며 집필한 마키아벨리의 구국사상이 곧 그의 「군주론」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 사상의 중심적 주제는 어떻게 현명한 군주가 국가를 창설하고 유지하며 영속화시키느냐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염원은 그가 「군주론」을 헌정한 메디치 가문도,말 많던 보르지아 가문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군주론」은 수백 년의 생명을 자랑하며 현실주의 정치철학의 큰 산맥을 형성하였다.

현재까지도 여러 현실주의 계파의 저서에서 끊임없이 「군주론」의 반향이 메아리치고 있는데,특히 마키아벨리의 부활이라고 평가 받았던 현실주의 정치학의 태두 한스 모겐소의 「국가의 정치」에서는 마키아벨리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구절이 유독 많다.

그렇다면 이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한 숟갈 맛보기로 하자.

다음의 대목을 음미해보라.

☞ 기출 제시문 (이화여대 2001학년도 정시 논술)

나는 상상적인 견해보다 사물의 구체적인 진실을 따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현실적 존재로서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방식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이상(理想) 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열중한 나머지 현실을 포기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멸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서 완벽한 선(善)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착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파멸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지위를 보전하고자 하는 군주는 좋지 않은 짓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언제 그것이 필요하고 언제 그것이 필요치 않은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악덕이 없이 그의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는 그런 악덕의 오명(汚名)을 뒤집어쓰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모름지기 군주는 두려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함께 누리기는 어려우므로,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사랑을 받기보다 두려움을 받는 편이 안전하다.

사람들이란 일반적으로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이고 위험을 피하기에 급급하며 이익을 탐낸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주가 은혜를 베푸는 동안은 전적으로 군주의 편이어서 자신의 피,재산목숨과 자식까지도 바치겠다고 하는데,그것은 실제로는 그럴 필요성이 별로 없을 때 하는 말이다.

막상 그래야만 할 때가 닥치면 그들은 배반한다.

그래서 그들의 말만 믿고 다른 준비를 해놓지 않은 군주는 몰락하게 된다.

위대하고 고상한 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돈을 주고 얻은 우정은 매수한 것일 뿐 진정으로 확보한 것이 아니며,따라서 위기에 몰리면 군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인간은 두려움을 주는 사람보다 사랑을 주는 사람을 해칠 때 덜 망설인다.

사랑은 의무의 사슬로 묶여 있는 것인데,인간은 이기적이어서 자기 목적에 도움이 될 때는 언제든지 그 사슬을 끊어버린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심으로 유지되는데 그것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

☞ 기출 논제 (이화여대 2001학년도 정시 논술)

제시문들은 국가를 이끌어가는 원리와 방법에 대한 동서고금의 다양한 생각들을 보여준다.


제시문 (가 : 남명 조식의 '을묘사직상소'),제시문 (나 :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제시문 (다 :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를 논의의 근거로 삼아 현대적 의미의 리더십을 논술하시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b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