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 우열이 있나?… 다른 문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 다음 제시문을 읽고 문제에 답하시오.

[논술 기출문제 풀이] 2009년도 서강대학교 수시 2-1 인문/국제어문학부 논술기출문제 풀이 (上)
한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생활관습이라든지 사고방식,생활양식,인간관계,신앙생활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그 나라의 사회생활을 전체적으로 파악해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중략)…

한 사회의 문화는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형성된 것이므로 다른 문화와 비교해서 우열을 판단할 수 없음은 물론,다른 사회의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서도 안 된다.

즉,다른 사회의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하고,그 사회의 맥락에서 문화를 이해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 고등학교 「사회 · 문화」

나-1 '도시 유목민'이 정보화 사회의 미래상이라는 전망이 없지 않습니다.

농본문화에서 유목문화로 전환되는 과정이 현대라는 것이지요.

- 신영복 「강의」

나-2 최근 5000년의 역사는 정착민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해져 왔다.

그런데 정착민이 소개하는 역사란,그들이 자신들의 합법적인 부를 약탈하러 왔다고 여기는 '야만적인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대항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문명된' 국가를 세우려 한 노력의 연속이다.

- 자크 아탈리,「호모 노마드,유목하는 인간」

유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단지 윤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유교는 불교와는 아주 달리,전적으로 세간내(世間內)의 세속인의 윤리였다.

그리고 불교와는 더욱 대조적으로,유교는 현세와 그 질서 및 관습에의 순응이었으며,실로 궁극적으로는 교양 있는 세속인을 위한 정치적 준칙과 사회적 예의범절의 거대한 법전에 불과하였다.

세계의 우주적 질서는 실로 불변인 동시에 깨뜨릴 수 없는 것이며,사회의 질서라고 하는 것도 이 우주적 질서의 한 특수한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위대한 신령들이 관리하는 우주의 질서는 분명히 세계의 행복,특히 인간의 행복을 원하였다.

사회의 질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천하의 '행복한' 평온과 영혼의 균형은,그 자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주에 순응함으로써만 얻어졌으며,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었다. …(중략)…

인습적으로 교육받은 자는 고래(古來)의 의식(儀式)에,신분에 맞는 경건한 예의범절을 갖추고서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그는 몸놀림이나 움직임을 포함한 모든 행위를 '예절'-이것은 유교적 근본개념의 하나이다!-의 명령과 신분적인 관습에 따라 정중하고도 기품 있게 통제하였다. …(중략)…

그 스스로의 내면에서 또 사회와의 관계에서도 조화를 이루고 균형 잡힌 태도를 취하는 '높은 인간'-이것은 공자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많은 표현 중에서 반복되는 중심개념이다-은 어떠한 사회적 상황에서도 그것이 고급이건 저급이건 간에 그 상황에 따라,그리고 자신의 품위를 손상시킴이 없이 행동한다.

자제된 침착성과 온당한 몸가짐,그리고 의례에 따라 순서가 올바르게 지켜지는 궁정살롱적 의미의 우아함과 품위가 그의 특색을 나타내주었다.

따라서 초기 이슬람의 봉건적 전사의 정열이나 과시와는 대조적으로 주의 깊은 자제,자기성찰 및 신중함이 중국의 군자(君子)의 특색인 것이다.

특히 정열이 억제되었는데,이는 정열이 환희의 형태를 포함하여 모든 형태에 있어서 모든 선의 근원인 영혼의 평형 및 그 조화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에서와 같이 모든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모든 비합리적인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으며,또 불교에서와 같이 현세로부터의 구제를 위해서가 아니라,현세에의 순응을 위해서였다.

- 막스 베버 「유교와 도교」

흉노(匈奴)는 북쪽 거친 땅에서 살면서 기르는 가축을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닌다.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녀서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농사를 짓지도 않는다.

그러나 각자 영역은 나뉘어져 있다.

글이나 책이 없고 말로써 약속을 한다.

어린아이도 양을 타고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쏠 수 있고,좀 더 자라면 여우나 토끼를 쏘아 먹을거리로 쓴다.

남자들은 활을 당길 만한 힘이 있으면 모두 무장 기병이 된다.

그들의 풍속은 한가할 때는 가축을 기르면서 새나 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위급할 때에는 전원이 싸움에 참여하여 침략하고 공격하는데,이것이 그들의 천성이다. …(중략)…

싸움이 유리하면 진격하고 불리하면 퇴각하며,도망쳐 달아남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으면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임금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거나 침구로 쓴다.

건장한 자가 좋은 고기를 먹고 노인은 그 나머지를 먹는다.

건장한 자를 소중하게 여기고 노약자를 가볍게 여긴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후처를 아내로 삼고,형이 죽으면 그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는다.

그들의 풍속은 이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성(姓)이나 자(字)는 없다. …(중략)…

그들의 법에서는 칼을 칼집에서 한 자 이상 뽑은 자는 사형에 처하고,도둑질한 자는 그 가족과 재산을 몰수한다.

가벼운 죄가 있는 자는 알형(軋刑?c칼로 얼굴을 베거나 수레바퀴 밑으로 몸을 넣어 뼈를 부수는 형벌)에 처하고,큰 죄를 지은 자는 사형에 처한다.

옥에 가두는 것은 길어도 열흘을 넘지 않으니,죄수는 전 나라를 통틀어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한(漢)나라의 어떤 사자(使者)가 "흉노는 노인을 천대하는 풍속이 있소"라고 하자,중항열(中行說 · 한나라 출신으로 흉노 임금의 참모가 된 사람)이 한나라 사자를 몰아붙이며 말했다.

"당신네 한나라 풍속에도 주둔군이 종군하여 떠날 때 그의 늙은 아버지가 자신의 따뜻하고 두터운 옷을 벗어주고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갈라주어 보내지 않소?"

한나라 사자가 "그렇소"라고 말했다.

중항열이 말했다.

"흉노는 분명 싸움을 중시하는데,노약자는 싸울 수 없기에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건장한 사람들에게 먹이는 것이오. 이렇게 하여 스스로를 지키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으니,어찌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고 하겠소?"

한나라 사자가 말했다.

"흉노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장막(帳幕)에서 살며,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계모를 아내로 삼고,형제가 죽으면 남아있는 형제가 그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소. 관(冠)과 허리띠로 꾸미지도 않고 조정에서도 예의라곤 없소."

중항열이 말했다.

"흉노의 풍속에,사람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젖을 마시며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소.

가축은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철마다 옮겨다니오.

그래서 그들은 싸울 때를 위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고,평상시에는 일이 없는 것을 즐기고 있소.

그들의 약속은 간편하여 실행하기 쉽고,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간단하고 쉬워 한 나라의 정치가 마치 한 몸인 듯하오.

아버지 아들 형 동생이 죽으면 그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은 대(代)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흉노는 비록 어려움을 당해도 한 핏줄의 종족을 세울 수 있는 것이오.

지금 중국에서는 드러내 놓고 자기 아버지나 형의 아내를 차지하지는 않으나,친족관계가 더욱 멀어져 서로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 성씨가 바뀌기도 하는 것은 모두 이런 데서 비롯된 것이오.

또한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예의만을 차리다 보면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원망만 하게 되고,궁실과 가옥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꾸미면 기력을 다 쓰게 되오.

무릇 한나라에서는 밭을 갈고 누에를 쳐서 먹을거리와 입을 것을 구하고 성곽을 쌓아서 스스로 방비하기 때문에,백성들은 급박한 때에 싸워서 공을 이루는 데 서투르며 평상시에는 생업에 지쳐 있소.

슬프구나! 흙집에 사는 사람들이여!

자신을 돌아보고,마음대로 말하지 마시오.

재잘거리며 옷자락을 살랑살랑 움직이고 다니지만,옷과 관이 있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겠소?"

- 사마천 「사기」

<문제1 : 30%,500~600자> [나-1]에서 말한 전망을 고려하여,[다]에서 말한 유교에서 지향하는 인간형이 미래의 우리 사회에 어울리는 인간형으로서 적합한지에 대하여,다른 제시문들을 참고하여 논술하라.

⊙ 논제 분석

현대 사회의 특성을 나타내는 다양한 단어 중 하나인 노마디즘(nomadism)은 흔히 '유목주의'로 해석된다.

굳이 이것을 최초로 사용한 학자가 들뢰즈라는 사실이나,그가 그 단어를 쓴 책이 <차이와 반복>(1968)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는 없다.

사실 노마디즘이라는 단어나 유목주의란 단어를 모르더라도 우리는 그 특성을 현대적 삶의 방식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 단어들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할 때 필요할 뿐이다.

물론 인간의 역사는 유목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유목이 아니라 지리적 특성에 따른 수렵-채집생활이었다.

그러다가 농업혁명을 겪으면서 인간은 정착의 생활을 시작했고,정착의 생활로부터 그에 따른 문화가 등장하였다.

가령 동양사회의 유교적 질서 역시 마찬가지다.

먹고 살기 위해 논농사를 지어야 했던 동양에서는 그에 따라 대규모 치수공사가 매우 핵심적인 작업이 되었다.

농사 기간 동안 일정하게 물을 확보해야 했던 터라 이를 위해 어찌했든 대규모의 인력 운용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야 했던 상황에서 질서체계의 확립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을 시키는 자와 그 명령을 따르는 자의 관계는 당연히 주종관계에 속해있었을 것이다.

그 관계의 확대는 곧 국가와 개인의 관계였으며,먹고 살기 위해 개인들은 전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생산을 위해 많은 인력의 협동이 필요한 농업사회에서는 대가족의 운용이 필수적이었고 그에 따라 질서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을 통해 생산량의 증가와 함께,생산수단에 대한 분배적 불평등의 기원을 따라 계급이 생성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농업사회가 끝나고 토지로부터의 이탈이 시작되는 산업혁명의 시기로부터 생겨난다.

즉 기존의 농업사회의 정체성을 태생적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 속에서 '정체성 결정'의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자식들은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지 못하게 되면서,또한 직업을 갖기 위해 새로운 교육을 선택하게 됨에 따라 세대 간의 분리가 초래되었다.

같은 질서 안에 공존할 수 있었던 세대가 다른 질서 속에서 삶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자아정체성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청소년기가 등장하였으며,생존을 위한 새로운 교육이 중시되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가족 구성원의 직업은 모두 달라지게 되었고,각자가 속한 직업적 환경에 따라 삶의 방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제 정해진 하나의 룰은 사라지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현대 사회는 '선택'의 문제를 중시하게 된다.

현대 사회의 쌍끌이 기제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개인의 합리적 선택을 중시한다는 공통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제 선천적으로 직업과 계급이 결정되던 시대로부터 벗어나 고정되지 않은 가치들을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착된 가치와 질서의 세계로부터 인간은,자유와 그에 따른 선택의 세계로 진화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인간의 모습은 기존의 모습과 달리 적응이 빠르며 항상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창조하게 된다.

기존 질서가 유지하고 있던 안정적인 시스템을 벗어났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안정화시켜야 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여기에 매우 개인적인 사용자 환경을 지닌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도구들이 등장함에 따라 현대의 개인들은 점점 더 파편화된 개인적 삶을 유지하게 된다.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는 이러한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극에 달한 사회적 모습을 대변하는 단어인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자 기존의 가치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시대가 변해가고 있으나 사람들마저 모두 그 속도에 맞게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 표상으로서의 유목주의가 기존의 유교적 전통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물론 위의 설명에 따르면 조화를 이루기 다소 어색한 상황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어디 그렇게 단순하겠는가.

우리 고유의 유교전통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 또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대세를 이루는 문화가 정답인 것은 아니다.

문화 상대주의란 다소 고답적인 주제에 관한 논평들을 기억한다면,새로운 시대의 유목주의 또한 하나의 문화일 뿐이며,기존의 유교전통 역시 하나의 문화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판단되는 것이지 강요되는 것이 아니며,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것을 선택할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의 깊이와 달리,2009년 서강대 수시 2-1 둘째날의 문제는,첫째날에 비해 너무나 손쉬운 문항들이 출제되어 작성의 어려움을 느낀 학생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단순히 비교-평가의 문제들이 주류를 이루어 변별력의 문제가 혹시 문장력의 차이로 변질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던 문제였다.

⊙ 제시문 분석 & 답안작성

제시문 (나-1)은 현대라는 시대적 특성을 정착문화에서 유목문화로 바뀌어가는 과정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제시문 (다)는 대표적인 정착문화인 유교 문화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유교질서는 현실 세계를 위한 질서 체계로서,불변하는 우주적 질서의 특수한 예로서 존재한다.

인간의 행복은 이러한 우주적 질서를 따름으로써 가능한 것이며,그러므로 사회 질서 내의 신분과 상황에 맞게 기품있게 행동하는 예절을 중시하게 되었다.

특히 우주적 질서의 근원인 영혼의 평형과 조화를 위해 정열을 억제하고,자제와 성찰,신중함을 강조하였다.

결국 유교문화는 현세 질서에의 순응을 통해 정해진 법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행복의 길이라고 보게 된다.

이를 통해 어느 정도 인간형을 도출해낼 수 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제시문 (나-1)에서는 특정한 인간형이 도출되지 않는다.

다만 정착문화에서 유목문화로 바뀌어가고 있다고만 전망한다.

그러므로 유목문화의 인간형은 제시문 (라)의 흉노의 특성에서 참고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제시문을 참고하라고 한 핵심 이유가 된다.

물론 학생이 미리 노마디즘이나 유목주의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었다면 다소 달라졌겠지만,여기서는 제시문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진행해보자.

이에 따라서 보면 (라)의 마지막에 유목문화가 갖고 있는 오해에 대한 해명과 더불어 유교문화의 폐단을 지적하는 부분이 답안작성을 위해 매우 요긴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제시문들,(나-2)와 (가)는 차례로 지난 시대가 정착민의 시대였다는 것을 강조하며 새로운 시대의 사명으로서의 유목주의를 드러내며,고정된 가치가 없는 문화상대주의를 강조하게 된다.

잘 알다시피 젊은 세대들은 유교적 질서 문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정해진 형식과 규격에 맞게 행동의 내용과 범위가 결정되어야 하는 고정적 질서에 대해 젊은 세대들은 갑갑함을 느끼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유교 문화란 정착민의 삶을 살았던 농경사회의 대표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는 산업 환경 속에서 고정불변의 규칙 따위가 사람들을 얽매이게 할 수는 없다.

정해진 장소에 정착하지 않고 목적에 따라 떠돌아다니는 노마드(nomad)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일방적으로 유목문화가 옹호될 순 없을 것이다.

무언가 창의적으로 써보고자 하는 학생들의 노력을 생각한다면,주어진 제시문대로 '유교적 인간형은 현대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라고 단언할 것이 아니라,'유교적 인간형도 나름 장점(=유목형 인간의 단점 : 실리적 이익만을 따지는 물질지향형 인간)이 있으므로 부분 수용해야 한다.' 정도의 답안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보인다.

<문제2 : 30%,500~600자> [라]에 나타난 흉노 문화의 특성에 대하여,[가]의 관점에서 논술하라.

제시문 (라)에서는 유교문화가 흉노로 대표되는 유목문화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유교문화가 갖고 있는 허례허식을 지적하며 실리적이며 실용적인 유목문화를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현대사회의 문화상대주의로 본다면,이는 상대방의 상황에 맞게 나름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작업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문제는 첫째 날의 문제에 비해서,혹은 그간의 서강대 문제에 비해서 지나치게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라서 많은 학생들을 의아하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라)의 태도 자체가 이미 소수의 타자문화에 대한 옹호를 하고 있는 터라 큰 반전없이 답안지를 메울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500자를 채우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터라 분량 배분에 더 큰 신경을 썼을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할 뿐이다.

다음호에 계속 ☞

이용준 S · 논술 선임연구원 leroy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