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 그 이상의 무엇이 존재하는가?
⊙ 제시문 분석 및 답안작성
제시문 (가)에는 찬성과 반대가 혼재되어 정리되어 있다.
이를 학생 스스로가 일정한 범주에 맞춰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러한 찬성과 반대를 관통하는 이념적 태도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손쉽게 정리하자면,찬성 측에서는 사회의 기회나 재화가 이미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이를 정의롭게 하기 위하여 차별적인 기회나 분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약자보호 정책을 통해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까지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즉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차별이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반대 측에서는 애초에 이런 제도가 불평등을 없애는 데에 전혀 효과적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백인들에게 역차별을 주어 균등한 기회 제공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일부 흑인들마저도 '능력에 따른 배분'이 아니기 때문에 흑인들의 성취에 대해 마땅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고방식에는,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경쟁을 해야 하지만 이 정책이 그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숨어있다.
제시문 (나)에서는,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동전화 요금감면 대상 확대)을 실기하는 것에 대해,기업체들이 실제로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라는 측면에서 동참하고 있으나,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기업체에 부담을 지우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통해 일방적 혜택을 입지만,반대로 이것은 누군가 일방적 손해를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시문 (다)에서는 사회적 약자보호정책에 대해 주민들의 반대가 점점 커지고 있어,많은 프로그램들이 폐기될 상황에 놓여있다.
소수계와 여성에 대해 특별대우를 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확대된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회적 약자보호 정책에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재화 분배에 있어 평등을 강조하며,반대 측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로 둘 다 타당한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 이미 밝힌 바 있듯,이것은 어느 것에 쉽게 우선권을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각각 길항적인 요소이긴 하지만,둘 다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보호정책을 편다는 이유로 일반사람들이 역차별을 받거나 경제적 손실을 입는 경우,균등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정부가 보조를 해주는 정책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학생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을 펼칠 수 있다.
롤즈의 <정의론>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적용하여 쓰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그것에 의존하여 마치 암기한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좋지 않다.
500~600자라는 분량은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이므로 제시문 분석에 기초하여,100~200자 정도의 간략한 조건만 제시해도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3> [가],[나],[다]의 공통적인 주장을 기술한 다음,[가]의 굵은 글씨 문장에 근거해서 [나]와 [다]의 논의의 차이점을 논술하라. (1000~1200자,40%)
가 우리가 비밀을 가지고,알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예감을 지니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인생을 어떤 비개인적인 신성한 힘으로 가득 채운다.
이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중요한 것을 놓친 셈이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비밀로 가득 찬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는 마음 속으로 예상되는 일뿐만 아니라,그외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예기치 못한 일들과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들이 바로 이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삶은 온전해지는 것이다.
나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략)…
나는 우리에게 사후의 삶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아니요,바라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들을 키워가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원하지도 행하지도 않는데도 그런 종류의 생각들이 내 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만큼은,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생각들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런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내가 어떤 선입견으로 억누르지 않는다면 그 생각들은 진술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선입견은 정신적인 삶이 풍성하게 나타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손상을 입힌다.
내가 더 나은 지식을 통해 정신적인 삶을 교정하기에는 그러한 삶에 대한 인식이 너무도 적다.
요즈음의 비판적 이성은 다른 많은 신화적 관념뿐만 아니라 사후의 삶에 관한 관념도 없애버린 듯하다.
이런 일이 가능해진 이유는 오늘날 인간이 대부분 오로지 그들의 의식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들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만이 전부인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지식이 얼마나 한정되어있는가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 카를 융,「기억,꿈,사상」
나 인간의 삶에는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곧 자신을 초월하고,이웃을 초월하고,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초월하는 무엇이 있다.
우리의 존재가 유래한 과거 속에도 그 무엇이 있고 특히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무엇인가가 더 있다고 느끼고 있는데,그 무엇은 아마도 무한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묶어주는 관계 속에도 우리를 초월하는 그 이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일에 파고들면 들수록 항상 더 깊은 신비를 발견하게 되고,그 안에서 보람과 헌신을 체험할 수 있던 경험을 가지게 된다.
바로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이 인간의 종교에 적어도 하나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 인간은 외적 수준이나 관습적 규범에 피상적으로 따르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의 제한된 안목을 초월하는 실재를 상정하여 왔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인류역사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이러한 초월적 규범에 기준하여 개인 삶과 문화생활을 영위하여 왔던 것이다.
- 윌프레드 켄트웰 스미스,「성사적 상징으로서의 종교」
다 초기 사회과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을 비참한 사회조건 속에 살아야 하는 하층 민중을 무지와 오류 속에 잡아두고 체념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이라고 설명하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정령에 대한 신앙은 원시인들이 꿈에 나타난 환상적 인물들에다 외적 실재를 부여함으로써 생겼다고 하는 초기 인류학자들의 이론이나,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한 칼 마르크스의 이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종교는 머지않아 사라지게 되고 과학에 의해 완전히 대치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신학자들에게 이때처럼 자기방어적인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계몽사상의 인간관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사회과학 자체의 발전에 의하여 드러나기 시작하였고,따라서 종교의 문제를 새로운 빛 안에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프로이드에 의한 무의식의 발견일 것이다.
「꿈의 해석」이라는 그의 위대한 저서에서 프로이드는 최초로 무의식과 그 작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였다.
한 면으로는 무의식 자체를 의식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 연구는 계몽사상의 절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면으로 보면 프로이드는 계몽사상의 무덤을 판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인간의 연약한 의식적 자아 밑에 무의식이라는 막대한 비이성적인 힘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무의식이란 그 성격 자체 때문에 합리적 분석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무의식의 작용을 설명하려 하였으나 결국 그 밑바탕까지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음을 자인하였다.
세상을 합리적인 개념의 체계 안에서만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무의식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지금도 무의식의 세계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무의식의 발견은 정신분석학이 현대사상에 이루어 놓은 가장 중요한 기여임에 틀림없다.
- 로버트 벨라,「종교와 사회과학의 관계」
⊙ 문제 분석
'존재'(being)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우리의 태도를 곰곰이 생각해보자면,우리가 그리 대단치 않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간편하게도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나누고,그 경계에 따라 속하지 않으면 믿기 힘들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그 반대로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존재한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물론 꼭 시각 정보만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후각이나 청각,미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확실한 것은 스스로 감각으로서 경험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좀처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존재는 고로,'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여기서 의문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얕은 과학상식을 몇 가지 동원해 봐도 이 결론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며 느껴지지 않는 것은 과연 존재하지 않는가?
분자,원자,핵과 전자는 어떨까?
어떻게 잘 하면 볼 수도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양성자와 중성자,미립자(소립자)는 어떨까?
거기에 최근에 발견된 뉴트리노(Neutrino · 중성미립자)는 그들보다 훨씬 더 작다.
재밌는 것은 뉴트리노의 특성이다.
뉴트리노는 어떤 물리적 특성도 가지지 않는다.
질량도 전기력도 자기장도 없다.
그래서 뉴트리노는 주변을 지나는 입자의 전기력이나 자기장에 의해 끌어당길 수도 없고 튕겨나가는 반발력도 없다.
그리고 콘크리트나 철판,바위도 그냥 통과하고 만다.
실제로 뉴트리노는 은하계나 우주에서 생성되어 빛의 속도로 여행하고 있다.
하지만,그것은 몇몇 과학자들에 의해 그 존재가 드러났다.
실제로 뉴트리노는 자연계에서 충돌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그 작은 뉴트리노지만 미립자끼리 종종 충돌한다는 것이다.
이걸 물리학자들이 찾아냈다.
누군가는,이런 발견에 대해 지극히 과학적인 발견이니 당연히 정밀한 관찰을 통해 인간에게 경험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느냐고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과학자들이 찾아냈다는 것은 그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럼 이런 예시는 어떨까?
캐나다의 철학교과서에 등장하는 <유물론과 관념론>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이다.
"당신이 자는 중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깼다. 어린 동생의 방에서 나는 소리임을 확인하고 그의 방에 가 보니 동생이 울고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무언가 자꾸 내게 다가와 무서워 잠을 잘 수 없다며 동생은 또 울었다. 당신이 아무리 둘러봐도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마 나쁜 꿈을 꾸어서 그럴 거다. 이제 자면 괜찮을 거라고 설득을 해도 동생은 분명히 무언가 있다. 내가 보았다고 하면서 형이 가면 다시 나타날 것이니 가지 말고 오늘 여기서 같이 자 달라고 사정을 했다."
- 김병수,<사람에게 가는 길>(2008,마음의 숲)에서 발췌
형은 동생을 설득할 수 없다.
이미 동생은 존재를 경험이 아닌 '믿음'의 영역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런 식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이들을 흔히 찾을 수 있다.
과학의 문제이든,종교상의 문제든 마찬가지로 '존재(Being)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지극히 핵심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실체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마냥 포기하고 말 것인가?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생존을 목표로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 삶의 안정성을 추구하며,불확실한 정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 앞을 보지 못하거나(blind),미래를 전망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인간은 온갖 두려움에 의해 불투명한 삶의 장막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실제로는 확인하거나,예측하기 힘든 것에 대해서도 무언가 '답'을 정해놓으려고 한다.
즉,답을 할 수 없는 상황,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확신할 수 없는 존재의 의미'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도 임시적으로나마 답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임시적이라는 표현이 거슬릴지도 모르겠지만,종교를 포함한 모든 예측 시스템은 답을 보여준 적이 없으므로 확실히 임시적이다.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효과적이다.
인간은 그를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고 안정을 얻었기 때문이다.
2009학년도 서강대 수시 2-1 첫날 문제(경영/경제/커뮤니케이션 학부)는 이런 인간의 특성을 바탕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다.
예상 문제의 유형이 아닐 뿐더러,제시문 자체가 매우 낯선 주제의 것이어서 많은 학생들을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했던 문제다.
물론 위에 서술된 내용에 대해 평소 생각을 해 본 학생이라면 충분히 그 핵심을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거짓말처럼 바뀌지 않는 주입식 학교 교육 속에서 이런 내용을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은 학생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물론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 유물론과 관념론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긴 하지만,수능시험 대비 1회용 지식 이상으로 그것을 대한 학생이 얼마나 될까?
⊙ 제시문 분석
세 제시문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알고 시작해야 한다.
모두 공통점이 있으나,(나)와 (다)만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점을 정확한 기준에 맞게 비교-서술하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 채점 포인트가 된다.
제시문 (가)에 따르면,우리에게는 우리들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하며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의 삶은 온전해진다고 한다.
또한 그것은 예상되지 않으며,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찬 세계라고 한다.
나에게는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입견에 의해 억눌러지지만 않는다면 우리들의 정신적인 삶은 풍성해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선입견에 빠져있어서 교정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 선입견이란,합리주의와 교조주의다.
(굵은 글씨 부분) 비판적 이성은 오로지 자신의 지식만을 인정하여,스스로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그런 지식이란 매우 협소한 것에 불과하다.
비판적 이성의 이름으로 우리를 억누르는 선입견으로서의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무비판적 독단론)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나타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지식만으로 해명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하며,그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는 우리의 삶을 오히려 불완전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즉,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며 그것을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시문 (나)는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접근방법 중 하나인 종교적 접근법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은 곧 알 수 없는 세계이며,이것이 종교적 속성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인간은 알 수 없는 세계를 실재로 상정하여 우리들의 삶을 스스로 규정해온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세계(=초월적 세계)가 우리의 삶에 실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제시문 (다)는 제시문 (나)의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시작한다.
하지만,이러한 계몽주의적 인간관은 알 수 없는 세계를 그저 거짓으로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밝힌다.
그 대표적인 예시는 프로이드에 의해 공개된 무의식이다.
프로이드는 알 수 없는 세계인 무의식을 과학적 방법으로 접근한다.
하지만,스스로의 무능력만 증명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계몽사상의 인간관의 중대한 결함이 된다.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신화는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 내용 정리
모든 제시문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한다.
하지만,이에 대한 태도는 (나)와 (다)가 서로 다르다.
슬쩍 훑어보더라도 그 둘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어떤 접근 방법,즉 종교적으로 접근하느냐,혹은 과학적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더군다나 문제의 조건에 따라,(나)와 (다)의 비교기준이 되는 밑줄 친 부분을 바탕으로 판단하자면,(다)의 내용은 굵은 글씨 부분이 비판하는 내용의 직접적인 예시가 된다.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 과학적-계몽적 인간관-합리주의와 교조주의로 접근했기 때문에 스스로 무능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오히려 우리의 삶은 '알 수 없음' 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이를 굵은 글씨 부분의 표현대로 바꿔 표현하자면,인간의 삶이 가진 풍성함을 해친 것이다.
반대로 (나)는 알 수 없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인간의 합리적 경험을 초월한 신비와 보람,헌신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음을 뻔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나)가 가지는 한계와 (다)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학생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나)에 의해 설정된 초월적 규범에 의해 인간의 삶이 더욱 속박당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반대로 (다)는 알 수 없는 세계를 더욱 알 수 없게 되었지만,분명 인간의 주체적인 가능성을 확인한 업적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굵은 글씨 부분을 기준으로 비교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미안하게도 논술 문제는 조건에 맞게 풀 뿐이다.
그런 생각을 했던 학생들의 풍부한 사고능력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이용준 S · 논술 선임연구원 leroy7@hanmail.net
⊙ 제시문 분석 및 답안작성
제시문 (가)에는 찬성과 반대가 혼재되어 정리되어 있다.
이를 학생 스스로가 일정한 범주에 맞춰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러한 찬성과 반대를 관통하는 이념적 태도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손쉽게 정리하자면,찬성 측에서는 사회의 기회나 재화가 이미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이를 정의롭게 하기 위하여 차별적인 기회나 분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약자보호 정책을 통해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까지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즉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차별이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반대 측에서는 애초에 이런 제도가 불평등을 없애는 데에 전혀 효과적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백인들에게 역차별을 주어 균등한 기회 제공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일부 흑인들마저도 '능력에 따른 배분'이 아니기 때문에 흑인들의 성취에 대해 마땅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고방식에는,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경쟁을 해야 하지만 이 정책이 그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숨어있다.
제시문 (나)에서는,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동전화 요금감면 대상 확대)을 실기하는 것에 대해,기업체들이 실제로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라는 측면에서 동참하고 있으나,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기업체에 부담을 지우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통해 일방적 혜택을 입지만,반대로 이것은 누군가 일방적 손해를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시문 (다)에서는 사회적 약자보호정책에 대해 주민들의 반대가 점점 커지고 있어,많은 프로그램들이 폐기될 상황에 놓여있다.
소수계와 여성에 대해 특별대우를 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확대된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회적 약자보호 정책에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재화 분배에 있어 평등을 강조하며,반대 측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로 둘 다 타당한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 이미 밝힌 바 있듯,이것은 어느 것에 쉽게 우선권을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각각 길항적인 요소이긴 하지만,둘 다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보호정책을 편다는 이유로 일반사람들이 역차별을 받거나 경제적 손실을 입는 경우,균등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정부가 보조를 해주는 정책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학생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을 펼칠 수 있다.
롤즈의 <정의론>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적용하여 쓰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그것에 의존하여 마치 암기한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좋지 않다.
500~600자라는 분량은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이므로 제시문 분석에 기초하여,100~200자 정도의 간략한 조건만 제시해도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3> [가],[나],[다]의 공통적인 주장을 기술한 다음,[가]의 굵은 글씨 문장에 근거해서 [나]와 [다]의 논의의 차이점을 논술하라. (1000~1200자,40%)
가 우리가 비밀을 가지고,알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예감을 지니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인생을 어떤 비개인적인 신성한 힘으로 가득 채운다.
이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중요한 것을 놓친 셈이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비밀로 가득 찬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는 마음 속으로 예상되는 일뿐만 아니라,그외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예기치 못한 일들과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들이 바로 이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삶은 온전해지는 것이다.
나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략)…
나는 우리에게 사후의 삶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아니요,바라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들을 키워가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원하지도 행하지도 않는데도 그런 종류의 생각들이 내 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만큼은,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생각들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런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내가 어떤 선입견으로 억누르지 않는다면 그 생각들은 진술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선입견은 정신적인 삶이 풍성하게 나타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손상을 입힌다.
내가 더 나은 지식을 통해 정신적인 삶을 교정하기에는 그러한 삶에 대한 인식이 너무도 적다.
요즈음의 비판적 이성은 다른 많은 신화적 관념뿐만 아니라 사후의 삶에 관한 관념도 없애버린 듯하다.
이런 일이 가능해진 이유는 오늘날 인간이 대부분 오로지 그들의 의식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들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만이 전부인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지식이 얼마나 한정되어있는가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 카를 융,「기억,꿈,사상」
나 인간의 삶에는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곧 자신을 초월하고,이웃을 초월하고,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초월하는 무엇이 있다.
우리의 존재가 유래한 과거 속에도 그 무엇이 있고 특히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무엇인가가 더 있다고 느끼고 있는데,그 무엇은 아마도 무한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묶어주는 관계 속에도 우리를 초월하는 그 이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일에 파고들면 들수록 항상 더 깊은 신비를 발견하게 되고,그 안에서 보람과 헌신을 체험할 수 있던 경험을 가지게 된다.
바로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이 인간의 종교에 적어도 하나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 인간은 외적 수준이나 관습적 규범에 피상적으로 따르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의 제한된 안목을 초월하는 실재를 상정하여 왔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인류역사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이러한 초월적 규범에 기준하여 개인 삶과 문화생활을 영위하여 왔던 것이다.
- 윌프레드 켄트웰 스미스,「성사적 상징으로서의 종교」
다 초기 사회과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을 비참한 사회조건 속에 살아야 하는 하층 민중을 무지와 오류 속에 잡아두고 체념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이라고 설명하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정령에 대한 신앙은 원시인들이 꿈에 나타난 환상적 인물들에다 외적 실재를 부여함으로써 생겼다고 하는 초기 인류학자들의 이론이나,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한 칼 마르크스의 이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종교는 머지않아 사라지게 되고 과학에 의해 완전히 대치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신학자들에게 이때처럼 자기방어적인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계몽사상의 인간관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사회과학 자체의 발전에 의하여 드러나기 시작하였고,따라서 종교의 문제를 새로운 빛 안에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프로이드에 의한 무의식의 발견일 것이다.
「꿈의 해석」이라는 그의 위대한 저서에서 프로이드는 최초로 무의식과 그 작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였다.
한 면으로는 무의식 자체를 의식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 연구는 계몽사상의 절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면으로 보면 프로이드는 계몽사상의 무덤을 판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인간의 연약한 의식적 자아 밑에 무의식이라는 막대한 비이성적인 힘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무의식이란 그 성격 자체 때문에 합리적 분석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무의식의 작용을 설명하려 하였으나 결국 그 밑바탕까지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음을 자인하였다.
세상을 합리적인 개념의 체계 안에서만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무의식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지금도 무의식의 세계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무의식의 발견은 정신분석학이 현대사상에 이루어 놓은 가장 중요한 기여임에 틀림없다.
- 로버트 벨라,「종교와 사회과학의 관계」
⊙ 문제 분석
'존재'(being)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우리의 태도를 곰곰이 생각해보자면,우리가 그리 대단치 않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간편하게도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나누고,그 경계에 따라 속하지 않으면 믿기 힘들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그 반대로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존재한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물론 꼭 시각 정보만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후각이나 청각,미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확실한 것은 스스로 감각으로서 경험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좀처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존재는 고로,'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여기서 의문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얕은 과학상식을 몇 가지 동원해 봐도 이 결론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며 느껴지지 않는 것은 과연 존재하지 않는가?
분자,원자,핵과 전자는 어떨까?
어떻게 잘 하면 볼 수도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양성자와 중성자,미립자(소립자)는 어떨까?
거기에 최근에 발견된 뉴트리노(Neutrino · 중성미립자)는 그들보다 훨씬 더 작다.
재밌는 것은 뉴트리노의 특성이다.
뉴트리노는 어떤 물리적 특성도 가지지 않는다.
질량도 전기력도 자기장도 없다.
그래서 뉴트리노는 주변을 지나는 입자의 전기력이나 자기장에 의해 끌어당길 수도 없고 튕겨나가는 반발력도 없다.
그리고 콘크리트나 철판,바위도 그냥 통과하고 만다.
실제로 뉴트리노는 은하계나 우주에서 생성되어 빛의 속도로 여행하고 있다.
하지만,그것은 몇몇 과학자들에 의해 그 존재가 드러났다.
실제로 뉴트리노는 자연계에서 충돌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그 작은 뉴트리노지만 미립자끼리 종종 충돌한다는 것이다.
이걸 물리학자들이 찾아냈다.
누군가는,이런 발견에 대해 지극히 과학적인 발견이니 당연히 정밀한 관찰을 통해 인간에게 경험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느냐고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과학자들이 찾아냈다는 것은 그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럼 이런 예시는 어떨까?
캐나다의 철학교과서에 등장하는 <유물론과 관념론>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이다.
"당신이 자는 중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깼다. 어린 동생의 방에서 나는 소리임을 확인하고 그의 방에 가 보니 동생이 울고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무언가 자꾸 내게 다가와 무서워 잠을 잘 수 없다며 동생은 또 울었다. 당신이 아무리 둘러봐도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마 나쁜 꿈을 꾸어서 그럴 거다. 이제 자면 괜찮을 거라고 설득을 해도 동생은 분명히 무언가 있다. 내가 보았다고 하면서 형이 가면 다시 나타날 것이니 가지 말고 오늘 여기서 같이 자 달라고 사정을 했다."
- 김병수,<사람에게 가는 길>(2008,마음의 숲)에서 발췌
형은 동생을 설득할 수 없다.
이미 동생은 존재를 경험이 아닌 '믿음'의 영역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런 식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이들을 흔히 찾을 수 있다.
과학의 문제이든,종교상의 문제든 마찬가지로 '존재(Being)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지극히 핵심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실체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마냥 포기하고 말 것인가?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생존을 목표로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 삶의 안정성을 추구하며,불확실한 정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 앞을 보지 못하거나(blind),미래를 전망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인간은 온갖 두려움에 의해 불투명한 삶의 장막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실제로는 확인하거나,예측하기 힘든 것에 대해서도 무언가 '답'을 정해놓으려고 한다.
즉,답을 할 수 없는 상황,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확신할 수 없는 존재의 의미'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도 임시적으로나마 답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임시적이라는 표현이 거슬릴지도 모르겠지만,종교를 포함한 모든 예측 시스템은 답을 보여준 적이 없으므로 확실히 임시적이다.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효과적이다.
인간은 그를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고 안정을 얻었기 때문이다.
2009학년도 서강대 수시 2-1 첫날 문제(경영/경제/커뮤니케이션 학부)는 이런 인간의 특성을 바탕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다.
예상 문제의 유형이 아닐 뿐더러,제시문 자체가 매우 낯선 주제의 것이어서 많은 학생들을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했던 문제다.
물론 위에 서술된 내용에 대해 평소 생각을 해 본 학생이라면 충분히 그 핵심을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거짓말처럼 바뀌지 않는 주입식 학교 교육 속에서 이런 내용을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은 학생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물론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 유물론과 관념론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긴 하지만,수능시험 대비 1회용 지식 이상으로 그것을 대한 학생이 얼마나 될까?
⊙ 제시문 분석
세 제시문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알고 시작해야 한다.
모두 공통점이 있으나,(나)와 (다)만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점을 정확한 기준에 맞게 비교-서술하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 채점 포인트가 된다.
제시문 (가)에 따르면,우리에게는 우리들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하며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의 삶은 온전해진다고 한다.
또한 그것은 예상되지 않으며,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찬 세계라고 한다.
나에게는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입견에 의해 억눌러지지만 않는다면 우리들의 정신적인 삶은 풍성해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선입견에 빠져있어서 교정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 선입견이란,합리주의와 교조주의다.
(굵은 글씨 부분) 비판적 이성은 오로지 자신의 지식만을 인정하여,스스로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그런 지식이란 매우 협소한 것에 불과하다.
비판적 이성의 이름으로 우리를 억누르는 선입견으로서의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무비판적 독단론)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나타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지식만으로 해명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하며,그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는 우리의 삶을 오히려 불완전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즉,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며 그것을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시문 (나)는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접근방법 중 하나인 종교적 접근법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은 곧 알 수 없는 세계이며,이것이 종교적 속성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인간은 알 수 없는 세계를 실재로 상정하여 우리들의 삶을 스스로 규정해온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세계(=초월적 세계)가 우리의 삶에 실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제시문 (다)는 제시문 (나)의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시작한다.
하지만,이러한 계몽주의적 인간관은 알 수 없는 세계를 그저 거짓으로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밝힌다.
그 대표적인 예시는 프로이드에 의해 공개된 무의식이다.
프로이드는 알 수 없는 세계인 무의식을 과학적 방법으로 접근한다.
하지만,스스로의 무능력만 증명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계몽사상의 인간관의 중대한 결함이 된다.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신화는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 내용 정리
모든 제시문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한다.
하지만,이에 대한 태도는 (나)와 (다)가 서로 다르다.
슬쩍 훑어보더라도 그 둘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어떤 접근 방법,즉 종교적으로 접근하느냐,혹은 과학적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더군다나 문제의 조건에 따라,(나)와 (다)의 비교기준이 되는 밑줄 친 부분을 바탕으로 판단하자면,(다)의 내용은 굵은 글씨 부분이 비판하는 내용의 직접적인 예시가 된다.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 과학적-계몽적 인간관-합리주의와 교조주의로 접근했기 때문에 스스로 무능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오히려 우리의 삶은 '알 수 없음' 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이를 굵은 글씨 부분의 표현대로 바꿔 표현하자면,인간의 삶이 가진 풍성함을 해친 것이다.
반대로 (나)는 알 수 없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인간의 합리적 경험을 초월한 신비와 보람,헌신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음을 뻔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나)가 가지는 한계와 (다)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학생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나)에 의해 설정된 초월적 규범에 의해 인간의 삶이 더욱 속박당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반대로 (다)는 알 수 없는 세계를 더욱 알 수 없게 되었지만,분명 인간의 주체적인 가능성을 확인한 업적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굵은 글씨 부분을 기준으로 비교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미안하게도 논술 문제는 조건에 맞게 풀 뿐이다.
그런 생각을 했던 학생들의 풍부한 사고능력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이용준 S · 논술 선임연구원 leroy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