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은 삶, ‘길’ 위에서 연대를 모색하다
⊙ 길 위의 삶
영화 장르 중에 흔히 '로드 무비'라고 일컬어지는 양식이 있다.
단순히 생각하면 '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거니 생각할 수 있지만,그것이 장르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서사적인 패턴이 유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드 무비는 단순히 '길'을 소재로 택한 것만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 인간 관계의 계기를 마련하거나 진정한 자아 정체성을 정립하게 되는 과정을 제시하는 영화'를 일컫는 것이다.
로드 무비의 가장 큰 매력은 여행 중 일어나는 예측 불허의 사건과 그 사건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주인공을 통해 관객 스스로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길'은 단순한 배경의 의미만이 아니라 자아 정체성을 탐색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문화예술의 영역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소설에서도 '길'을 모티프로 한 작품은 많다.
근대문학 초기 염상섭의 「만세전」이라든지,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작품들은 모두 '길'이나 '여행'을 모티프로 창작되었던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에서 '길'은 단순히 배경적 차원을 넘어 '식민지 지식인의 자아탐색' '잊혀진 혈육의 확인'과 같은 진지한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1970년대 대표적인 여로형 소설로는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의 진행 속에서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길 위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이들의 모습을 탁월하게 형상화해 놓은 작품이다.
갑작스러운 산업화는 농촌 공동체의 유대를 깨뜨렸고 이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들은 어쩔 수 없이 '길 위'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길'은 부표처럼 떠도는 삶을 표상한다.
⊙ 산업화가 남긴 상처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는 '영달'은 넉 달 동안 머물던 공사판의 공사가 중단되자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쳐 나온다.
그는 우연히 길 위에서 '정씨'를 만나 동행하게 되는데, 정씨는 교도소에서 목공,용접 등을 익혀 출옥 후에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던 노동자였다.
정씨는 영달과 달리 정착을 위해서 자기 고향인 '삼포'로 가는 길이다.
그들은 '찬샘'이라는 마을에서 '백화'라는 술집 작부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주인으로부터 그녀를 잡아오면 1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들은 감천으로 가는 길에 눈밭에서 오줌을 누는 도망친 술집 작부 백화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이제 스물 두 살이지만 열 여덟에 가출해서 이곳저곳 떠돌았던 탓에 삼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작부였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모두 정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1970년대 급속한 산업화는 분명 현재의 고도 산업사회를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거대 산업자본이 형성되기까지에는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부의 저임금,저곡가 정책으로 인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희생이다.
농사 짓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노동하며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날품 노동자들이 증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달과 정씨는 바로 이러한 인물들을 표상하는 전형이며,백화 역시 삶의 터전을 잃었기 때문에 술집 작부로 전락해 버린 인물로 보아야 한다.
정착하려 해도 정착할 수 없는 인물들이 '길 위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영달과 정씨는 백화와도 동행하기에 이른다.
어차피 모두 뜨내기 신세이기에 쉽사리 연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눈이 쌓인 산골길을 함께 가다가 길가의 폐가에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인다.
이때 백화는 영달에게 호감을 느껴 이를 표현하지만 영달은 무뚝뚝하게 응대한다.
영달도 속으로는 백화가 싫지 않았지만 여자와 정착해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셋은 다시 눈길에 나서게 되고 그러던 중에 백화가 발을 다쳐 걷지 못하게 되자 영달이 백화를 업는다.
산업화 속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하던 세 인물이 서로에 대한 배려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작품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길의 끝 위에 서다
아래 인용문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다시 말하면 함께했던 '길'이 비로소 끝나게 되는 장면인 것이다.
세 인물에게 길의 끝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어느 방향이오?"
"전라선이예요."
"나는 호남선 쪽인데. 여비는 있소?"
"군용차를 사정해서 타구 가면 돼요."
그들은 장터 모퉁이에서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팥시루떡을 사 먹었다.
백화가 자기 몫에서 절반을 떼어 영달에게 내밀었다. (중략)
영달이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백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저 여잘 보냅시다."
영달이는 표를 사고 삼립빵 두 개와 찐 달걀을 샀다.
백화에게 그는 말했다.
"우린 뒷차를 탈 텐데… 잘 가슈."
영달이가 내민 것들을 받아 쥔 백화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중략)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 웃고 있었다.
"내 이름 백화가 아니예요. 본명은요…… 이점례예요."
여자는 개찰구로 뛰어나갔다. (중략)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영달이가 말했다.
"잘됐군.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황석영 「삼포 가는 길」
셋은 감천역에 이르러 비로소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헤어짐의 순간에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강한 연대의식을 표현한다.
생략되기는 했지만 백화는 영달과 정씨에게 자기 고향으로 함께 갈 것을 권유한다.
자신이 일자리를 주선하겠으니 함께 가자는 것이다.
자기가 먹던 팥시루떡을 영달에게 권하는 것도 함께하고자 하는 애틋한 정서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또한 마지막에 자기 이름이 '점례'라고 밝히는 것도 그녀가 수많은 남정네를 상대했지만 진실을 잃지 않았음을 전하고 있다.
영달 역시 백화를 걱정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가 지닌 전부를 털어 차표와 빵을 사서 백화에게 건넨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끈끈하게 연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인간미를 잃지 않는 민중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불행하게도 마지막 장면에서 '길의 끝'은 '삼포'가 아니었다.
정씨가 그리워했던 삼포는 나룻배로 고기잡이나 하고 감자나 매는 정감 있는 곳이었지만 풍문으로 들려오는 삼포는 그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사판이 벌어져 영달과 같은 날품 노동자들이 몰려드는 곳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 끝나지 않은 길 위의 삶
1970년대 산업화는 농민이나 노동자와 같은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사회 구성원 전체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들은 '길 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삼포'라는 마음의 고향을 찾아 '길 위'에 서게 됐지만,그들에게 '길'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는 세계화로 표상되는 급변하는 경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농촌 경제에서 산업화로 나아가던 시기 못지않게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변화 속에서 또다시 '길 위'에 서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길 위'에 선 자들에게 최소한의 위로와 안식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길 위'에 서 있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하듯이 말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 길 위의 삶
영화 장르 중에 흔히 '로드 무비'라고 일컬어지는 양식이 있다.
단순히 생각하면 '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거니 생각할 수 있지만,그것이 장르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서사적인 패턴이 유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드 무비는 단순히 '길'을 소재로 택한 것만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 인간 관계의 계기를 마련하거나 진정한 자아 정체성을 정립하게 되는 과정을 제시하는 영화'를 일컫는 것이다.
로드 무비의 가장 큰 매력은 여행 중 일어나는 예측 불허의 사건과 그 사건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주인공을 통해 관객 스스로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길'은 단순한 배경의 의미만이 아니라 자아 정체성을 탐색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문화예술의 영역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소설에서도 '길'을 모티프로 한 작품은 많다.
근대문학 초기 염상섭의 「만세전」이라든지,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작품들은 모두 '길'이나 '여행'을 모티프로 창작되었던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에서 '길'은 단순히 배경적 차원을 넘어 '식민지 지식인의 자아탐색' '잊혀진 혈육의 확인'과 같은 진지한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1970년대 대표적인 여로형 소설로는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의 진행 속에서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길 위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이들의 모습을 탁월하게 형상화해 놓은 작품이다.
갑작스러운 산업화는 농촌 공동체의 유대를 깨뜨렸고 이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들은 어쩔 수 없이 '길 위'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길'은 부표처럼 떠도는 삶을 표상한다.
⊙ 산업화가 남긴 상처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는 '영달'은 넉 달 동안 머물던 공사판의 공사가 중단되자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쳐 나온다.
그는 우연히 길 위에서 '정씨'를 만나 동행하게 되는데, 정씨는 교도소에서 목공,용접 등을 익혀 출옥 후에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던 노동자였다.
정씨는 영달과 달리 정착을 위해서 자기 고향인 '삼포'로 가는 길이다.
그들은 '찬샘'이라는 마을에서 '백화'라는 술집 작부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주인으로부터 그녀를 잡아오면 1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들은 감천으로 가는 길에 눈밭에서 오줌을 누는 도망친 술집 작부 백화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이제 스물 두 살이지만 열 여덟에 가출해서 이곳저곳 떠돌았던 탓에 삼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작부였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모두 정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1970년대 급속한 산업화는 분명 현재의 고도 산업사회를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거대 산업자본이 형성되기까지에는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부의 저임금,저곡가 정책으로 인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희생이다.
농사 짓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노동하며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날품 노동자들이 증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달과 정씨는 바로 이러한 인물들을 표상하는 전형이며,백화 역시 삶의 터전을 잃었기 때문에 술집 작부로 전락해 버린 인물로 보아야 한다.
정착하려 해도 정착할 수 없는 인물들이 '길 위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영달과 정씨는 백화와도 동행하기에 이른다.
어차피 모두 뜨내기 신세이기에 쉽사리 연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눈이 쌓인 산골길을 함께 가다가 길가의 폐가에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인다.
이때 백화는 영달에게 호감을 느껴 이를 표현하지만 영달은 무뚝뚝하게 응대한다.
영달도 속으로는 백화가 싫지 않았지만 여자와 정착해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셋은 다시 눈길에 나서게 되고 그러던 중에 백화가 발을 다쳐 걷지 못하게 되자 영달이 백화를 업는다.
산업화 속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하던 세 인물이 서로에 대한 배려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작품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길의 끝 위에 서다
아래 인용문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다시 말하면 함께했던 '길'이 비로소 끝나게 되는 장면인 것이다.
세 인물에게 길의 끝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어느 방향이오?"
"전라선이예요."
"나는 호남선 쪽인데. 여비는 있소?"
"군용차를 사정해서 타구 가면 돼요."
그들은 장터 모퉁이에서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팥시루떡을 사 먹었다.
백화가 자기 몫에서 절반을 떼어 영달에게 내밀었다. (중략)
영달이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백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저 여잘 보냅시다."
영달이는 표를 사고 삼립빵 두 개와 찐 달걀을 샀다.
백화에게 그는 말했다.
"우린 뒷차를 탈 텐데… 잘 가슈."
영달이가 내민 것들을 받아 쥔 백화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중략)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 웃고 있었다.
"내 이름 백화가 아니예요. 본명은요…… 이점례예요."
여자는 개찰구로 뛰어나갔다. (중략)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영달이가 말했다.
"잘됐군.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황석영 「삼포 가는 길」
셋은 감천역에 이르러 비로소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헤어짐의 순간에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강한 연대의식을 표현한다.
생략되기는 했지만 백화는 영달과 정씨에게 자기 고향으로 함께 갈 것을 권유한다.
자신이 일자리를 주선하겠으니 함께 가자는 것이다.
자기가 먹던 팥시루떡을 영달에게 권하는 것도 함께하고자 하는 애틋한 정서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또한 마지막에 자기 이름이 '점례'라고 밝히는 것도 그녀가 수많은 남정네를 상대했지만 진실을 잃지 않았음을 전하고 있다.
영달 역시 백화를 걱정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가 지닌 전부를 털어 차표와 빵을 사서 백화에게 건넨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끈끈하게 연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인간미를 잃지 않는 민중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불행하게도 마지막 장면에서 '길의 끝'은 '삼포'가 아니었다.
정씨가 그리워했던 삼포는 나룻배로 고기잡이나 하고 감자나 매는 정감 있는 곳이었지만 풍문으로 들려오는 삼포는 그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사판이 벌어져 영달과 같은 날품 노동자들이 몰려드는 곳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 끝나지 않은 길 위의 삶
1970년대 산업화는 농민이나 노동자와 같은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사회 구성원 전체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들은 '길 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삼포'라는 마음의 고향을 찾아 '길 위'에 서게 됐지만,그들에게 '길'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는 세계화로 표상되는 급변하는 경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농촌 경제에서 산업화로 나아가던 시기 못지않게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변화 속에서 또다시 '길 위'에 서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길 위'에 선 자들에게 최소한의 위로와 안식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길 위'에 서 있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하듯이 말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