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은 살아움직이는 ‘무엇’…내 생각에 자유를 줘라
자신의 본분으로 돌아가라.
이 말이 어찌 문장에만 해당되는 것이리오.
일체의 가지가지 만사가 그렇지요.
서화담(徐花潭) 선생이 출타했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울고 서 있는 사람을 만났더랍니다.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 나절에 밖으로 나왔다가 홀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어슷비슷 같아 저희 집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선생은,"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 것이다." 라고 일러주었답니다.
그래서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은 걸음걸이로 걸어서 곧장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더랍니다.
(박지원,<답창애(答蒼厓) 지이(之二)> 부분)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집을 찾아갈 것이다. '
연암 박지원은 글쓰기를 결코 직설적으로 실행하지 않는다.
공중제비 넘듯 훌쩍 경계를 뛰어 넘는다.
전쟁으로 비유한다면 이른바 유격 전술이다.
드러난 문장을 뒤집어 보고 한번 뒤집은 문장을 다시 메다꽂을 때 "아하!"하며 무릎을 치는 전언을 볼 수 있다.
눈을 뜬 소경은 자신 앞에 펼쳐진 처음 만나는 현상들 앞에서 다시 소경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태껏 안다고 믿었던 인식의 세계는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는 헛것이 되고 말았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던 지금까지의 소망이 물거품이 되고 다시 알 수 없는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신기하지 않는가?
눈을 뜨니 모든 걸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상황.
볼 수 있는 능력이 오히려 볼 수 없게 만들어버린 역설.
'눈을 도로 감으라,그러면 너의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설적 표현을 통해 박지원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
눈으로 확인하는 현실이라는 것이 사실은 허위와 왜곡으로 가득 차 있어 정작 눈(으로 인식하는 현상)에 의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던 것(집으로 가는 길)조차 제대로 알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현상과 그 현상의 표피만 보고 평가하는 우리의 눈이 도리어 올바른 현실인식에 방해가 된다고 본 것이다.
즉,누구나 진실이라고 여기는 현실이 사실은 진실이 아닌 허위일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안목이 필요한 때에 여전히 반상(班常)의 신분논리와 우물 안 개구리처럼 고루한 탁상공론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당시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인 것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만드는 부정적 현실을 코웃음 치며 차라리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길을 찾을 때 바른 길이 보인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얼마나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까마귀가 검다고 인식한다.
학이 외다리로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위태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까마귀는 각도와 빛에 따라 같은 검은 색일지라도 수시로 색깔이 변한다.
학의 모습이 위태로운 것은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그럴 뿐 학 자체의 위험은 아니다.
무엇이 진리인가?
절대적 인식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진리는 가변적이다.
진리 자체는 순간에 따라 충분히 변할 소지를 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리 그것을 결정짓는다.
눈으로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느끼며 눈을 비우고 또한 고정관념을 비우고 더 깊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진정한 인식의 장이 열릴 것인 바,차라리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 사물을 옳게 볼 수 있는 진정한 평등의 눈을 가졌다는 역설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조차 뒤집어 볼 수는 없을까?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도 또한 부분적 진실에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조차도 허상이라는 진정한 깨달음이 우리들에게 바라는 연암의 궁극적인 바람이 아닐까?
다시 소경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분명 소경은 눈을 감고 자신의 집을 찾아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눈을 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만약 소경이 다시 눈을 감고 돌아갔다면 집에는 도착했을지 몰라도 새롭게 펼쳐진 또 다른 세상은 못 보게 될 것이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라도 하늘과 땅,새와 나무,꽃과 그늘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행복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어쩌면 늘 보았지만 새롭게 보이는 것들,늘 보아 왔어도 잘못 보아온 것들,이 모든 것들을 다시 다르게 본다는 것 자체가 유의미한 것이 아닌가.
하나의 현상이 지니는 수없이 많은 다양한 얼굴을 바라보는 그 자체가 기쁨 아니겠는가.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날마다 다른 색깔로 빛나고 날마다 다르게 팔랑거린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처럼.
어느 신문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 1억의 돈을 준다는 광고가 실렸다.
비행기,로켓,KTX,순간이동¡@ 별의별 내용의 답변이 올라왔다.
그런데 결국 1등으로 뽑힌 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
'가장 빨리'라는 언어가 지니는 물리적인 속도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속에서만 사고가 머문다.
그들은 사고의 소경이다.
그럼으로 인해 '순간이동'이라는 상상력이 가미된 답변도 나왔다.
하지만 '가장 빨리'가 지닌 고정된 사고를 넘어서는 순간 새로운 사고의 세계가 열린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을 감성적인 시간으로 치환한 답변이다.
물론 그 대답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제공한다.
한 걸음 더 다가가면 더 많은 마음들을 만난다.
이 답변은 사랑이 지닌 본질을 드러낸다.
추운 겨울 날,고슴도치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너무나 추워서 추위를 견디고자 서로 껴안았지만 서로의 가시 때문에 매우 심한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몸을 떼자니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다.
가시와 추위의 아픔이라는 두 가지 고통을 차례로 되풀이한 끝에 결국 서로를 찌르지 않으면서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알맞은 거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처럼 너무 가까이하기도,그렇다고 멀리하기도 어려운 상태를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한다.
이 딜레마는 대인 관계에 대한 인간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유지하는 경우가 있는데 너무 가까이하면 그것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너무 떨어지면 외롭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상처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사랑은 행복을 만들기도 한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많이 상처를 입고 입히기도 하지만 사랑함으로 인한 상처라면 그것만으로도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할 수도,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의 여부에 관계없이 그 사람들도 이미 그 이전에 어떤 형태이든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나?
그리고 사랑하던 그때,다소의 아픔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행복하지 않았나?
결국 행복과 관련된 그 모든 선택은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서로에게 주어지는 상처조차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며 진실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삶도 존재하지 않는가?
이야기가 너무 멀리 나간 느낌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그것은 논술은 내가 세상과 나누는 대화라는 것이다.
세상과 나누는 대화는 고정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무엇이다.
정해진 목적지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논술은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나의 생각을 쓴 글이다.
그 속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보편성을 찾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도 되지만 나만의 특수성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한다.
눈을 감지 말고 현상의 다양한 부분을 두 눈 크게 뜨고 주목하라.
눈을 감으면 결국 영원히 세상의 본질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거기에조차 얽매이는 것도 잘못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눈을 감아야할 때 떠서 보기도 하고,떠야할 때 감아서 느낄 수도 있어야 한다.
내 생각의 자유를 주라.
나아가 그 나만의 사고 영역에는 대단히 감성적인 부분도 존재한다는 걸 생각하라.
논술은 단순히 딱딱한 언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날 때 나와 세상이 나누는 대화의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
대구 경명여고 교사 tgnonsul@naver.com
자신의 본분으로 돌아가라.
이 말이 어찌 문장에만 해당되는 것이리오.
일체의 가지가지 만사가 그렇지요.
서화담(徐花潭) 선생이 출타했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울고 서 있는 사람을 만났더랍니다.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 나절에 밖으로 나왔다가 홀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어슷비슷 같아 저희 집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선생은,"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 것이다." 라고 일러주었답니다.
그래서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은 걸음걸이로 걸어서 곧장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더랍니다.
(박지원,<답창애(答蒼厓) 지이(之二)> 부분)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집을 찾아갈 것이다. '
연암 박지원은 글쓰기를 결코 직설적으로 실행하지 않는다.
공중제비 넘듯 훌쩍 경계를 뛰어 넘는다.
전쟁으로 비유한다면 이른바 유격 전술이다.
드러난 문장을 뒤집어 보고 한번 뒤집은 문장을 다시 메다꽂을 때 "아하!"하며 무릎을 치는 전언을 볼 수 있다.
눈을 뜬 소경은 자신 앞에 펼쳐진 처음 만나는 현상들 앞에서 다시 소경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태껏 안다고 믿었던 인식의 세계는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는 헛것이 되고 말았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던 지금까지의 소망이 물거품이 되고 다시 알 수 없는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신기하지 않는가?
눈을 뜨니 모든 걸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상황.
볼 수 있는 능력이 오히려 볼 수 없게 만들어버린 역설.
'눈을 도로 감으라,그러면 너의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설적 표현을 통해 박지원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
눈으로 확인하는 현실이라는 것이 사실은 허위와 왜곡으로 가득 차 있어 정작 눈(으로 인식하는 현상)에 의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던 것(집으로 가는 길)조차 제대로 알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현상과 그 현상의 표피만 보고 평가하는 우리의 눈이 도리어 올바른 현실인식에 방해가 된다고 본 것이다.
즉,누구나 진실이라고 여기는 현실이 사실은 진실이 아닌 허위일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안목이 필요한 때에 여전히 반상(班常)의 신분논리와 우물 안 개구리처럼 고루한 탁상공론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당시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인 것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만드는 부정적 현실을 코웃음 치며 차라리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길을 찾을 때 바른 길이 보인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얼마나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까마귀가 검다고 인식한다.
학이 외다리로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위태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까마귀는 각도와 빛에 따라 같은 검은 색일지라도 수시로 색깔이 변한다.
학의 모습이 위태로운 것은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그럴 뿐 학 자체의 위험은 아니다.
무엇이 진리인가?
절대적 인식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진리는 가변적이다.
진리 자체는 순간에 따라 충분히 변할 소지를 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리 그것을 결정짓는다.
눈으로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느끼며 눈을 비우고 또한 고정관념을 비우고 더 깊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진정한 인식의 장이 열릴 것인 바,차라리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 사물을 옳게 볼 수 있는 진정한 평등의 눈을 가졌다는 역설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조차 뒤집어 볼 수는 없을까?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도 또한 부분적 진실에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조차도 허상이라는 진정한 깨달음이 우리들에게 바라는 연암의 궁극적인 바람이 아닐까?
다시 소경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분명 소경은 눈을 감고 자신의 집을 찾아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눈을 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만약 소경이 다시 눈을 감고 돌아갔다면 집에는 도착했을지 몰라도 새롭게 펼쳐진 또 다른 세상은 못 보게 될 것이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라도 하늘과 땅,새와 나무,꽃과 그늘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행복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어쩌면 늘 보았지만 새롭게 보이는 것들,늘 보아 왔어도 잘못 보아온 것들,이 모든 것들을 다시 다르게 본다는 것 자체가 유의미한 것이 아닌가.
하나의 현상이 지니는 수없이 많은 다양한 얼굴을 바라보는 그 자체가 기쁨 아니겠는가.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날마다 다른 색깔로 빛나고 날마다 다르게 팔랑거린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처럼.
어느 신문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 1억의 돈을 준다는 광고가 실렸다.
비행기,로켓,KTX,순간이동¡@ 별의별 내용의 답변이 올라왔다.
그런데 결국 1등으로 뽑힌 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
'가장 빨리'라는 언어가 지니는 물리적인 속도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속에서만 사고가 머문다.
그들은 사고의 소경이다.
그럼으로 인해 '순간이동'이라는 상상력이 가미된 답변도 나왔다.
하지만 '가장 빨리'가 지닌 고정된 사고를 넘어서는 순간 새로운 사고의 세계가 열린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을 감성적인 시간으로 치환한 답변이다.
물론 그 대답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제공한다.
한 걸음 더 다가가면 더 많은 마음들을 만난다.
이 답변은 사랑이 지닌 본질을 드러낸다.
추운 겨울 날,고슴도치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너무나 추워서 추위를 견디고자 서로 껴안았지만 서로의 가시 때문에 매우 심한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몸을 떼자니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다.
가시와 추위의 아픔이라는 두 가지 고통을 차례로 되풀이한 끝에 결국 서로를 찌르지 않으면서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알맞은 거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처럼 너무 가까이하기도,그렇다고 멀리하기도 어려운 상태를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한다.
이 딜레마는 대인 관계에 대한 인간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유지하는 경우가 있는데 너무 가까이하면 그것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너무 떨어지면 외롭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상처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사랑은 행복을 만들기도 한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많이 상처를 입고 입히기도 하지만 사랑함으로 인한 상처라면 그것만으로도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할 수도,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의 여부에 관계없이 그 사람들도 이미 그 이전에 어떤 형태이든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나?
그리고 사랑하던 그때,다소의 아픔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행복하지 않았나?
결국 행복과 관련된 그 모든 선택은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서로에게 주어지는 상처조차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며 진실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삶도 존재하지 않는가?
이야기가 너무 멀리 나간 느낌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그것은 논술은 내가 세상과 나누는 대화라는 것이다.
세상과 나누는 대화는 고정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무엇이다.
정해진 목적지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논술은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나의 생각을 쓴 글이다.
그 속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보편성을 찾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도 되지만 나만의 특수성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한다.
눈을 감지 말고 현상의 다양한 부분을 두 눈 크게 뜨고 주목하라.
눈을 감으면 결국 영원히 세상의 본질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거기에조차 얽매이는 것도 잘못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눈을 감아야할 때 떠서 보기도 하고,떠야할 때 감아서 느낄 수도 있어야 한다.
내 생각의 자유를 주라.
나아가 그 나만의 사고 영역에는 대단히 감성적인 부분도 존재한다는 걸 생각하라.
논술은 단순히 딱딱한 언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날 때 나와 세상이 나누는 대화의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
대구 경명여고 교사 tgnonsu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