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욕망의 그늘속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다

⊙ 근대화와 환경위기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14. 황순원「어둠속에 찍힌 판화」
오늘날 환경위기는 인간 삶의 생존마저 위협할 만큼 그 정도가 심각해졌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근엄한 자태를 자랑하던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있고,그린란드를 뒤덮었던 얼음마저도 그 자취를 잃어가고 있다.

해수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몇 해 전 재즈의 본고장 뉴올리언즈를 초토화시킨 카트리나 같은 대형 태풍이 세계의 수많은 도시를 위협하고 있고,생태계는 교란되어 우리나라 동해에서 겨울철 별미로 잡혔던 도룩묵이나 양미리 같은 어종들은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고 한다.

노무라입깃 해파리나 사막의 메뚜기처럼 다른 생물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개체군이 무섭게 늘어가는 것도 문제이다.

이러한 총체적 환경변화는 결국 인간 삶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이러한 변화는 성찰과 반성 없이 진행된 근대화와 산업화가 가져온 부산물이다.

자본주의적인 대량생산은 자원을 무분별하게 활용하면서 온실가스를 비롯한 각종 유해물질을 쏟아냈고 이는 환경을 오염시키는 결정적 주범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정신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근대화'는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여 주체 중심의 세계를 형성하게 만들었던 근대 철학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은 세계의 중심에 인간 주체를 위치시키고,자연을 비롯한 그 이외의 것들을 타자화시키는 것이 그 본질이었다.

근대 이전에 자연은 신비롭고,경이롭고,범점할 수 없는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근대세계에서의 자연은 설명과 예측이 가능한,그리하여 인간 삶을 위한 도구와 수단의 의미만 지닌 물화된 대상으로 변모하고 만다.

자연에 속한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적 원료가 되었고 인간을 제외한 뭇 생명의 가치는 무시되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근대문명이 채 500년도 되기 전에 인간은 전에 없이 위협적으로 변모한 '자연'이 결국 설명 불가능하고,예측할 수 없는 영역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중세의 주술과 마법으로부터 벗어나 과학적 도구로 자연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자만은 생각보다 일찍 무너져 버렸고,자연은 근대 이전의 두려움과 공포,경외의 대상으로 다시 인간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황순원의 「어둠 속에 찍힌 판화」는 이러한 현실 앞에 인간이 자연과 뭇 생명들에게 어떠한 태도와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 인간의 욕망과 생명의 존엄성 사이

1951년 <신천지>에 발표된 「어둠 속에 찍힌 판화」는 「목넘이 마을의 개」와 더불어 인간의 욕망과 생명의 존엄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관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작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떠돌이 개,흰둥이를 잡아먹으려는 마을사람들과 흰둥이가 새끼를 밴 것을 알아차리고 흰둥이의 살 길을 열어주는 간난이 할아버지 사이의 대립구조가 이 작품에서도 반복,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어둠 속에 찍힌 판화」는 서술자인 '나'가 대구의 피난지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던 전직 사냥꾼의 경험담이 주를 이룬다.

눈치챘겠지만 '사냥꾼'이란 존재는 인간이 아닌 뭇 생명과 대결점에 놓여 있는 가장 극단적인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흰둥이를 잡아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작은동장,큰동장'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전직이 사냥꾼이었던 사내는 대구에서 꽤 이름이 났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아내의 유산으로 그는 자신의 천직을 그만 포기하고 만다.

사냥꾼 부부의 사정은 이렇다.

6년 전,결혼 십여 년만에 아이를 가진 사냥꾼 부부는 태중 아이에게 좋다는 노루나 사슴 피를 먹기 위해 함께 사냥에 나선다.

아내는 거리낌이 없진 않았지만 아이에게 좋다는 이야기에 노루의 피를 마시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노루는 새끼를 배고 있었던 것이었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아내는 갑자기 구역질을 하며 피를 토하게 된다.

그날 밤 아내는 애틋한 노루의 울음소리를 듣고 두려움에 떨며 남편을 깨운다.

남편은 낮에 잡은 노루의 수놈이라 판단하고 총을 들고 나서고,아내는 남편을 만류하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결국 여섯 달 된 아이를 유산하고 만다.

이후로 임신을 해도 5,6개월 만에 유산을 하는 일이 반복되자 아내는 남편의 사냥을 말리다가 끝내는 사냥 도구 일체를 어디론가 없애 버린다.

결국 사내도 자신의 의지를 꺾고 아내의 뜻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소설의 사실적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작품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문학적 상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노루를 사냥하고 그 피를 마신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극단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근대적 현실을 비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아내의 이유 없는 유산은 훼손된 자연이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시 출현한 현재의 환경위기와 연결될 수 있다.

작가가 작품을 창작할 때 이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겠지만 작품은 지금의 환경위기와 관련지어 독해할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 지배의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아내의 유산 이후로 사냥꾼은 자신이 천직이라고 믿어왔던 사냥을 포기한다.

그렇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아래 인용된 부분을 감상하며 논의를 진척시켜 보자.

그것은 어른의 손바닥만한 네모진 남색 상자였다.

주인 사내는 그 뚜껑을 열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갸름한 여러 가지 모양의 반들반들 윤기가 도는 쇳조각이 정연하게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얼핏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이게 사냥 총알임니더. 울매나 이쁨니꺼."

사실 그것은 이뻤다.

주인 사내는 고개를 뒤로 물리며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대견한 듯이 바라보더니,

"우리 집사람이 다른 것은 모두 없애 비릿지만 이것 하나만은 내게서 몬 빼앗았지요. 내가 지 모르게 여기저기 옮기 가믄서 감차 두거등요. 그랬다가 이렇게 몰래 꺼내 보지요. 지는 지대로 저눔아가 있으니 그만이고,나는 또 이것이라도 꺼내 보는 재미에. 이거나마 없으믄 우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겄소." (중략)

"미안합니더마는 내 나간 틈에 우리 바깥양반이 무얼 비지 않든가예? 자기는 백제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있구마는 나는 다 알고 있지예. 전에 그 방에 들었든 분한테도 그것을 꺼내 빈걸 내 다 알고 있어예. 내 어디다 그걸 감차났는지도 다 알지만 눈감아 주고 있지예. 그것 하나에다 맘을 붙이고 이리저리 감추고 어째쌓는 꼴이 안대서,그래도 다시 사냥할 맘이 생길까바 겁이 나예."

-황순원,「어둠속에 찍힌 판화」


작품 속 사냥꾼은 분명 전작 「목넘이 마을의 개」에 등장하던 탐욕스러운 인간들보다는 한 단계 나아간 인물이다.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지 않았고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절제해도 인간의 욕망을 거스르기는 어렵다.

인용된 부분에서 보듯 사냥꾼은 자신이 사용하던 '총알' 하나 만큼은 아내 모르게 숨겨두며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위로한다.

욕망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적인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의 '아내'는 사냥꾼의 이러한 욕망에 대해 너그러운 자세를 지녔다.

한마디로 부부는 서로 상처를 주지 않는 공존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사회생태학자 머레이 북친은 현재 인류가 처한 생태학적 위기의 시작은 '지배가 만연한 사회구조'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를테면 국가권력의 시민지배,가부장의 여성지배,계층과 연령과 지식의 격차로 발생하는 차이를 통해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 구조가 인간의 자연지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배의 메커니즘이 종식되지 않는 한 자연은 황폐화될 수밖에 없다.

모든 뭇 생명을 인간과 같은 존엄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정하고 지배의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자연은 황폐한 얼굴로 인류를 더욱 위협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황순원의 「어둠 속에 찍힌 판화」가 주는 교훈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