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를 넘어 화해와 공존을 모색하다
⊙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이다
최근에 남북관계가 매우 경색되어 가고 있다.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 경협은 위태로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고 금강산,개성관광도 중단되었으며,작년에 개통된 철도운행도 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누구의 책임인지를 떠나서 대단히 아쉽고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관계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한 통일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고 한반도의 평화는 늘 한시적이라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며 분단체제를 유지하는 사회경제적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이념적 차이에서 비롯한 현실 사회의 내적 갈등도 소모적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차츰 농후해지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뒤엉킨 관계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경색된 분위기를 벗어나 화해와 공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시점에서 소설을 살펴본다는 것이 큰 의미를 지니지는 못하겠지만 우리는 한 편의 오래되고 낡은 작품에서 그간 우리가 잊어왔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잊지 말아야 할 교훈 한 가지를 얻고자 한다.
바로 황순원의 「학」이라는 작품이다.
작가 황순원을 떠올릴 때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의 대표작은 아마도 「소나기」라는 작품일 것이다.
소년 소녀의 맑고 순수했던 그러나 짧았던 사랑의 기억을 학창시절 하나의 로망으로 마음 속에 간직한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소나기」의 순수하고 가식이 없는 사랑처럼 작가 황순원은 사회적 관계나 계층,혹은 이데올로기와 같은 요소들을 작품 속에 제시하기보다는 생명의 존엄성 등과 같은 인류가 지향해야할 보편적 가치를 작품에서 주로 표현해왔었다.
작품 「학」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1953년에 창작된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6·25전쟁 직후 38선 접경 북쪽마을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지니고 있어서 자칫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주제를 전달하는,다시 말해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작품이다.
⊙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기
성삼이와 덕재는 어린 시절 단짝 동무로 지냈던 친구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6·25가 터지면서 둘은 서로 이념을 달리하는 적대 관계로 마주하게 된다.
일찍 피난길에 올라 이제는 치안 대원이 된 성삼이가 마을의 농민 동맹 부위원장으로 체포되어 온 덕재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성삼이는 어린 시절 동무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며 덕재의 호송을 스스로 떠맡게 된다.
처음에 덕재를 바라보는 성삼이의 태도는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싸늘했다.
친한 친구에게 속았다는 울분과 적대감이 들끓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삼이는 덕재와 함께 했던 지난날을 떠올리게 된다.
유년시절에 호박잎 담배를 나눠 피던 일과 혹부리 할아버지네 밤을 서리하다가 곤욕을 치르던 일이 머리 속에 절로 생각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성삼이는 덕재와 대화를 하면서 차츰 그에 대한 적대감이 사그러들게 된다.
알고 보니 덕재는 이념과는 무관하게 빈농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용당했을 뿐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농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병석에 누운 아버지와 농사에 대한 애착으로 덕재가 불가피하게 피난을 선택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면서 성삼이는 내적 동요를 겪게 된다.
덕재에 대한 성삼이의 증오는 어느 새 어린 시절의 친밀감으로 녹아들었고 종국에는 그의 처지를 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에 있으면서도 성삼이와 덕재는 서로의 우정을 통해 조금씩 마음을 열어놓게 된 것이다.
⊙ '학'-화해와 공존의 메시지
다음에 인용된 부분은 성삼이와 덕재가 적대적인 관계를 끊고 화해를 이루고 있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부분을 감상하면서 현실 속의 문제를 해결할 단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지난날 성삼이와 덕재가 아직 열두어 살쯤 났을 때 일이었다.
어른들 몰래 둘이서 올가미를 놓아 여기 학 한 마리를 잡은 일이 있었다.
단정 학이었다.
새끼로 날개까지 얽어매 놓고는 매일같이 둘이서 나와 학의 목을 쓸어안는다,등에 올라탄다,야단을 했다.
그러한 어느 날이었다.
동네 어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서울서 누가 학을 쏘러 왔다는 것이다.
무슨 표본인가를 만들기 위해서 총독부의 허가까지 맡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그 길로 둘이는 벌로 내달렸다.
이제는 어른들한테 들켜 꾸지람 듣는 것 같은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자기네의 학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중략)
그러나 다음 순간,바로 옆 풀숲에서 펄럭 단정학 한 마리가 날개를 펴자 땅에 내려앉았던 자기네 학도 긴 목을 뽑아 한번 울음을 울더니 그대로 공중에 날아올라,두 소년의 머리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저쪽 멀리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두 소년은 언제까지나 자기네 학이 사라진 푸른 하늘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얘,우리 학 사냥이나 한번 하구 가자." 성삼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덕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내 이걸루 올가밀 만들어 놀께 너 학을 몰아오너라." 포승줄을 풀어 쥐더니,어느 새 잡풀 새로 기는 걸음을 쳤다.
대번 덕재의 얼굴에서 핏기가 걷혔다.
좀전에,너는 총살감이라던 말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성삼이가 기어가는 쪽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리라.
저만치서 성삼이가 홱 고개를 돌렸다.
"어이,왜 멍추같이 서 있는 게야? 어서 학이나 몰아 오너라."
그제서야 덕재도 무엇을 깨달은 듯 잡풀 새를 기기 시작했다.
-황순원 「학」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성삼이는 덕재를 풀어준다.
성삼이가 덕재를 풀어주는 것은 덕재에게는 당연히 좋은 일이 되겠지만 치안대원인 성삼이에게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 있다.
호송을 하겠다고 했으니 덕재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성삼이에게는 치명적인 오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는 결과를 얻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덕재를 풀어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덕재와 함께 했던 지난날의 소중한 추억 때문이며,추억 속에 담긴 우정 때문임은 분명하다.
그 옛날 위험에 처한 '학'을 무엇보다도 구해야 한다는 마음에 성삼과 덕재가 서로 이견이 없었듯이,지금 위험에 처한 덕재를 풀어주어야 한다는 마음에 성삼은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정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이지 치안대원이나,농민동맹부위원장과 같은 지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삶이지 이데올로기가 아닌 것이다.
⊙ 갈등과 대결을 넘어서기 위해
황순원의 「학」은 당대 현실을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본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작품은 '우정'이라는 다소 소박하고 낭만적인 소재로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의미가 있는 것은 작품에서 전달하는 소박한 인간적인 정서가 어쩌면 어지러운 남북관계를 풀어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삼이와 덕재가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은 서로가 함께 했던 친구라는 것,또 서로의 아픔을 공유했다는 것,이를 대화로 풀어가려고 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요보다는 관용을,자기주장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고자 했던 태도에 있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어쩌면 이러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면모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명분과 실리, 그리고 이념적 우열이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대결과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것은 해묵은 이데올로기 논쟁보다는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라는 것을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이다
최근에 남북관계가 매우 경색되어 가고 있다.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 경협은 위태로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고 금강산,개성관광도 중단되었으며,작년에 개통된 철도운행도 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누구의 책임인지를 떠나서 대단히 아쉽고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관계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한 통일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고 한반도의 평화는 늘 한시적이라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며 분단체제를 유지하는 사회경제적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이념적 차이에서 비롯한 현실 사회의 내적 갈등도 소모적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차츰 농후해지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뒤엉킨 관계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경색된 분위기를 벗어나 화해와 공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시점에서 소설을 살펴본다는 것이 큰 의미를 지니지는 못하겠지만 우리는 한 편의 오래되고 낡은 작품에서 그간 우리가 잊어왔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잊지 말아야 할 교훈 한 가지를 얻고자 한다.
바로 황순원의 「학」이라는 작품이다.
작가 황순원을 떠올릴 때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의 대표작은 아마도 「소나기」라는 작품일 것이다.
소년 소녀의 맑고 순수했던 그러나 짧았던 사랑의 기억을 학창시절 하나의 로망으로 마음 속에 간직한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소나기」의 순수하고 가식이 없는 사랑처럼 작가 황순원은 사회적 관계나 계층,혹은 이데올로기와 같은 요소들을 작품 속에 제시하기보다는 생명의 존엄성 등과 같은 인류가 지향해야할 보편적 가치를 작품에서 주로 표현해왔었다.
작품 「학」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1953년에 창작된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6·25전쟁 직후 38선 접경 북쪽마을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지니고 있어서 자칫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주제를 전달하는,다시 말해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작품이다.
⊙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기
성삼이와 덕재는 어린 시절 단짝 동무로 지냈던 친구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6·25가 터지면서 둘은 서로 이념을 달리하는 적대 관계로 마주하게 된다.
일찍 피난길에 올라 이제는 치안 대원이 된 성삼이가 마을의 농민 동맹 부위원장으로 체포되어 온 덕재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성삼이는 어린 시절 동무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며 덕재의 호송을 스스로 떠맡게 된다.
처음에 덕재를 바라보는 성삼이의 태도는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싸늘했다.
친한 친구에게 속았다는 울분과 적대감이 들끓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삼이는 덕재와 함께 했던 지난날을 떠올리게 된다.
유년시절에 호박잎 담배를 나눠 피던 일과 혹부리 할아버지네 밤을 서리하다가 곤욕을 치르던 일이 머리 속에 절로 생각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성삼이는 덕재와 대화를 하면서 차츰 그에 대한 적대감이 사그러들게 된다.
알고 보니 덕재는 이념과는 무관하게 빈농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용당했을 뿐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농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병석에 누운 아버지와 농사에 대한 애착으로 덕재가 불가피하게 피난을 선택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면서 성삼이는 내적 동요를 겪게 된다.
덕재에 대한 성삼이의 증오는 어느 새 어린 시절의 친밀감으로 녹아들었고 종국에는 그의 처지를 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에 있으면서도 성삼이와 덕재는 서로의 우정을 통해 조금씩 마음을 열어놓게 된 것이다.
⊙ '학'-화해와 공존의 메시지
다음에 인용된 부분은 성삼이와 덕재가 적대적인 관계를 끊고 화해를 이루고 있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부분을 감상하면서 현실 속의 문제를 해결할 단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지난날 성삼이와 덕재가 아직 열두어 살쯤 났을 때 일이었다.
어른들 몰래 둘이서 올가미를 놓아 여기 학 한 마리를 잡은 일이 있었다.
단정 학이었다.
새끼로 날개까지 얽어매 놓고는 매일같이 둘이서 나와 학의 목을 쓸어안는다,등에 올라탄다,야단을 했다.
그러한 어느 날이었다.
동네 어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서울서 누가 학을 쏘러 왔다는 것이다.
무슨 표본인가를 만들기 위해서 총독부의 허가까지 맡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그 길로 둘이는 벌로 내달렸다.
이제는 어른들한테 들켜 꾸지람 듣는 것 같은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자기네의 학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중략)
그러나 다음 순간,바로 옆 풀숲에서 펄럭 단정학 한 마리가 날개를 펴자 땅에 내려앉았던 자기네 학도 긴 목을 뽑아 한번 울음을 울더니 그대로 공중에 날아올라,두 소년의 머리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저쪽 멀리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두 소년은 언제까지나 자기네 학이 사라진 푸른 하늘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얘,우리 학 사냥이나 한번 하구 가자." 성삼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덕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내 이걸루 올가밀 만들어 놀께 너 학을 몰아오너라." 포승줄을 풀어 쥐더니,어느 새 잡풀 새로 기는 걸음을 쳤다.
대번 덕재의 얼굴에서 핏기가 걷혔다.
좀전에,너는 총살감이라던 말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성삼이가 기어가는 쪽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리라.
저만치서 성삼이가 홱 고개를 돌렸다.
"어이,왜 멍추같이 서 있는 게야? 어서 학이나 몰아 오너라."
그제서야 덕재도 무엇을 깨달은 듯 잡풀 새를 기기 시작했다.
-황순원 「학」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성삼이는 덕재를 풀어준다.
성삼이가 덕재를 풀어주는 것은 덕재에게는 당연히 좋은 일이 되겠지만 치안대원인 성삼이에게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 있다.
호송을 하겠다고 했으니 덕재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성삼이에게는 치명적인 오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는 결과를 얻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덕재를 풀어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덕재와 함께 했던 지난날의 소중한 추억 때문이며,추억 속에 담긴 우정 때문임은 분명하다.
그 옛날 위험에 처한 '학'을 무엇보다도 구해야 한다는 마음에 성삼과 덕재가 서로 이견이 없었듯이,지금 위험에 처한 덕재를 풀어주어야 한다는 마음에 성삼은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정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이지 치안대원이나,농민동맹부위원장과 같은 지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삶이지 이데올로기가 아닌 것이다.
⊙ 갈등과 대결을 넘어서기 위해
황순원의 「학」은 당대 현실을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본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작품은 '우정'이라는 다소 소박하고 낭만적인 소재로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의미가 있는 것은 작품에서 전달하는 소박한 인간적인 정서가 어쩌면 어지러운 남북관계를 풀어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삼이와 덕재가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은 서로가 함께 했던 친구라는 것,또 서로의 아픔을 공유했다는 것,이를 대화로 풀어가려고 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요보다는 관용을,자기주장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고자 했던 태도에 있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어쩌면 이러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면모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명분과 실리, 그리고 이념적 우열이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대결과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것은 해묵은 이데올로기 논쟁보다는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라는 것을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