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권도 중요하지만 자기결정권도 존중해야”

[Focus] 국내 존엄사(死) 인정 첫 판결… 소극적 안락사 허용?


국내에서도 존엄사를 처음으로 인정하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지난 11월28일 서울지방법원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며 환자 김모씨(75·여)와 김씨의 가족들이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을 상대로 낸 '무의미한 연명 치료 장치 제거 소송'에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이는 1997년 의사가 가족들의 요구로 인공호흡기를 뗐다가 살인 방조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른바 '보라매병원 사건' 판결을 뒤집은 것으로 존엄사 안락사에 대한 논란을 불러올 전망이다.

⊙ 법원 판결 어떤 의미를 가지나

법원은 그동안 인간의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번 판결은 법원이 생명권 외에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재판부는 "헌법 제10조에서 규정한 인간 존엄의 권리는 생존해 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생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도 구현돼야 하는 궁극적 가치"라며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더 부합한다"고 밝혔다.

곧 회복 가능한 환자가 치료 중단을 요구했다면 생명권을 보호해야 하겠지만 의학적으로 치료 자체가 무의미한 환자가 치료 중단을 요구한다면 생명권보다 존엄하게 죽을 자기결정권을 인정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보라매병원 사건의 경우 당시 환자는 회복 가능한 상태였지만 김씨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자기결정권을 인정해 주었다는 입장이다.

법원은 또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더라도 적극적 안락사까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혀 소극적 안락사도 사실상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 종교계 반대

법원이 존엄사를 인정했지만 모든 의미의 안락사를 허용해 주었다고 확대 해석해선 곤란하다.

'안락사'는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인위적인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시술자의 입장에서 크게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요청에 따라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에게 약제 등을 투입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를 말하고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약물 공급,영양 공급 등을 중단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존엄사'란 말기 환자가 임종 단계로 들어갔을 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영양치료 등 생명 연장 의료행위를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품위 있는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의 죽음은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결과이지 이러한 치료의 중단으로 결코 죽음이 앞당겨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법조계 일부는 식물인간 상태에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수 있도록 판결한 만큼 넓은 의미에서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계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종교계는 이번 판결에 대해 소극적 안락사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우려하며 선진국에서 보편화되고 있는 '호스피스완화의료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제도'란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 대신 편안한 임종을 맞도록 위안과 안락을 최대한 베푸는 봉사활동 또는 안식처를 말하는 것으로 환자는 물론 환자 사망 후 충격을 받을 가족들까지 보살피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도 호스피스완화의료제도를 안락사를 예방하는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 존엄사의 요건

법원이 인정한 존엄사의 요건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환자가 의학적으로 소생 불가능하다는 근거가 있어야 하며 다음으로 무의미한 생명 연장 치료를 원치 않는다는 환자 본인의 의사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환자 본인의 의사는 환자가 사전에 한 의사표시,성격,가치관,종교관,기대생존기간,환자의 상태 등을 고려해 추정할 수 있다.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서울대병원과 서울 아산병원의 의학적 판단에 따라 김씨의 기대여명을 3~4개월 정도로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고 환자 김씨가 3년 전 남편이 심장병으로 임종을 맞을 당시 생명을 연장하는 기관 절개술을 거부했고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내용의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주변의 증언에 따라 김씨에게 '인공호흡기 없이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의사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 앞으로의 재판 전개는

이번 판결로 김씨의 호흡기가 당장 제거되지는 않는다.

재판부가 시한을 명시하는 가집행 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 판결이 나야 가능하다.

피고인인 연세대학교 측이 판결문을 받은 후 2주일 내에 항소하지 않으면 판결이 확정되는데 연세대 측은 "4일 현재 아직 판결문을 받지 않았다"며 "주말이나 주초에 판결문을 받으면 내용을 자세히 검토한 후 17일쯤 항소 여부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힐 계획"이라고 말했다.

병원 측이 항소하면 재판은 상급 법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연세대 측이 불복하면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생명 연장 치료를 중단해 달라는 유사한 소송이 줄을 이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판결이 상당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존엄사를 판단하는 기준이나 구체적인 지침 등 입법 마련이 시급하다.

김주영 한국경제신문 인턴(한국외대 3년) 423026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