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는 무엇인가… 자본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의 비극
⊙ 근대 사회에서의 '소외'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이 끔찍한 벌레 한 마리로 변해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또 벌레가 된 후에 사랑하던 가족들마저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급기야는 자신을 향해 폭력을 휘두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내용이다.
소설 속에서 샐러리맨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노동할 수 없는 한 마리 끔찍한 벌레로 변하고 그의 가족들은 결국에는 그를 끔찍하게 집 밖으로 내치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주인공 '잠자'는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 누구도 자기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끔찍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한마디로 그는 감당 못할 '소외'를 경험했던 것이다.
'소외'는 원래 관념론자 헤겔이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사용한 개념으로 '정신의 소외'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후에 마르크스가 소위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개념을 이론화하였으며,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에 의해서 그 범위가 더욱 확장되었다.
그는 소외의 개념을 인간의 온갖 정신병적인 징후와 연결시켰는데 한마디로 소외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타인(사물)'으로 느끼는 현상 전부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소외의 정서가 심각해진 것은 인류의 전체 역사를 따지고 볼 때 그렇게 오랜 일은 아니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현대인에 비하면 중세인은 소외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는 모든 것을 신이 결정지었기 때문에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은 오히려 정신적 자유가 엄격히 통제된 중세사회에서 정신적 안정과 삶의 의미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이는 요즘에도 정신적으로 미숙한 이들이 미신에 빠지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근대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인간 존재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불안과 초조 속에 방치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감정이 곧 '소외'인 것이다.
결국 소외란 근대 이후에 사회 문제로 본격화한 것이다.
⊙ 「복덕방」의 세노인
근대 이후 '소외'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에 나타나는 감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소외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1930년대 이제 막 근대가 시작되던 식민지 조선에서도 이러한 소외를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30년대 우리 소설의 대표적인 스타일리스트로 불려질 만한 작가 이태준의 「복덕방」이 그것이다.
「복덕방」의 주인공은 안초시와 서참의,박희완 영감이다.
세 노인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부동산중개소'인 복덕방에서 무료하게 소일하며 지내고 있다.
서참의는 구한말 무관이었으나 일제 강점 후 복덕방을 차린 인물이고,안초시는 사업 실패로 몰락하여 지금은 서참의의 복덕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노인이다.
그에게는 무용가로 유명한 딸 경화가 있는데 딸은 안초시를 짐스러워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대서소를 하겠다며 일어를 공부하는 박희완 영감은 훈련원 시절 서참의의 친구다.
작품의 주요 사건은 박희완 영감이 재기를 꿈꾸던 안초시에게 잘못된 부동산 투자 정보를 일러주면서 시작된다.
안초시는 딸이 마련해 준 돈을 전부 부동산에 투자하지만 결국 사기를 당하고 만다.
충격을 받은 안초시는 음독 자살을 하고 아버지의 자살로 사회적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한 딸 경화는 서참의의 권유를 받아들여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른다.
하지만 장례식에 참석한 서참의와 박희완은 떠난 친구를 진심으로 위로하지 않는 딸의 태도에 서러운 생각만 들 뿐이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작품에서 다룬 내용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만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더욱 공감이 간다.
작품의 원문을 살펴보며 논의를 더 진척시켜 보자.
⊙ 자본주의와 소외
초시는 늙어 가는 것이 원통하였다.
어떻게 해서나 더 늙기 전에 적게 돈 만원이라도 붙들어 가지고 내 손으로 다시 한번 이 세상과 교섭해 보고 싶었다.
지금 이 꼴로서야 문화 주택이 암만 서기로 내게 무슨 상관이며 자동차,비행기가 개미떼나 파리 떼처럼 퍼지기로 나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이냐.
세상과 자기와는 자기 손에서 돈이 떨어진,그 즉시로 인연이 끊어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면 송장이나 다름없지 뭔가?"
초시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 지가 이미 오래였다.
"무슨 수가 없을까?"
또 "무슨 그루테기가 있어야 비비지!"
그러다가도,"그래도 돈냥이나 엎질러 본 녀석이 벌기도 하는 게지."하고 그야말로 무슨 그루터기만 만나면 꼭 벌기는 할 자신은 가졌다.
그러다가 박희완 영감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관변에 있는 모 유력자를 통해 비밀리에 나온 말인데 황해 연변(黃海沿邊)에 제이의 나진(羅津)이 생긴다는 말이다.
-이태준 「복덕방」
짧은 인용이지만 이 부분에서 안초시는 극도의 소외감을 느끼는 모습을 드러내주고 있다.
세상은 갑자기 문화주택도 들어서고,자동차,비행기와 같은 도시 문명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자신은 자꾸만 늙어만 가고 있어 세상과의 분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송장'이라도 된 듯한 느낌.
소외가 기본적으로 자신을 타인이나 사물로 느끼는 정서라고 할 때 안초시의 감정은 지독한 소외에 다름 아니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깨어보니 벌레로 변해버린 것처럼,안초시 역시 스스로를 송장으로 느끼며 소외감에 빠져든 것이다.
그렇다면 소외를 경험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안초시의 말대로 '돈 만원'이라도 붙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자본'은 인간 삶의 중요한 척도가 되었고,따라서 자본을 소유하지 못하거나,노동으로 자본을 생산할 수 없는 이들은 지독한 분리와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 그 자체만으로는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본'을 획득할 수밖에 없었고,「복덕방」의 안초시 역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돈'을 구해 다시 '돈'을 부풀리고 그런 연후에 '세상과 교섭'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안초시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급기야 그는 자살하고 만다.
⊙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연대
안초시의 불행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다.
사회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 모자라서 소외를 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무능력과 게으름,혹은 운이 없는 까닭에 현대인들이 소외를 경험할까.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선,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처럼 인간은 자신이 애써 노동한 그 결과물을 향유하지 못하고 정당한 대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외를 경험하게 되고,또 기계의 부속품처럼 노동의 전체 과정으로부터도 소외를 경험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 서로가 서로를 자본으로 수치화된 대상으로 여기는 탓에 소외는 더욱 깊어진다.
가치의 척도가 수량화되면 될수록 소외가 심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은 그리 많지 않다.
다시 말해 소외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소외의 극복은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실천적 방안은 아마도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노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과 좀더 공정한 분배의 시스템,그리고 보다 활발한 정치참여의 유도가 우선적으로 고려될 때 개인이 느끼는 소외의 정도는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동체와 함께 한다는 연대감을 조성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 근대 사회에서의 '소외'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이 끔찍한 벌레 한 마리로 변해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또 벌레가 된 후에 사랑하던 가족들마저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급기야는 자신을 향해 폭력을 휘두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내용이다.
소설 속에서 샐러리맨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노동할 수 없는 한 마리 끔찍한 벌레로 변하고 그의 가족들은 결국에는 그를 끔찍하게 집 밖으로 내치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주인공 '잠자'는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 누구도 자기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끔찍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한마디로 그는 감당 못할 '소외'를 경험했던 것이다.
'소외'는 원래 관념론자 헤겔이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사용한 개념으로 '정신의 소외'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후에 마르크스가 소위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개념을 이론화하였으며,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에 의해서 그 범위가 더욱 확장되었다.
그는 소외의 개념을 인간의 온갖 정신병적인 징후와 연결시켰는데 한마디로 소외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타인(사물)'으로 느끼는 현상 전부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소외의 정서가 심각해진 것은 인류의 전체 역사를 따지고 볼 때 그렇게 오랜 일은 아니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현대인에 비하면 중세인은 소외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는 모든 것을 신이 결정지었기 때문에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은 오히려 정신적 자유가 엄격히 통제된 중세사회에서 정신적 안정과 삶의 의미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이는 요즘에도 정신적으로 미숙한 이들이 미신에 빠지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근대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인간 존재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불안과 초조 속에 방치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감정이 곧 '소외'인 것이다.
결국 소외란 근대 이후에 사회 문제로 본격화한 것이다.
⊙ 「복덕방」의 세노인
근대 이후 '소외'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에 나타나는 감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소외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1930년대 이제 막 근대가 시작되던 식민지 조선에서도 이러한 소외를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30년대 우리 소설의 대표적인 스타일리스트로 불려질 만한 작가 이태준의 「복덕방」이 그것이다.
「복덕방」의 주인공은 안초시와 서참의,박희완 영감이다.
세 노인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부동산중개소'인 복덕방에서 무료하게 소일하며 지내고 있다.
서참의는 구한말 무관이었으나 일제 강점 후 복덕방을 차린 인물이고,안초시는 사업 실패로 몰락하여 지금은 서참의의 복덕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노인이다.
그에게는 무용가로 유명한 딸 경화가 있는데 딸은 안초시를 짐스러워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대서소를 하겠다며 일어를 공부하는 박희완 영감은 훈련원 시절 서참의의 친구다.
작품의 주요 사건은 박희완 영감이 재기를 꿈꾸던 안초시에게 잘못된 부동산 투자 정보를 일러주면서 시작된다.
안초시는 딸이 마련해 준 돈을 전부 부동산에 투자하지만 결국 사기를 당하고 만다.
충격을 받은 안초시는 음독 자살을 하고 아버지의 자살로 사회적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한 딸 경화는 서참의의 권유를 받아들여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른다.
하지만 장례식에 참석한 서참의와 박희완은 떠난 친구를 진심으로 위로하지 않는 딸의 태도에 서러운 생각만 들 뿐이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작품에서 다룬 내용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만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더욱 공감이 간다.
작품의 원문을 살펴보며 논의를 더 진척시켜 보자.
⊙ 자본주의와 소외
초시는 늙어 가는 것이 원통하였다.
어떻게 해서나 더 늙기 전에 적게 돈 만원이라도 붙들어 가지고 내 손으로 다시 한번 이 세상과 교섭해 보고 싶었다.
지금 이 꼴로서야 문화 주택이 암만 서기로 내게 무슨 상관이며 자동차,비행기가 개미떼나 파리 떼처럼 퍼지기로 나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이냐.
세상과 자기와는 자기 손에서 돈이 떨어진,그 즉시로 인연이 끊어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면 송장이나 다름없지 뭔가?"
초시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 지가 이미 오래였다.
"무슨 수가 없을까?"
또 "무슨 그루테기가 있어야 비비지!"
그러다가도,"그래도 돈냥이나 엎질러 본 녀석이 벌기도 하는 게지."하고 그야말로 무슨 그루터기만 만나면 꼭 벌기는 할 자신은 가졌다.
그러다가 박희완 영감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관변에 있는 모 유력자를 통해 비밀리에 나온 말인데 황해 연변(黃海沿邊)에 제이의 나진(羅津)이 생긴다는 말이다.
-이태준 「복덕방」
짧은 인용이지만 이 부분에서 안초시는 극도의 소외감을 느끼는 모습을 드러내주고 있다.
세상은 갑자기 문화주택도 들어서고,자동차,비행기와 같은 도시 문명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자신은 자꾸만 늙어만 가고 있어 세상과의 분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송장'이라도 된 듯한 느낌.
소외가 기본적으로 자신을 타인이나 사물로 느끼는 정서라고 할 때 안초시의 감정은 지독한 소외에 다름 아니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깨어보니 벌레로 변해버린 것처럼,안초시 역시 스스로를 송장으로 느끼며 소외감에 빠져든 것이다.
그렇다면 소외를 경험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안초시의 말대로 '돈 만원'이라도 붙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자본'은 인간 삶의 중요한 척도가 되었고,따라서 자본을 소유하지 못하거나,노동으로 자본을 생산할 수 없는 이들은 지독한 분리와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 그 자체만으로는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본'을 획득할 수밖에 없었고,「복덕방」의 안초시 역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돈'을 구해 다시 '돈'을 부풀리고 그런 연후에 '세상과 교섭'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안초시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급기야 그는 자살하고 만다.
⊙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연대
안초시의 불행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다.
사회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 모자라서 소외를 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무능력과 게으름,혹은 운이 없는 까닭에 현대인들이 소외를 경험할까.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선,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처럼 인간은 자신이 애써 노동한 그 결과물을 향유하지 못하고 정당한 대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외를 경험하게 되고,또 기계의 부속품처럼 노동의 전체 과정으로부터도 소외를 경험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 서로가 서로를 자본으로 수치화된 대상으로 여기는 탓에 소외는 더욱 깊어진다.
가치의 척도가 수량화되면 될수록 소외가 심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은 그리 많지 않다.
다시 말해 소외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소외의 극복은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실천적 방안은 아마도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노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과 좀더 공정한 분배의 시스템,그리고 보다 활발한 정치참여의 유도가 우선적으로 고려될 때 개인이 느끼는 소외의 정도는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동체와 함께 한다는 연대감을 조성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