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은 자유 의지냐 운명이냐

⊙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9. 김동리「역마」
너무도 유명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인간이 운명을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결국에는 신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모티브로 해서 창작되었다.

선왕인 라이어스가 아들 오이디푸스를 낳은 후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아내와 혼인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게 되어 이에서 벗어나려고 '아들 오이디푸스'를 죽이라 명하지만 운명은 가혹하게도 신탁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실행하고 만다.

아무리 인간이 운명을 벗어나려고 해도 운명은 실현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은 자유 의지의 존재이며,자신의 삶은 스스로가 책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문제는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에서 보듯 생각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또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보자.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유명한 저작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종은 유전자를 전달하는 수단이나 기계에 불과하며,따라서 유전자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곧잘 이타적으로 해석하는 벌이나 개미의 죽음도 결국에는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한 복잡한 시스템으로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모든 행위도 결과적으로는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선조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전인자의 명령에 의한 것이 되고 자유 의지는 그 존립 근거를 마련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에게는 일말의 자유 의지도 없다는 말인가.

또 인간은 유전적 요인이나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인가.

이 물음은 결코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운명(환경)에 의해 인간 삶이 결정된다는 결정론과 인간 스스로가 자기 삶을 선택적으로 살아간다는 자유 의지론 사이에는 생각보다 오랜 논쟁의 역사가 존재한다.

고대 스토아학파와 아리스텔레스,중세의 토머스 아퀴나스와 계몽주의 시대의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자유와 운명에 관한 논의는 철학의 고전적 주제이기도 하다.

대개 스토아 학파와 아퀴나스 등은 결정론적인 면을 지지한 반면,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고,칸트는 '도덕은 반-인과적(contra-causal) 자유를 필요로 한다'는 말을 통해 인간은 아무런 이유나 원인이 없이도 일정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칸트는 인간을 스스로 순수하게 자기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이처럼 자유 의지와 결정론의 문제는 단순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 역마살의 운명

우리 소설에도 이처럼 운명과 인간의 자유 의지 사이에서 대결구도를 보이고 있는 작품이 있다.

「무녀도」「을화」를 통해서 전통적인 삶과 근대적인 삶 사이의 갈등을 선보였던 작가 김동리의 「역마」가 그러하다.

일단 작품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화개 장터에서 주막을 하며 살아가는 옥화는 아들의 역마살을 없애려고 성기를 쌍계사에 보낸다.

성기는 세 살 났을 때 그의 사주에 시천역(時天驛)이 들었다 했었고,이후에 보았던 당사주에서도 여전히 역마살이 떠나지 않았었다.

떠돌이의 운명을 타고난 팔자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체장수 영감이 딸 계연을 데리고 와서 그녀를 주막에 맡기고 장삿길을 떠나게 된다.

옥화는 예쁘장하게 생긴 계연을 성기와 결혼시키면 성기의 역마살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성기와 계연이를 서로 가깝게 지내도록 한다.

계연으로 하여금 성기의 시중도 들게 하고 함께 산을 오르게 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성기와 계연은 자연스럽게 연정의 감정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날 옥화는 우연히 계연의 귓바퀴에 난 사마귀를 보고 계연이 자신의 동생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체장수 영감이 36년 전 자기 어머니와 하룻밤을 보냈던 남사당패 우두머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결국 얼마 안 있어 돌아온 체장수 영감에 의해 옥화의 예감은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성기와 계연은 결코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 운명에의 순응

아래의 인용은 성기가 계연과 체장수를 떠나 보내고 어머니 옥화와 함께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대목이다.

성기는 두 눈에 불을 켜듯한 형형한 광채를 띠고,그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또 모르지만 한 번 알고 나서야 인륜이 있는듸 어찌겠냐."

그리고 부디 에미 야속타고나 생각지 말라고 옥화는 아들의 뼈만 남은 손을 눈물로 씻었다.

(중략) 두릅회에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키고 난 성기는 옥화더러,"어머니 나 엿판 하나만 마춰 주." 하였다.

"……."

옥화는 갑자기 무엇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이 성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중략) 작년 이맘때도 지나 그녀가 울음 섞인 하직을 남기고 체장수 영감과 함께 넘어간 산모퉁이 고갯길은 퍼붓는 햇빛 속에 지금도 하동 장터 위를 굽이 돌아 구례 쪽을 향했으나,성기는 한참 뒤 몸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은 구례 쪽을 등지고 하동 쪽을 향해 천천히 옮겨졌다.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서 있을 어머니의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갈 무렵 하여서는,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었다.

-김동리 「역마」

위의 인용에서 살펴보듯이 옥화는 성기에게 '인륜'을 거스를 수 없다며 계연을 그만 잊으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옥화는 스스로가 성기를 붙잡아두려는 마음을 포기한다.

역마살을 씻어내고 성기를 한 곳에 정착시키려 했던 마음을 스스로 접게 된 것이다.

성기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계연이 자기의 이모뻘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주에 나타난 운명을 받아들이는 듯 엿장수가 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떠돌이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계연이 떠난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아 스스로 사랑이 맺어질 가능성마저 단절시킨다.

마침내 옥화와 성기가 '사랑'이라는 인간적인 행위로 '역마살'이라는 운명을 벗어나려던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처럼 성기는 무속의 예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작품 속 결말은 결코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다.

성기는 오히려 주어진 역마살이라는 운명에 순응함으로써 비로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회복하며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 자유 의지와 운명은 양립 불가능한가?

작품 속에서 성기가 유랑을 택한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인간이 운명에 패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자연법칙과 인간의 생명이 조화롭게 유지되는 세계를 추구하려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역마살로 상징되는 자연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이를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투영할 때 비로소 참된 삶의 길이 열린다는 깨달음을 이 작품이 주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결정론적인 사고는 모든 종류의 사건은 어떤 다른 종류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고,따라서 어떤 행위가 '원인이 있다(운명이나 숙명,혹은 유전자,환경)'는 말은 '행위가 자유롭다'거나 '행위자에 의해 자유롭게 선택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양립 가능할 수 있다.

작품 「역마」와 관련시켜 보자면,성기가 엿장수가 된 것은 성기에게 역마살이 존재하기도 하고,그 스스로 그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남사당패로 떠돌던 외할아버지와 강원도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는 아버지를 두고,떠돌이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화개장터에서 살아가는 성기는 어려서부터 떠돌이의 삶을 익숙하게 보아왔을 것이고,그러한 삶이 어느 순간 매력적으로 여겨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운명은 우리 주변에 가장 익숙한 삶의 방식일지도 모르며 그것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