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 다음 제시문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논술 기출문제 풀이] 2009학년도 경희대 2차 모의논술고사 문제 (上)

예전에는 고급 문화와 통속 문화라는 이분법으로 문화를 인식하였다.

통속 문화는 저급한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멀리해야 마땅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국가가 세운 문화 회관에서 대중 가요 가수가 공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지난날의 문화 인식을 반영하는 사례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대중이 보편적 가치를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되면서 대중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오히려 고급 문화가 집단 이기주의와 특권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받는 경향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중 매체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으면 대중매체가 생산하는 텍스트가 교육적 논의의 대상으로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누구도 성인 군자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또 인생을 통속적이고 몰개성적인 대중으로서만 살아가려고 작정하는 사람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는 성인 군자이고자 하고 어느 측면에서는 대중의 일원으로 생활한다.

결국 인간을 고상한 인간과 통속적 인간으로 완벽하게 구분할 수 없듯이 인간은 대중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지성적이고 교양 있는 인간일 수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의하면 한 공동체의 지배적 권력관계는 정치적,경제적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상징적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를 통해 정당화되고 재생산된다.

그는 이 상징적 자원의 핵심적 부분을 문화적 자본이라고 부른다.

즉 인간의 문화적 행위가 한 시대의 위계적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권력의 기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자본은 문자능력,교육의 접근권,문화예술 생산의 향유능력 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사회적 문화적 엘리트 집단은 가치 있는 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의 구분을 통해 사회적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공고화시킨다.

즉 고급문화는 정교하고 지적이고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영속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규정되는 반면,대중문화는 사소하고 지적으로 열등하고 일시적 만족을 주며 퇴행적 효과를 가진다고 규정되는데 이러한 구분은 곧 그것을 주로 향유하는 집단과 계층 간의 사회적,경제적 차이를 인간의 보편적 능력과 지위의 차이로 전이시키는 기능을 하게 된다.

민속예술은 아래로부터 성장했다.

이는 고급 문화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스스로 형성된 자발적인 민중의 표현이다.

대중문화는 위로부터 강요된 것이다.

이는 비즈니스맨에게 고용된 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관중은 수동적 소비자일 뿐 그들의 참여는 구매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에만 제한되어 있다.

통속적 작품의 제왕들은 간단히 말해 이윤을 더 내기 위해,자신의 계급적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의 문화적 욕구를 이용한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이 중 두 번째 목적만이 이루어진다.

민족예술은 민중들의 고유한 제도로서 주인의 고급 문화라는 거대한 형식적인 공원과 거리를 둔 민중들의 조그만 사설 정원이었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이 장벽을 허물면서 대중을 고급 문화의 저질적 형태로 끌어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적 지배의 도구가 된다.

나는 소위 대중 문학이니 본격 문학이니 하는 경계가 어디까지이고 그 구분법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필자가 세상에 선보인 '○○○○'는 이른바 대중 소설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대중과 본격의 구분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고,대중의 정서를 담아내는 소설작법을 염두에 두고 있으므로 '○○○○'가 곧 대중 소설이라는 등식에 별다른 유감은 없다.

또한 본격 문학 쪽의 철저한 침묵 역시 당사자로서 거론할 입장이 못 된다.

사실 양자는 오랫동안 회피와 모멸과 냉담,심지어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셈이다.

한쪽에서는 문학성이라는 잣대로 대중 문학에 대한 언급 자체를 불쾌하게 여긴 듯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의 정서를 외면한 그들만의 향연쯤으로 간주해왔다.

최근 본격 문학이 대중 문학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지만 그렇다고 그 논의를 적자의 시혜쯤으로 여긴다면 사양하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문학의 위기,소설이 읽히지 않는 시대라는 자탄의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이 과연 소설 전방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인지는 의문이다.

독서 시장의 급격한 위축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여전히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본격 문학이라는 겉옷을 걸친 소설은 외면 받고,저편에게 남루한 대접을 받는 대중 소설은 꾸준히 독자층을 넓혀 왔다.

왜 본격 소설은 문학 종사자와 작가 지망생,혹은 일부의 독자에게만 읽히고 있는가?

대중의 외면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 이유를 혹자는 천민적 사회 구조에서 찾으려고 한다. 부분적으로는 가능한 시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민적 사회구조가 귀족적 사회구조로 전환되기까지는 본격 문학의 소외를 차라리 영광쯤으로 알겠다는 몸부림으로 여겨져 못내 씁쓸하다.

대중의 외면을 곧바로 대중의 함량 미달에 의한 몰이해로 간주하고 싶어하는 본격 문학의 성골 의식이 가히 애처로울 지경이다.

동이 틀 무렵,한 미국 사람이 동인도에서 유래한 잠옷차림으로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방식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누워 있다.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중세 유럽에서 발명된 세계를 쳐다보고 강한 어조의 라틴어 한 마디를 내뱉으며 황급히 욕실로 들어간다.

욕실의 유리는 고대 이집트인들에 의해 발명된 것이고 마루와 벽에 붙인 타일의 사용법은 서남 아시아에서,도자기는 중국에서,금속에 에나멜을 칠하는 기술은 청동기 시대의 지중해 지역 장인들에 의해서 발명된 것이다.

심지어 그의 목욕탕과 변기는 로마의 것을 약간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시설에 순수하게 미국인이 기여한 것이라는 난방 장치인 스팀 라디에이터뿐이다.

이 욕실에서 그는 고대 골(Gaul) 사람들이 발명하였던 비누로 몸을 씻고 이를 닦는데 이것은 18세기 후반 미국에 소개된 유럽의 생활양식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인도나 터키 중 어느 한 곳에서 발견된 철과 탄소의 합금인 강철로 만든 면도날로 면도를 하고,터키 타월로 물기를 닦아 낸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외래적인 습관의 희생자가 된 이 사람은 침실로 다시 돌아오자마자 옷을 챙겨 입기 시작한다.

그가 입은 옷은 아시아 스텝 초원 지대의 고대 유목민들의 가죽옷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발명된 처리법으로 제조한 가죽을 고대 그리스에서 전해 온 본에 따라 재단하여 만든 뻣뻣한 신을 신는다.

이제,그는 영국에서 발명된 열차를 향해 뜀박질을 한다.

가까스로 열차를 타고 나서 그는 멕시코에서 발명된 담배나 브라질에서 발명된 여송연을 피우기 위해서 자리에 등을 기댄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에다 독일에서 쓰던 인쇄술,그리고 고대 셈족이 발명한 문자로 씌어진 기사를 인쇄한 그 날의 신문을 읽는다.

외래적인 문물이 미국 문화에 어떤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였는지를 지적하는 신문 사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는 인도 유러피언 언어로 히브리 신에게 그가 100% 미국인(American:이탈리아의 지리학자 Americus vespucci의 이름에서 유래됨)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