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자본주의의 뒷골목에서 탈출을 꿈꾸다

⊙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자본주의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7. 이상「날개」

근대 자본주의는 전에 누릴 수 없었던 삶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은 엄청난 재화를 생산하고 이를 소비하도록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자본'이 가장 중요하다.

자본은 생산요소 중의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생산이 추구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본'을 끊임없이 재순환시키고 더 확대 재생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더 많은 고용이 이뤄지고 생산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러한 순환과정에서 자본의 생산을 위해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모든 것이 자본의 잣대로 수량화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고유한 개개의 성질보다 자본으로서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자본주의는 획일화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수가 없다.

삶의 패턴도 예외는 아니다. 보다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인간의 삶은 정형화되게 마련이다.

한국 사회에서 근대가 이제 막 자리잡기 시작한 1930년대.

근대 문명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부적응한 한 작가가 있다.

근대가 추구하는 생산하고 소비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운운하며 근대인으로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한 인간,바로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상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총독부 건축기사로 활동하며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근대문명의 세례를 적게 받았다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쓴 작품 「날개」는 근대문명이 가져다준 긍정적인 면이 드러나 있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 자본주의가 감추고 싶은 뒷골목의 풍경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휘황찬란한 겉모습과는 달리 자본주의 초기에는 오물과 악취가 가득한 뒷골목도 함께 존재했다.

이를 테면 산업화 초기의 런던은 다수의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비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미로처럼 이어지는 아파트를 지었는데 오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어 대단히 불결하고 악취가 심했다고 한다.

또 노동자들은 하루의 피로를 잊기 위해 사창가와 아편굴 같은 곳을 전전했다고 전한다.

흥미롭게도 작가 이상이 주목한 곳은 바로 자본주의가 감추고 싶은 뒷골목의 풍경이었다.

⊙ 자본을 모르는 미숙아

이상의 「날개」는 그 공간적 배경이 다름 아닌 유곽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가장 추악한 뒷골목이 작품의 주요 공간인 것이다.

이는 이 작품이 처음부터 근대 자본주의를 긍정하기보다는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의 주인공은 매춘을 업으로 하는 한 여자와 그리고 그에 빌붙어 사는 한 사내, 곧 '나'이다.

소설은 두 사람의 길항작용을 통해서 진행된다.

작품의 첫 시작에 언급된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처럼 주인공 '나'는 완벽하게 집안에서 유폐된 존재이다.

그는 '창호가 똑같고 아궁이 모양이 똑같고 각 가구에 사는 사람들이 송이송이 꽃과 같이 젊은' 33번지의 유곽에서 햇볕이 들지 않는 쪽방에 틀어박혀 살아간다.

아내가 외출했을 때 잠시 아랫방으로 건너와 아내의 화장품을 만지작거리며,혹은 돋보기로 불장난을 하며 소일하는 것이 '나'의 생활 전부이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와 마르크스를 알고,위고와 불란서 혁명을 아는 지식인 '나'는 어째서 이 좁은 방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근대 자본주의적인 질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유아적인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아내는 '나'에게 동전 몇 푼을 쥐어 주지만 '나'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줄 몰라 저금통 속에 하나 둘씩 모았다가 끝내는 변소에 빠뜨려 버린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어떻게 돈을 모으는지에 대해서도 통 관심이 없다.

지식인 '나'는 이처럼 근대 자본주의 질서에서 철저히 소외되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이를 거부한 인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아내에게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전혀 행사하지 못한 채 마치 아내의 '아이'처럼 보호받고 감시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에 반해서 아내는 어찌되었든 경제적인 활동을 하며 자본의 생리를 이해하고 있고, 또 자본이 인간의 행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도 명확히 깨닫고 있는 존재이다.

그런 까닭에 아내는 외출에 재미를 붙인 남편에게 돈을 주며 '자정(子正)'까지는 집에 오지 못하도록 한다.

자신이 매춘을 하는 동안 남편이 들어와 방해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아내가 자본으로 남편의 시간을 구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내는 그 누구보다도 자본주의적 질서를 내면화한 존재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상의 「날개」에는 '아내'로 상징되는 자본주의가 '나/남편'으로 상징되는 '자연인'을 지배하고 규율하는 것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천재를 박제로 만들어 버리고,'나'를 아내의 쪽방에 유폐시키고,또 '자정'까지 집 안에 들어올 수 없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자본'인 것이다.

이처럼 자본은 인간의 행위를 철저하게 지배하고 규율하는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 자본을 넘어 날아가다

자,그렇다면 '나'를 이처럼 억압하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래 인용문을 살펴보자.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발길이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가 이것만은 분간하기가 좀 어려웠다.

가야 하나? 그럼 어디로 가나?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날개」

억압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의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자본주의의 상징인 아내에게 종속과 지배를 당하지 않겠다는 자의식이야말로 억압에서 벗어나는 길인 것이다.

다행히 시간도 정오(正午)이다.

정오는 '나'에게 어떤 시간인가.

그것은 정확히 자정(子正)을 뒤집어 놓은 시간이다.

다시 말해 아내가 '나'의 시간을 소비하고 억압했던 정반대편,곧 해방의 시간인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자본에 의해 억압된 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박제가 다시 천재가 되는 시간인 것이다.

⊙ 진정한 주체로서의 삶

근대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분명 전에 없던 물질적 풍요를 안겨다 주었다.

또한 근대적인 삶의 형태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현대인들이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지극히 요원하다.

그러나 아무리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모든 가치를 자본의 기준에서 수량화하고 수단화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특히 인간적 가치를 자본을 생산하는 수단적 의미만으로 한정한다면 그것은 천재를 박제로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일이다.

결국 작품 「날개」에서 '날개'는 '아내'로 상징되는 음험한 자본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비상을 꿈꾸는 진정한 주체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