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 깊은 곳에 뭐가 있나 알 수 없어" 반론도 많아

원유 수요 감소 전망에 유가 60$대로 급락세

[Focus] 석유가 고갈되고 있다고…거짓말 마?
국제 유가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는 와중에 널뛰듯 요동치고 있다.

올해 초 배럴당 90달러대 수준이던 서부텍사스원유(WTI)는 지난 7월 배럴당 147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가 이달 들어 다시 60달러대 초반까지 뚝 떨어졌다.

골드만삭스는 WTI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던 지난 5월 "향후 2년 안에 국제유가가 배럴당 200달러를 돌파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가 최근 "내년 국제유가는 최악의 상황일 경우 배럴당 50달러까지 급락할 수 있다"고 말을 바꾸었다.

메릴린치도 지난 29일 올 4분기 WTI가격 전망치를 기존 배럴당 107달러에서 78달러로 조정하고,내년 평균 가격 전망치인 배럴당 90달러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메릴린치는 "1980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세계 각국에서 수요가 감소하고 있다"며 "무엇보다도 신흥시장의 원유 수요 감소가 시작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이처럼 석유 가격은 다른 어떤 자원보다도 단기적 변동폭이 매우 큰 편이다.

석유 가격이 출렁이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석유가 우리 일상생활과 각종 산업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 현대산업사회의 혈액과 같은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유 가격을 전망하는 데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쟁점이 있다.

바로 수요와 공급의 불투명성과 불균형 문제다.

특히 석유자원이 언제까지 존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은 오랫동안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석유는 분명 한정된 자원이다.

이 때문에 언젠가는 고갈될 것이다.

그러나 석유 고갈의 시기가 언제가 될지, 현재 남은 석유 가채 매장량이 얼마인지는 사실상 수수께끼에 가깝다.

흔히 '석유 가채매장량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앞으로 40년 후면 석유가 고갈될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져볼 때 이 말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 관련 업계와 학자들의 설명이다.

우선 산유국들은 석유 매장량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중심으로 중동과 남미,미국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들이 석유 매장량 관련 정보를 1급 국가 기밀로 부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원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석유자원을 무기삼아 서방 국가들을 압박하는 중동과 남미 국가들의 경우 이런 경향이 더욱 크다.

'석유 가채매장량'도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석유 가채매장량'의 정확한 정의는 '현재 확립된 기술을 바탕으로 불확실성 없이 상업적으로 생산 가능한 양'이다.

석유 가채매장량을 연간 평균 생산량으로 나눈 값이 바로 '석유 가채연수'다.

즉 석유 자원이 앞으로 40년 뒤 고갈될 수 있다는 말은 석유 매장량을 추가로 확보하지 못하고 계속 생산만 할 때 앞으로 40년간 생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다시 '기술이 더욱 발달되고 새로운 유전을 발견하면' 석유 매장량과 가채연수가 늘어날 수 있다는 뜻으로도 뒤집어 풀이될 수 있다.

여기서 바로 석유고갈에 대한 비관론과 낙관론이 갈라지게 된다.

비관론자들은 석유 자원의 한정성 자체에 더 무게를 두지만 낙관론자들은 석유 채굴 기술의 발전과 원자력 등 대체에너지 개발에 따른 수요 변화에 더 중점을 둔다.

석유 고갈에 대한 비관론은 1950년대 '피크(Peak)'이론의 등장으로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1956년 미국 석유회사 셸에 근무하던 미국 지질학자 마틴 킹 허버트는 "미국 내 석유 생산이 1970년대 초반 정점에 달하고 이후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라고 충격적인 예고를 내놨다.

본격적인 '석유 고갈론'의 출발점이었다.

허버트의 예측대로 미국 본토 48개 주의 석유 생산은 1970년대에 정점에 달했고 미국은 석유 순수입국으로 전환되면서 허버트의 이론이 힘을 얻었다.

이후 석유 생산이 최고점을 이루는 시점은 '허버트 피크(Hubbert's Peak)'로 불리게 됐다.

또 영국의 지질학자 콜린 캠벨과 프랑스의 석유지질학자 장 라에레르는 1998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잡지에 함께 썼던 유명한 글 '값싼 석유의 종말'에서 지구 차원의 '허버트 피크'는 이미 도달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현재 국내 초·중·고교 교과서에도 석유가 향후 40년 안에 고갈될 우려가 있다는 말이 실릴 정도로 석유 고갈 관련 비관론은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낙관론자들은 이와 다른 근거를 내세운다.

우선 석유 가채매장량이 지속적으로 늘어왔다는 점이 유력한 근거다.

일례로 2005년 말 세계 석유 가채매장량은 1조2000억배럴로 집계돼 20년 전보다 약 5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석유매장량 40년'이란 가채 연수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새로운 유전 발견과 채굴기술 발전 등으로 연간 생산량이 증가해 계속적인 소비 증가에도 불구하고 매장량이 함께 증가한 셈이다.

이탈리아의 석유메이저기업 에니(ENI)의 부회장인 레오나르도 마우게리는 최근 발간된 저서 '당신이 몰랐으면 하는 석유의 비밀(The Age of Oil)'에서 "석유종말론자들이 풀리지 않는 땅 속 비밀을 알아낸 것처럼 그럴 듯한 모형과 공식적인 통계자료를 제시해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어느 누구도 지금 땅 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며 땅 속 석유자원의 분포량을 찾는 것은 "존재 여부가 의문스러운 성배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고백했다.

프랑스 석유회사 토털SA의 최고경영자(CEO) 크리스토프 드 마르제리는 "러시아의 경우 냉전시절 서방 기업 투자에 대한 정치적인 제약으로 많은 유전지역이 탐사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다"며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 시절부터 민간 투자를 개방하자 러시아에 현대적 석유채굴 기술이 유입됐고 생산량이 급속도로 증가했다"고 말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필요한 투자가 이뤄지면 2030년까지는 석유 공급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석유 고갈의 시기가 언제쯤 다가올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며,그 시기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다소 극단적인 낙관론도 있는 게 사실이다.

석유 생산의 꼭지점이 왔는지 여부는 오직 사후적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석유 고갈에 대한 비관론과 낙관론 중 어느 쪽이 옳은지 알게 되려면 앞으로 몇 년을 더 기다려봐야 할 것이다.

아마 그때쯤 되면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유가 상승의 원인도 분명히 밝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찾아올 석유 고갈 이후의 시기에 대해 여전히 너무나 준비가 부족하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